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족을 향하여 눈을 열라

by dschoiword posted Sep 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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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드족 소녀들 (유튜브동영상 캡쳐)

 


쿠르드족을 향하여 눈을 열라

 

1. 혈맹족

 

나는 한국과 터키가 형제국, 혈맹국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다소 불편함을 느낀다. 6.25 전쟁 당시 터키가 우리나라에 파병한 용사의 80퍼센트가 터키족이 아니라 쿠르드족(Kruds)이기 때문이다. 60퍼센트라는 설도 있다. 일부 쿠르드족 병사는 터키어를 한국에 와서 배웠단다. 산악지대에 사는 쿠르드족이 용맹하고 싸움을 잘 하기 때문에 다수가 파명되었다고도 하지만, 터키가 의도적으로 앙숙관계 혈족인 쿠르드족 젊은이들을 한국 전선에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한 로마가톨릭 신자 무사들을 조선 전선으로 내몰아 희생되게 한 것과 같다.

 

쿠르드족은 오랜 세월 동안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족이다. 성경에 나오는 메대 사람들(Medes)이다. 메대왕국(BC 727-549)의 후예이다. 구약성경은 메대 족속 출신 아하수에로스의 아들 다리우스가 바빌론의 임금이 되었고(9:1), 메대 사람들은 은 같은 것엔 관심이 없고 금 같은 것은 탐내지 않는 자들이라고 한다(사 13:17). 강국 메대의 후손들이지만, 지금은 주권, 영토, 국가가 없다. 오래 전, 메대의 패권이 페르시아로 넘어가면서 쿠르드족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쿠르드족의 외모는 이란인, 이라크인과 비슷하다.


쿠르드족은 쿠르디스탄 고원 산악 지대에서 살고 있다. 이라크, 이란, 시리아, 터키에 두루 걸친 지역이다. 추산되는 전체 인구는 3500만 명이다. 인구의 절반에 못미치는 약 1460만 명가량이 터키 동부지역에 거주한다. 터키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한. 이라크에 약 650만 명, 이란에 약 800만 명, 나머지는 시리아와 아르메니아에 거주한다. 이들 가운데서 이라크 거주 쿠르드족은 근년에 미국의 지원으로 자치권을 확보했다. 정부, 의회, 군대를 갖고 있다.

 

쿠르드족이 사는 산악지대에는 나무 없는 민둥산이 많다. 기후는 덥고 건조하다. 다수의 사람들은 , , 염소를 기르는 유목생활과 채소, 곡물재배 등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 소규모 방목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한다. 도시인들은 상점, 약국, 시장, 병원, 식당, 이발소, 운송업 특히 택시, 버스 운전 등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도시 노동자들은 대부분 시멘트 공장, 설탕 공장 등 2차 산업에 종사한다. 월 평균 수입은 대한민국 현재 돈으로 15만 원 정도이다. 택시운전사의 한 달 수입은 25만 원가량이다.

 

쿠르드족의 의료혜택은 미미하다. 촌락이나 소도시에 사는 사람은 장시간 자동차를 타고 도시로 가야하기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대부분의 쿠르드족은 기아상태에 처해 있지는 않다. 목축 또는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애 굶어죽는 자는 없다.

 

쿠르드족은 대가족제도 사회를 이루고 있다. 도시화, 산업화의 영향으로 대가족제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촌락과 도시의 먾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결정권은 여전히 중요시 되고 있다. 촌락의 남자들은 도시에 가서 돈을 벌고 문명의 이기와 바깥세상의 변화를 가지고 촌락으로 들어온다. 이루트를 거쳐 터키가 추구하는 세속주의 곧 탈 이슬람계율주의는 쿠르드족 촌락까지 파고들고 있다.

 

쿠르드족 교육시설은 빈약하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가 있지만 대부분 교육 여건과 형편이 열악하다. 촌락의 초등학교는 기본 시설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생존이 교육보다 우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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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드족 예술품 (페친 사진)

 

2. 자치 정부 수립

 

이라크가 내전을 겪을 무렵,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은 자치정부(KRG, Kurdistan Regional Government)를 세웠다. 이라크의 쇠퇴가 쿠르드족 자치정부 수립의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한 지역 사람들의 행운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불행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라크 북부 로자바 지역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의 민족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하자 그 지역 쿠르드 자치 정부는 동족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라크 안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으로 피난처를 찾아온 수만 명의 시리아 쿠르드족을 차별한다.쿠르드족도 나라 없는 민족이 겪는 갈등과 내분을 경험하고 있다.


여러 지역의 쿠르드족은 이슬람 폭력집단 IS(Islam State)와 맞서 전쟁을 하면서 독립국가 건설을 서두르고 있다. 쿠르드족 여성들도 총을 들고 무시무시한 IS 병사들과 맞서고 있다. 한국의 어느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은 쿠르드족 민병대 여성전사의 용감한 모습을 주제로 만든 기록영상물을 방영한 적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쿠르드족 정부가 이라크 중앙정부의 승인 없이 원유 100만 배럴을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통해 '독립 자금' 1억 달러를 확보했다. 공교롭게도 쿠르드산 원유를 사들인 국가는 이스라엘이다. 쿠르드족은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탈출구를 모색하는 듯하다. 그리고 앙숙인 터키가 원유 수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터키는 원유를 받아 수출한 뒤 수수료를 떼는 방식으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쿠르드족 지역에는 약 45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고 한다.

 

3. 이슬람과 기독교

 

쿠르드족 인구의 80퍼센트는 샤피이파 수니 이슬람 신봉자들이다. 터키족 곧 투르크족의 종교인 하나피파 수니 이슬람과 같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무슬림 사이에는 갈등이 거듭되고 있다. 무슬림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족이 이란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10만 명을 학살했다. 1988년 할아브자 마을을 사린가스 등으로 공격하여 5천 명이 넘는 쿠르드족 인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쿠르드족 기독인은 종족 전체 구성원의 0.1퍼센트 정도이다. 쿠르드족 기독교공동체는 험난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 터키 남동부 지역에는 쿠르드족 교회들이 있다. 디야르바키르(Diyarbakir)복음주의교회의 신도 수는 증가추세이다. 이 교회는 책을 팔거나 쿠르드족 상대로 하는 찻집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쿠르드족 선교를 창의적인 방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터키의 쿠르드족 교회들과 이라크의 쿠르드족 교회들은 거의 교류를 하지 않는다. 터키와 이라크 사이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다. 일자리를 찾아 이라크 북부로 건너간 터키 쿠르드족 가운데는 그곳의 쿠르드교회에서 출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이라크의 쿠르드교회 소식이 터키 쿠르드족에게 전해지고 있다. 쿠르드족이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개방되어 있지만 유럽인에 대해서는 열려있지 않다고 한다.

 

쿠르드족 선교는 한국인에게 다소 용이하다. 쿠르드족이 타 이슬람 국가 상황과 약간 다른 역사와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타종교에 대해 개방적이며 관용적이다. 이 현상은 쿠르드족 다수가 신봉하는 이슬람 종파인 알레비(Alevi)와 관련이 있다. 

 

 

알레비는 시아파와 수피(Sufi) 이슬람이 혼합된 종파이다. 터키 쿠르드족의 20% 정도가 이 종파를 따르고 있다. 알레비 무슬림들은 이슬람 사원에서 이슬람 예배를 드리지 않고 가정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알레비 이슬람은 주류 이슬람 지도자들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많은 탄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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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드족 소년들 (페친 사진)

 

4. 선교의 꿈

 

기독교로 개종한 터키 쿠르드족 기독인들은 모든 권리를 잃는다. 개종 사실이 알려지면 먼저 동료 쿠르드족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 가족 구성원들로부터도 큰 핍박을 받는다.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한다. 쿠르드족 기독인들은 결혼과 취업에서도 큰 불이익을 당한다.

 

쿠르드족교회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이 받는 충격을 다소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고 집에서 쫓겨나고 직장을 잃은 자들에게 거처할 장소와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일거리를 제공한다.

 

쿠르드족 기독인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 때문에 전도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극소수의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조심스럽게 사역을 하고 있다. 한국인 복음 사역자 20명 정도가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사역하면서, 쿠르드족 무슬림과 어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업체를 통한 쿠르드족 선교의 길은 넓게 열려 있다. 터키 동부지역에는 개발되지 않은 많은 천연광물이 있다. 터기 정부를 허가를 받아 체굴, 가공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노동집약 산업들인 전자전기 조립공장, 섬유산업, 간단한 가공 산업, 목재 가공업 등을 할 수 있다. 태권도, 미용, 일용품 판매, 교육 사업도 할 수 있다. 농업기술과 축산업 기술자도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성경책을 배포하고 쿠르드족 언어로 만들어진 예수영화를 상영해 줄 수 있다. 틈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며칠 전, 불가리아에서 복음전도 활동을 하는 나의 제자가 "무슬림과 어울리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면서 선교사 남편과 함께 기쁨으로 봉사하는 사진들을 페이스북에 실었다. "무슬림과 어울리며 살고 있다"는 말이 나의 잠자던 생각을 일깨웠다. 이슬람권에 뛰어 든 복음 전도자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쿠르드족 복음화와 크르드족 선교를 위해 목숨을 건 나의 제자들이 생각났다. 쿠르드족을 향하여 눈을 열라, 이것이 오늘 하나님에 내게 준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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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 민병대 여전사 (유튜브동영상 캡쳐)

 

5. 이민 환영 정책

 

"우리에게 친구는 없고 오직 산만 있다." 이 썰렁한 쿠르드족 속담은 이 민족의 '운명'이 주위 강대국들의 국익에 따라 좌우되어 왔음을 시사한다. 외세의 이익에 따라 이용당하고 배반당하는 역사가 되풀이 되어 왔다. 쿠르드족은 배신과 좌절, 상처과 통한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과 닮았다. 만주벌판, 동러시아 빙판, 중앙아시아 평원를 헤매거나 일제 전쟁터에 끌려간 우리의 민족의 선배들이 겪은 것과 다르지 않다.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쿠르드족, 누가 그들의 비극적 상황에 가슴 아파 하지 않겠는가. 세계의 정치 지도자, 부자, 힘을 가진 정부들이여, 쿠르드족에게 관심을 가지라. 쿠르드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 주라. 대한민국 정부에게 당부한다. 한국전쟁 때 지원군 용사들을 파송한 혈맹족 쿠르드족 지원에 적극 나서라. 나는 쿠르드족을 지켜볼 것이고 응원할 것이다. 리포르만다, 브레드티비, 유유미션은 쿠르드족에게 인류의 희망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에 앞장 설 것이다.

 

대한민국은 혈맹 쿠르드족 이민을 적극 허용하고 환영할 의사가 없는가? 시리아 난민 중에 쿠르드족 기독인들이 적지 않다. 쿠르드족 기독인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국제정세는 난민 수용을 외면할 수 없는 실정이다. 혈맹 쿠르드족을 우리의 다문화 사회 건설과 산업발전의 동반자로 초대함은 의리 있는 처신이다. 서러움과 한을 지닌 백성들에 대한 이민 허용과 환영은 인도주의와 국가 경영 그리고 기독교 신앙차원에서 모두 바람직한 일이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새 역사를 써야 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북한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그렇게 되면 중국이 북조선 영토를 장악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기만 할 때가 아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목표로 삼아 당나라를 상대하여 7년 동안 전쟁을 했지만 그 뒤로 한민족은 민족의 미래를 스스로 해결해 본적이 없다.


나는 옛 고구려 땅 심장부에서, 동북 3성과 연변 지역에서, 고구려의 후손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자주 고구려 후예를 알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고구려는 기원 전 100년경에서부터 기원 후 668년까지 동북아에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약 705여 년 동안 지배했다. 나는 대련(다이련) 지역에서 고구려의 후예국 이름인 '발해'라는 간판과 '발해만'이라고 적힌 중국 지도를 보았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후예나 발해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고구려 민족의 정체성을 지닌 후예들, 중국의 역사왜곡, 동북공정의 부당성을 입증할 그들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어느 도발적인 역사학자는 중국 남방의 묘족(마오족)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주장한다. 묘족은 송나라 이전의 중국 문헌에 등장하지 않으며, 그들이 입고 있는 바지가 고구려식 옷이라고 것을 근거로 삼는다. 당나라가 669년에 20만 명 이상의 고구려인들을 가족 단위로 남방 산악 지대에 강제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1천 만 명 정도의 묘족은 아직도 중국에서 소수자, 주변인,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단다. 


묘족이 고구려의 후손들이라는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과연 묘족 가운데 자신을 고구려 유민, 발해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민족 쿠루드족은 2천 년 이상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았지만, 자기 민족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민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쿠르드족은 한민족에게,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가져온 영토 축소를 운명 탓으로 돌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총을 잡고 분연히 일어설 때이다. 쿠르드족 여성들은 무자비한 IS에 맞서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다. 그들이 한국으로 이민을 오면, 우리에게 영토와 나라가 없는 민족의 불행, 배신, 좌절의 경험 속에서도 강인한 결속력, 끈기, 용기의 소중함을 보여주지 않겠는가.

 

 

최덕성

 

글쓴이는 신학자이다. <한국교회친일파전통>(2000), <쌍두마차시대>(2011), <신학충돌>(2012), <신학충돌 II>(2013), <교황신드롬>(2014), <위대한 이단자들>(2015) 포함하여 약 20권의 신학관련 학술서를 저술했다. 고신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리폼드신학교, 예일대학교,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수학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훼이트빌장로교회의 담임 목사로 봉사했고,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1989-2009), 현재는 브니엘신학교 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교의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