복음적 에큐메니스트의 탄식

by reformanda posted Dec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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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랜치스코, WCC 지도자들에게 교회일치를 연설하고 있다.

 

 

복음적 에큐메니스트의 탄식

 

WCC 바로알기 32

 

1,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는 어느 신학교에서 기초 신학을 수업했으며누구에게 사사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단계에서 배운 기초 신학의 기조는 대부분 일생 동안 유지된다. 복음주의적 신학교에서 신학을 수업한 사람은 평생 복음주의적 신학을 지향하고자유주의 신학이나 탈기독교 전통의 신학교에서 기초 신학 수업을 받은 사람은 십중팔구 그 학교의 신학 노선을 따른다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다.

 

2. 사도 바울은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라”(딤후 3:14)고 한다신앙과 신학은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다인간 인식 기능의 특성 때문에 대부분 먼저 각인된 정보전제논리가 사물 판단의 규범으로 작용한다

 

3.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은 학생기독운동(SCM)에서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배웠다서로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 뉴비긴은 두 진영이 상극관계라고 증언한다. WCC 에큐메니칼 운동은 당대의 시대정신에 충실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배신했다고 한다.

 

4. 뉴비긴의 무엇이 WCC와 관련한 오판을 인지하게 했고인류의 희망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고 고백하게 했을까무엇이 뉴비긴으로 하여금  WCC와 조화롭지 못하게 하고이 단체의 ‘선교와 전도에 불만을 가지게 했을까?

 

5. 뉴비긴의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복음주의 지향성은 주로 웨스트민스터칼리지에서 받은 신학교육과 깊은 연관이 있다뉴비긴의 ‘복음적 에큐메니칼’ 신앙은 학생기독운동(SCM)에서 발아했고장로교회 신학교인 케임브리지칼레지에서 틀을 잡았다.

 

6. 뉴비긴이 회심체험을 경험한 학생기독운동은 경건기도전도믿음해외 선교를 강조하는 동시에 자유주의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특징인 사회적 책임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포용적인 단체였다.  이 학생운동의 신학적 태도와 포용적인 특징에 불만을 지닌 보수계 지도자들은 1928년에 기독학생회(Inter-Varsity Fellowship, IVF)를 결성하여 독립했다.

 

7. 뉴비긴은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 후 잉글랜드 장로교회 뉴캐슬노회의 허락을 받아 웨스트민스터칼리지에 입학했다이 신학교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 연원한 개혁신학 전통의 교육기관이다당시에는 영국장로회 목회자선교사신학자 양성기관이었다. 현재는 1972년에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영국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 in England)의 신학교육 기관이다.

 

8. 뉴비긴은 웨스트민스터칼리지 재학 중 십자가에서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중심성을 확신했다로마서 연구와 함께 개혁주의 구원론을 확고히 자기 것으로 삼았다개혁신학 전통을 따르는 교회와 신학교가 전도기도경건 생활에 대체로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9. 뉴비긴은 스코틀랜드국교회(Church of Scotland, 장로교회에든버러노회에서 목사로 장립(1936)받았다그리고 아일랜드장로교회가 인도에 파송한 선교사의 딸 헬렌 헨더슨과 결혼했다두 사람은 학생기독운동의 간사로 활동하면서 사귀었다.

 

10. 인도 칸치푸람 지역의 농촌과 도시에서 전도 담당 선교사로 활동했다인도 남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성공회영국 감리교회스코틀랜드국교회미국 회중교회 선교부들을 연합시켜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 1947)를 출범시켰다남인도교회의 마두라이 지역 담당 주교(bishop) 중 한 명이 되었다.

 

11. 뉴비긴은 1959년에 국제선교협의회(IMC) 총무직을 맡았다. 1961이 단체와 WCC의 통합을 주도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WCC 부총무로 활약했고동시에 WCC로 병합된 국제선교협의회의 연장인 세계선교전도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총무로 활동하면서 이 기구를 이끌었다.

 

12. 뉴비긴은 에큐메니칼 활동에 힘입어 WCC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 1947 WCC 창립 자문위원으로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창립총회는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설계라는 주제로 모였다. 뉴비긴은 남인도교회의 대표자로, WCC 창립 멤버로 참석했다비셔트 후프트 목사와 함께 활동했다(뉴비긴, 231).

 

13. 뉴비긴은 1950년에 모인 WCC 중앙위원회에 참석했다. ‘토론토 성명’ 작성을 주도했다(뉴비긴, 269). WCC는 교회협의회이고 단일교회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가 말하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 곧 우남 상탐(unam sanctam)을 지향함을 규명했다. WCC가 가시적이고 실제적으로 존재하며 실재하는 공동체로서 하나의 교회를 모색하는 단체라는 것을 밝혔다(뉴비긴, 270; <교회란 무엇인가?>, 2010). WCC는 개신교회정교회로마가톨릭교회오순절파 교회들의 일치를 모색한다(뉴비긴, 370).

 

14. 뉴비긴은 WCC 초기부터 WCC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에게 WCC의 모습은 어색했다(뉴비긴, 245). 기독교의 기본적인 원리가 망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뉴비긴, 245). 자신과 같은 전통적인 선교 개념을 가지고 접근을 하는 사람들과 이와 다른 개념의 선교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지적인 공감대가 없었다(뉴비긴, 244).

 

15. 뉴비긴이 교회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려고 씨름한 노력의 신학적 기초는 복음적 에큐메니칼 신앙이었다(뉴비긴, 247). 그는 두세 명이 모이는 곳에는 선교회 지부가 아니라 보편교회가 존재한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뉴비긴, 258). 교회가 선교지에 기술자가 아니라 전도자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16. 뉴비긴은 WCC가 호켄다이크의 영향 아래서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다교회의 초점이 복음이 아니라 세상의 사회 정치 과학 등 세속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세상 통치 사역(missio dei)을 돕는 방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WCC가 그 정도까지 변질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뉴비긴, 279). 뉴비긴은 1961년 제선교협의회(IMC)WCC에 병합시키고 WCC 선교와전도위원회를 이끌면서도 과연 사회적 불의에 도전하는 일과 세상사 해결이 기독교 선교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뉴비긴, 311, 343).

 

17. 느 피선교지인 뉴비긴에게 중요한 말을 해 주었다. “선교지의 연약한 분야에 전문가를 보내 주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기술자이기만을 원치 않고 복음을 전하는 자이기를 원한다”(뉴비긴, 357)고 했다기술자가 아니라 전도자를 보내고구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자를 보내 달라고 했다뉴비긴은 이 말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뉴비긴, 358). 

 

18. 한편북미의 복음주의자들은 뉴비긴에게 불경건한 사상과 잘못 짝지으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그들은 에큐메니즘과 공산주의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살인과 간음과 같은 부류로 여겼다(뉴비긴, 368). 그들은 WCC가 로마가톨릭교회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식에 혐오감을 가졌다(뉴비긴, 376). 

 

19.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가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를 고려하면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도모하는 애큐메니칼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뉴비긴, 377). 뉴비긴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메시지’ 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긍정적인 복음이었다그 메시지가 아메리카에도 지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뉴비긴, 368)

 

20. 뉴비긴이 만난 다수의 젊은 성직자들은 WCC의 급속한 사회변동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의 구현을 기독교 선교로 생각했다(뉴비긴, 371). 그것에 매진하겠다고 했다인도 탐바람에서 열린 국제선교대회(1938) 이후교회 중심적인 선교 모델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기독론적인 선교가 아니라 신론적인 선교 이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뉴비긴, 381).

 

21. 초기 WCC는 자신의 갈 길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혼재된 표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WCC의 어느 보고서는 하나님께서 온 창조세계를 다스린다고 선포한 뒤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 주신 지혜와 사랑과 능력에 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했다(뉴비긴, 381). 이 보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종교에 하나님의 지혜사랑구원의 능력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는 ‘시대 정신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22. 뉴비긴이 말하는 1960년대의 ‘시대 정신이란 무엇인가뉴비긴이 이 대목에서 언급하는 영국국교회 사제 존 로빈슨(John Robinson)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이다로빈슨은 런던 남부지역 영국국교회 울위치 교구의 감독이었다기독교 신앙에 도전하는 <신에게 솔직히>(1962)를 출판했고책이 나오자 마다 수십만 권이 팔릴 정도로 당대의 관심을 끌었다.

 

23. 로빈슨은 보편구원론을 믿으며 세속화 신학을 강조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성경의 신은 신화적인 세계관과 과학 이전 시대의 우주관에 지나지 않는다하나님, 신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깊이와 중요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신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존재가 아니다신은 ‘저 밖에’ 있는 타자가 아니다신은 인간 존재의 기반(ground)이다우리와 신의 관계는 우리가 존재의 기반에 참여함으로써 생긴다존재의 기반에 참여한다는 말은 남을 위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신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 안에 있다신은 백발노인이 아니라 너와 나의 존재의 기반이라고 했다로빈슨은 폴 틸리히의 존재의 기반 개념과 불트만의 비신화화 개념을 엮어 냈다.

 

24.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신학은 인간학이고기독교는 인간의 종교이다뉴비긴이 말하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은 자유주의 신학의 기반인 인본주의이다이 정신의 핵심은 상대주의주관주의종교다원주의 사상 등이다모든 종교가 동격 동가라고 보는 사상을 담고 있다.

 

25. 뉴비긴은 WCC가 시대정신에 충실하게 자유주의 신학 세계관을 받아들였다고 한다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며혁명운동을 구속사역과 동일시하고 있었다고 한다(뉴비긴, 390). 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이신칭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인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삶이다따라서 기독교의 관심은 예수 구원이 아니라 세상사 해결이다. WCC의 세상사 해결 곧 하나님의 선교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인본주의 사상이다.

 

26. 뉴비긴은 로빈슨의 사상에 충격을 받았다이 책이 시대정신이 가져온 혼란을 가중시켰다고 한댜명목상으로 기독교인이지만 하나님을 실존하는 존재로 보지 않은 사람들의 분위기를 잘 포착한 책이었다고 한다.

 

 

27. 뉴비긴이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선교 후원자들이 로비슨의 책을 읽고서 그것이 진정한 진리를 담고 있고궁극적인 진리를 계시하는 것으로 여기며 환영한 점이다그들은 뉴비긴의 구태의연한 기독교 신학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선교를 하나의 사치스런 낭비로 여겼다기독교의 근본 진리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뉴비긴, 392).

 

28. 뉴비긴은 그 무렵 WCC 지도자들과 불화를 겪었다. WCC 신학저널 제목의 글자 ‘s'와 관련된 것이었다. 국제선교연합회(IMC)가 발행해 오던 선교저널 ’인터내셔널 리뷰 오브 미션즈’(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명칭의 끝에 붙어 있는 글자 ‘s’를 제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 책의 편집자 뉴비긴은 이 선교 잡지의 편집 책임자였고,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29. 뉴비긴은 전통적인 개념의 선교 활동과 그러한 선교를 하는 선교회들(missions)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다뉴비긴이 생각화는 전통적 선교의 주 임무는 교회, 전도자, 선교사, 선교단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불신자들을 회심시키고 기독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30. WCC 지도자들은 전통적인 선교 곧 좁은 의미의 선교사역(missions)을 제거하고 오로지 이 단체가 추구하는 하나의 선교(Mission)만 다루기를 원했다. WCC가 지향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유일한 선교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저널의 끝에 붙어 있는 's'를 제거하라고 압박했다이 글자는 뉴비긴이 제네바를 떠난 뒤에 제거되었다(뉴비긴, 395). <인터내셔널리뷰 오브 미션>(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으로 바뀌었다.

 

31. 뉴비긴은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WCC의 하나님의 선교와 관련하여무엇이 진정한 선교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뉴비긴, 396). 

 

32. 그 무렵, 나이지리아 의사 아데몰라를 만났다. 그는 미션병원을 운영하면서 거액 의료 프로젝트들을 가동하고 있었다(뉴비긴, 400). 뉴비긴에게 치유의 기본 요건은 병원이 아니라 바로 기독교 회중입니다라고 말했다뉴비긴은 이 말에 함축된 의미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뉴비긴, 401).  의료행위는 기술이고기독교 병원은 기독교 원자력 발전소와 같다. WCC가 그런 일을 선교의 전부로 여기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었다(뉴비긴, 403). 아데몰나의 말은 선교의 우선 과제가 의료기술이나 세상사 해결이 아니라 복음전도와 교회건설이라는 것이었다.

 

33. 뉴비긴은 WCC가 확보한 많은 자원재원을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고 싶어 했다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하고 싶었다영혼구원의 가능성이 높은 여러 지역에 집중 투자하기를 희망했다(뉴비긴, 404). 

 

34. 그러나 자신이 총무로 일하는 WCC 선교전도위원회는 피선교지에 대한 기술 지원과 정치행동에는 열정적이었지만 그것에 비해 복음전도는 보잘 것 없었다직접적인 복음전파와 교회의 설립 열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뉴비긴, 440).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선교사는 기술자가 아니라 전도자라고 생각했다복음전도자 파송이 세상사 해결보다 우선적인 선교 과제임을 확인했다.

 

35. 뉴비긴 주변 사방에는 ‘다른 영이 널려 있었다이른바 ‘시대정신이었다. WCC ‘다른 영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그 결과로 WCC “이 시대이 세상이 의제를 제공해 준다는 표어를 앞세웠다(뉴비긴, 405). 영국의 교회와 선교 단체들은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가 담고 있는 ‘시대정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했다

 

36. 그 무렵, WCC는 바티칸과 공식 접촉했다로마가톨릭교회를 포함시킨 교회 연합과 일치를 추구했다(뉴비긴, 408). 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모양새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일치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뉴비긴은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 간의 밀고 당기는 논쟁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고 한다.

 

37. 국제선교협의회(IMC) WCC가 통합된 1961년 이후에도 뉴비긴은 선교 영역에서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역사적인 선교관을 포기하지 않았다뉴비긴은 이미 1960대에 WCC의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WCC가 세속화 사상을 받아들였고호켄다이크의 선교학이 WCC를 장악했고이 단체가 전통적 선교관을 배척했기 때문이다뉴비긴은 그 상황에서도 교회와 복음전도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살아 있는 표지라고 확신했다.

 

38. WCC 4차 총회(웁살라, 1968)는 뉴비긴이 WCC라는 교회연합일치 단체에 걸었던 희망과 기대를 산산이 부셔버렸다전체 집회는 온통 경제적 불의와 인종적 불의에 대한 규탄으로 채색되어 있었다분위기는 분노로 가득 찼다온갖 위협과 분노를 수반하는 끔찍한 법을 선포하는 것과 같았다. 총회에는 시종 복음 메시지는 없었다. “다만작은 구세군 밴드가 찬송을 부를 때 무언의 메로디가 연상시켰을 뿐이었다“(뉴비긴, 454)고 한다.

 

39. 총회에서 잘 훈련된 학생들이 방청석에서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계속해서 험악한 분위를 고조시켰다이보다 더 주목을 끈 것은 피터 시거가 기독교 복음을 조롱하는 그 유명한 가사 곧 ‘당신이 죽을 때는 하늘에 파이가 있을 것이네라는 내용이 담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었다모두들 입을 다문 채 반기독교적인 그 노래를 열심히 듣다가 마치 새로운 진리가 계시된 것처럼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아니어떻게 이런 그룹이 그처럼 쉽게 세뇌당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몰려왔다”(뉴비긴, 454).

 

40. 뉴비긴은 “오늘날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방콕에서 열린 WCC 세계선교전도 대회(1973)에 참가하고서도 매우 괴로워했다(뉴비긴, 453). 세상을 단순히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양분했기 때문이다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로 구분한 것이 아니었다초청받은 강사들을 대체로 자신이 피억압자에 속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뉴비긴, 455). 

 

41. 뉴비긴이 WCC 세계선교전도대회(방콕)에서 실낱 같은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일본인 고수께 고야마가 “십자군의 마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마음이라고 외치는 말이었다진정한 복음, 진정한 영성을 찾는 열망을 가진 자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뉴비긴, 455). 뉴비긴은 “이런 종류의 모임에 내가 참석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임에 틀림없을 것이다”(뉴비긴, 456)라고 말한다.

 

42. 뉴비긴은 WCC 5차 총회(나이로비, 1975)에 참석했다(뉴비긴, 456). 나이로비 총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감을 주었다적대감경멸조롱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이 총회는 그 이전의 어느 총회보다 기독교 진리를 무시했다나이로비에서 겪은 아픔은 뉴비긴의 마음이 WCC에서 완전히 떠나게 만들었다(뉴비긴, 480-481). 자신의 노력하면 WCC가 복음적인 단체로 바뀔 것이라는 희망이 한낱 망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43. WCC는 점차 종교다원주의로 기울어졌다. 뉴비긴은 타문화 선교 곧 타종교권에 대한 선교가 약화되는 사실에 실망했다. 뉴비긴은 1988년에는 WCC의 변질과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에 유감을 가지면서 “교회는 세계선교를 하지 않을 때 자기 문화의 포로가 된다고 역했다타문화 지역과 타종교인에 대한 선교와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버스 지난 뒤의 손들기 식의 발언이었다.

 

44. 1993년에 WCC 총무 콘라드 레이저가 이끄는 이 단체는 더욱 종교다원주의로 기울어졌다. WCC는 기독론 중심의 에큐메니칼 정신에서 완전히 이탈했다복음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사역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기독교 본래의 교회 연합 일치 정신을 상실했다(뉴비긴, 421). 

 

45. 뉴비긴은 선교사역을 식민주의에서 떼어놓으려고 몸부친 선교사였다(뉴비긴, 494-495).  한 동안 하나님이 결코 WCC를 버리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러나 WCC 4차 총회(웁살라, 1968)에 참석한 뒤 더 이상 이 단체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그래서 제네바를 떠나 선교지 인도로 복귀했다남인도교회 마드라스 주교로 활약했다. 1974년에 은퇴하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46. 뉴비긴은 은퇴 후 영국의 신학 기관 연합체인 버밍엄 셀리오크칼리지스(Selly Oaks Colleges)에서 에큐메닉스와 선교신학을 가르쳤다(1975-1979).  유럽 사회의 세속화와 WCC 유형 기독교의 변질변절배신을 절감하고서 기독교 단체의 탈기독교화를 탄식하는 책들을 집필했다.

 

47. 레슬리 뉴비긴은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첫째 개혁주의 구원론 중심의 신학교육이 중요함을 가르쳐준다. 뉴비긴이 동 시대정신 곧 자유주의 신학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성경이 말하는 역사적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확고하게 믿었던 것은 개혁주의 신학교육 덕분이었다. 로마서 중심의 구원론 덕분이다.

 

48. 둘째, WCC는 조용한 복음주의자인 뉴비긴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뉴비긴, 493). 뉴비긴이 자신의 노력으로  WCC의 선교신학을 복음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은 오판이었다.  WCC가 고유한 기독교 선교학에 기초한  ‘에큐메니칼 선교를 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오판이었다.

 

49. 셋째, 레슬리 뉴비긴은 배신 단체의 부역자였다. 국제선교협의회(IMC) WCC와 병합시키고이 단체의 부총무와 선교전도위원회 총무로 오랫동안 일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신한 이 단체의 부역자 역할만 한 셈이다. 뉴비긴은 일생 동안 한 번도 복음적인 에큐메니칼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할 적이 없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유유미션-BREAD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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