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역지사지로 생각해 본다

by dschoiword posted Jan 10, 2017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image765342332.jpg



방언, 역지사지로 생각해 본다

 

강용자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남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뜻이다. 세상사의 많은 것들이 이 단어 하나를 숙고하고 실천하면 풀리지 않을까 싶다. 교회 안에 방언을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방언을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가 역지사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

 

교회 안에는 방언중단론자, 방언지지자, 방언남용주의자 세 부류가 있다. 성경은 방언’을 언급한다. 그런데 방언에 대한 기독인들의 이해는 같지 않다. 극과 극, 이해가 서로 다르다.

 

나는 2015년 여름, 마음을 작정하고 들어간 오산리기도원에서 방언을 받은 듯하다. ‘받은 듯하다는 말은 다다다수준이었다는 뜻이다. 새벽예배 후 혹은 금요철야 때, 아주 멋지게 방언하는 분들을 보면, 참 부러웠다. 방언하는 분위기에 눌려 입을 열지 않다보니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그러면서도 방언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성령님이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 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방언하는 신자들은 대부분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지사충성한다. 예배의 끝자리를 지키는 분들은 거의 다 방언하는 신자들이다. 교회 안에서 이들의 존재는 무엇인가? 예배당에는 방언하는 분들이 있지만, 교회는 이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히려 부정적인 시간으로 방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분들도 있다.

 

성경적인 방언의 모습은 무엇인가? 교회와 방언하는 자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주제들을 상고하면, 방언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갖게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교회라는 공개적인 모임에서, 기도시간에 방언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놀랐고 의아스러웠고 생소했다. 방언은 대개는힘차고 강한 어조를 지니고 있다. 어떤 분의 방언은 이읏 할머니 방에서 흘러나오는 회심곡어투이다. 전직 무당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영어 같기도 하고 러시아어 같은 말을 크게 소리지르고, 스스로 통역도 했다. 기도 내용은 나라와 목회자와 교회를 위한 일상적인 것이었다. 비밀을 유지해하는 내용도 아니고, 특별한 것도 아닌데 굳이 방언으로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목사님이 기도원 설교자로 초대를 받아 설교를 하면서 웨케스 켄네스라는 말을 반복했다.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 했다. 이어서 주님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하여 읊조렸다. 그는 성도들이 써낸 기도 제목에 어울리는 성경구절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그의 주특기였다. 마치 무당에게 복채를 주고 점을 치는 듯 성경구절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성도들이 몰려들었다. 뜻을 알 수 없는 위 두 단어를 반복 읊조리면 각 사람에게 맞은 성경구절을 찾아주었다. 그는 지금 성령님이 그 일을 하신다고 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고민했다.

 

몇 해 전, 나는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본산 교토 히에잔(比叡山)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 불교의 원류지였다. 그곳에서 가지기도(加持祈禱)를 하는 어느 승려를 우연히 목격했다. 그의 동작은 마치 천주교회 사제가 축성을 하는 것과 같았다. 손가락으로 수인(手印)을 하면서 입으로는 뭔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일본어가 아닌 이상한 말이었다. 방언 같았다. 기독교가 아닌 타 종교에서 발견되는 이런 방언과 교회 에서 우리가 접하는 방언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2010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에서 세계 무교 대회가 열렸다. 나는 어떤 관련이 있어 대회에 참석하였다. 미국, 프랑스를 포함한 외국에서 샤머니즘에 관련된 종교인들과 티베트 승려가 참석했다. 학회가 끝난 후,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무당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이태원의 한 여자 무당집을 찾았다. 한 번 점을 보는 데 복채가 최소 500만 원이었다. 그곳에 갔을 때 무당은 우리들을 환영하려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를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 후 여담 때, 할아버지로 빙의된 여자 무당이 갑자기 티베트 승려에게 제언을 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영적으로 수준이 낮아서 재미가 없다. 당신이 모시는 신을 불러내어 나랑 대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승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10여 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승려는 이내 그에게 빙의된 할머니를 불러내는 주술을 했다. 뭔가 손동작을 하면서 주문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 승려의 얼굴은 할머니의 낯과 목소리로 변했다. 놀랄만한 그의 변신에 참석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후에 이어진 그들의 대화는 할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할머니 승려에게 향후의 지침을 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들의 언어는 교회에서 현란하게 내뱉는 방언 어투였고, 음색도 그러했다. 유창했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내뱉았다. 여자 무당은 스스로 통변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산스크리트어, 라틴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여러 가지 외국어를 자유자재로이 구사한다고 했다. 과연 이 무당이 입에서 내뱉는 저 방언과 교회 안에서 우리가 듣는 방언은 어떻게 다른가?

 

이 무당은 나를 처음 대면하자마자 마리아 무리라고 했다. 당시 나는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놀랐다. 차제에 궁금하던 것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당신의 영적세계에서 하나님은 어떤 신인가?” 무당은 큰 신이라고 답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은 작은 신이며, 영적 세계에는 세력과 크기에 따라 신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으며,  자신이 모시는 신은 그 가운데서도 상위 신이라고 했다. 이 무당은 예수님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무당은 내가 묻지 않고 말하지도 않은 개인사를 족집게처럼 맞췄다. 나는 그의 말에 놀랐다.

 

성경은 성령의 은사들을 언급한다. 사도행전 2, 로마서 12, 고린도전서 12-14, 그리고 에베소서 4장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방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편지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4-12).


성령이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 중 하나가 방언이다. 신학자 최덕성 교수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이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일어나는 외국어 말하기'라고 한다. 다만, 예외적인 성경 구절이 하나가 있다고 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이 말씀 외의 모든 방언은 소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언어 사용자들의 의사소통 목적의 지방어이거나 초자연적으로 방언말하기 곧 특별 은사였다고 한다. 어느 분이 저술한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을 소개하면서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는 성경 본문도, 고린도교회가 방언을 남용하자, 바울이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고 소개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하여 비판과 충고를 했다. 고린도교회는 방언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두었다. 방언의 은사가 성령의 임재의 특별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도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게 쓸데 없이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고 본이 될 수 있도록 방언을 사용하라고 권면하였다.

 

바울은 자기가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 방언이 외국어 말하기었든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실재했다. 바울은 모든 고린도교회 신도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방언보다 헌신적인 생활이 더욱 귀중하며, 방언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과 함께 해야 된다고 가르쳤다. 바울은 방언을 말할 때에 세 사람을 넘기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순서를 정해놓고 차례대로 하라, 방언은 성령의 부분적인 은사들 가운데 한 가지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

 

방언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덕을 세우는 방언을 하라(고전 14:3-5). 다 방언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라(14:5). 통역이 없이 방언을 말하면 유익하지 않다(14:6).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14:7-9).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야만인이 된다(14:11). 방언 기도는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이다(14:14).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다섯 마디의 가르침이 낫다(14:19).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다(14:22). 온 교회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미쳤다고 할 수 있다(14:23).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순서를 지켜서 하라(14:27). 순서를 지켜서 하되, 한사람은 통역할 것이며,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만 하라(14:28).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적당히 하고 질서 있게 하라(14:40). 사랑이 없는 방언은 괭가리일 뿐이다(13:1). 방언은 부분적이며 폐하여질 것이다(13:8-10). 장성한 사람에게는 어린아이 시절의 것에 해당한다(13:11). 방언보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12:31). 방언은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주는 수많은 은사 중 하나이다(12:4-11). 모두 다 방언을 말하지 않는다(12:30).

 

항간에, 외국어 방언 말하기는 진짜 방언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무의미하게 쏟아내는 현대 방언만을 참 방언으로 보는 자들의 견해이다. 반복되는 훈련이나 연습에 의한 방언은 참 방언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두 가지 상반된 주장 가운데 어느 것이 성경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방언에 대한 기독인의 이해는 여러 가지이다. 방언은 영언(靈言, Glossolalia)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상당수의 은사주의자들이 이 주장을 지지한다. 외국어이다. 방언 중지론자들이 이를 지지한다. 외국어 방언인 동시에 영언이다. 개혁신학 추종자들 일부가 이를 지지한다. 무아경의 지껄임이다. 방언중지론자들이 지지하는 생각이다. 개혁교회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방언 중지론의 입장을 취한다.


방언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방언은 다양한 외국어-헬라인에게는 헬라어, 히브리인에게는 히브리어-를 말하는 은사이다. 비록 베드로가 한 언어로 설교한 것을 알아들은 것은 그들이 갈대아 언어에도 익숙했기 때문이다”(2:4). “방언들은 학습되지 않은 다양한 외국어를 성령의 능력으로 초자연적으로 말하는 은사이고, 방언 해석은 다양한 외국어들을 본국어로 해석하는 은사이다”(고전 12:10).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다. 속담에 따르면, ‘그는 자신에게 노래하고 음악의 신() 뮤즈에게 노래한다.’ 이처럼 방언을 사람에게 하지 않는 이유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이 소리는 듣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성령의 은사에 의해(이것은 크리소스톰의 견해이다) 비밀()과 숨겨진 것들을 말하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크리소스톰은 비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 계시라는 좋은 의미로 해석하는데, (칼뱅)는 나쁜 의미로 해석하여, 모호하고 그가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한다고 말한 것처럼 비밀스런 말들이라고 이해한다”(고전 14:2 주석).

 

나는 방언을 언급하는 바울의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교회 안에서 방언하는 이들이, 영언을 말하거나 그럴듯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듯하였으나,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이 말하는 초자연적인 상태의 외국어 말하기와 동일하지 않다든가, 성경 시대의 그것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등등에 대해서는, 더욱 더 깊은 관찰과 심층적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이 주제를 대강 소개하는데 그친다.

 

나는 다다다단음구조의 방언을 해본 체험이 있다. 방언을 하면, 순간적으로 영적상태로 올라가 기도에 몰입하기 쉬움을 느꼈다. 나아가 방언기도는 나의 영으로 하는 기도이지만, 마음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의미 없는 기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씀이 옳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방언을 발하는 소리에 집중하다보니 의식이 따로 노는 것이었다. 초보적인 단계 곧 단음 단계에서 회의가 일었다.

 

이 회의는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유창한 방언을 하는 이들도 나와 같다고 고백했다. 개인적인 고민 이야기를 하면서 들려주었다. 스스로 무슨 뜻인지 몰랐기에, 누군가에겐가 이를 확인 받고 싶어 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행해지던 무질서한 방언을 자제하라는 권면, 충고는 방언 자체를 전적으로 금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외국어인지, 영음인지 분간,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로마서 623절에 나오는 은사’(카리스마)는 하나님의 값없는 영생의 선물이다. 은사의 다른 의미는 각 지체에게 주님의 몸을 세우도록 베푸신 것이다. 영적 은사란 유익을 위해 주시는 성령님의 나타남이다. 은사의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신앙공동체에 유익을 가져오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은사가 주어졌다.

 

이 점이 중요하다. 방언을 두세 사람이 순서대로 해야 하며, 통역하는 사람이 없다면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는 방언을 아예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방언기도를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방언은 귀신의 인도를 따르는 증거인가? 확실히 그렇다고 판단할 근거는 빈약해 보인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방언하는 자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 신앙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8-30).

 

바울에 따르면, 방언은 낮은 차원의 은사이다. 그러나 아래의 말씀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이 말씀의 뒷부분은 바울의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앞부분은 교회에서의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한다. 이 점에 의의가 있다. 방언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초자연적인 상태의 외국어 말하기든, 영음이든 간에, 방언은 성령님의 사역과 작용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처럼 방언을 남용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바울이 말한 바를 잘 분별하여, 방언을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교회 안에 방언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방언하는 자들을 위한 부서는 방언을 검토하는 일을 하고, 만약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있다면, 예배 시간이나 특별한 때, 방언을 하나 둘 말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교회의 목표는 이성적이고 고매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신앙의 달음질이어야 하겠지만, 믿지 않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교회는 방언을 이 후자 곧 복음전도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편으로 고려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방언하는 자들을 배려하는 것이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가?

 

방언이 구원받은 자임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방언을 못한다고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방언이 반드시 성령을 받은 외적 증거라고 할 수 없다. 방언을 받지 않았다고 하여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단정할 어떤 근거도 없다. 성경은 더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다.

 

방언의 은사에 대한 이해는 교파별로 극명하게 나뉘어져 있다. 성경적이라고 하여 남용하고 있거나, 비성경적이라고 하여 극히 무시당하고 있다. 나는 양극단의 견해가 모두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방언을 금지하지 않았다. 초자연적인 상태의 외국어 말하기이든지, 영음이든지 간에, 방언은 은사에 해당한다.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서 방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배 후의 컴컴한 교회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어둠에서 나와서 새 신자들을 맞이하는 이벤트나 혹은 아직도 말씀의 깊이를 모르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신자들에게 성령체험에 대한 인식을 고무시키는 사역을 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방언은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하는 그룹 안의 방언 모습보다, 방언 중지론자 집단 안에서 방언하는 자들 안에서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더 뚜렷하다.

 

강용자, 전도사


강용자는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2학년생이다. 이 글은 최덕성 교수가 가르친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성령론과목(2016 가을학기)의 과제물로 제출한 '텀 페이퍼'이다. 방언에 대한 독자적인 자기 목소리를 담고 있다.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