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꼬 없는 찐빵 기독교

by dschoiword posted Jun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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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꼬 없는 찐빵 기독교


우리의 복음전도와 선교의 대상자는 교회 밖에만 있는가? 특정 지역이나 피선교지로 분류되는 특정 나라에만 있는가?  '불신자' 또는 비기독교인만이 복음전도의 대상인가?


영국교회의 감독이며 선교사이며 선교학자인 뉴비긴(L. Newbigin)은 선교지 인도에서 사역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갔을 때,  그의 '선교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선교 대상자들이 인도를 포함한 피선교지에만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자신의 고국에 돌아오니 복음이 필요한 선교 대상자가 바로 그를 파송해 준 영국인들이며,  영국교회이며, 그리고 영국이 피선교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기독교는 영국의 국교이다.


뉴비긴이 영국에 돌아와 직면한 교회는  '문화 기독교'였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우선시 되는 기독교의 모습이 사라졌다. 교회는 사회 기구(social organaization), 광교회(broad sense of church)로 바뀌었다. 복음의 요람이던 영국은 새로운 선교지로 바뀌고 가장 어려운 선교지로 변모했다. 뉴비긴은 기독교가 한번 지나간 지역에 예수 복음의 씨를 뿌리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한국교회는 영국교회를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 개념이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한국교회는 영국교회처럼 에수 복음보다 세상 일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윤리적 행위와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의 최대의 선교 과제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현상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학적 주지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와 이 단체 회원 교회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상당수 복음주의계 교회들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와 관련된 예장 고신도 이와 다르지 않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는 질 들려오지 않고  '윤리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문화기독교'가 마치 복음인 것처럼 외쳐지고 있다.


기독인의 문화적 사회적 의무와 책임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역사적 기독교는 부단히 이 분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왔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나라가 무너지고 국민에 희망이 없던 시절에 예수 복음과 함께 사회 변혁과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데 공헌했다. 그럼에도 당시의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 전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주객이 전도된 기독교, 앙꼬없는 찐빵과 같은 교회가 아니었다. 


나는 예수 믿지 않는 신학자, 불가지론자 신학자, 무신론자 신학자도 알고 있다. 진보진영에만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장로교단 신학자들 가운데도 의중유보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당신에 예수를 믿는다는 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어보라.  사회 기독교, 문화 기독교 이야기만 늘어놓을 것이다. 신학자에게 예리한 윤리적 가르침은 있지만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도무지 접할 수 없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 질문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주도해 온 모 선배 교수에게 묻고 싶다.  40여년 전에 그의 강의를 들은 바 있다. 학생신앙운동 활동과 고려신학대학원 강단에서도 종종 그의 특별강의를 들었다. 언론매체에서도 여러 번 그의 메시지를 들었다. 나는 한 번도 그로부터 예수 복음을 듣지 못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나 윤리실천이 최우선 과제라는 말만 자주 들었다.


윤리실천이 기독교 또는 기독인의 최우선 과제인가? 사도들은 집에서나 성전에서나 예수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행 5:42). 예수 그 분이 구원자라고 하는 요지의 복음전도가 사도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바울,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예수 복음을 믿고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졌는지 의심되는 통탄스런 현실을 자주 볼 수 있다. 교회연합활동에 앞장서는 목회자들 가운데서 그런 인물들이 많다.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이 다르지 않다는 헛소리를 내뱉고, 혼합주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동조하는 얼빠진 목사들이 있다. 교회라고 하는 '종교 비지니스'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이들에게 진정으로 묻고 싶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로 믿는가?" "예수를 믿는다라고 함은 당신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탄선교의 주 대상은 신학교이며, 신학자이다.  "땅 밟기"를 하려거던 신학교에서 함이 마땅하다. 이러한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교리를 가진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예수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서, 무슬림을 포함한 종교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교회헌장, 제2장 16절).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NCCK) 회원 교회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더불어 신앙직제위원회를 구성했다. 교리적인 일치, 교회라는 기구의 일치를 도모하려 함이다. 예수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기독교를 만들 목적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전도의 최우선 대상은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교수들이다. 선교의 최우선 대상은 교회 안에 있다. 신학교에 있다. 목사후보생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복음전도의 대상이다. 수평이동만을 기다리는 개척교회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자신이 선교와 복음전도의 대상자라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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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 개종, 회심, 중생만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다. 개혁주의 문화관, 세계관, 사회적 책임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내가 전수받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전통의 요점들이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여러 해 "개혁주의 전통"을 가르치면서, 나는 개혁주의 전통과 신학에 취약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기독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이상향 건설'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했다. 개혁주의 전통은 비기독교인, 타종교인, 무신론자들에게 복음전도하는 면에서 약점을 보인다. 사를마뉴 황제 이후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으로 간주되었다. 무력으로 기독교로 개종된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 교회를 초대교회의 모습과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이었다.


상당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복음없는 기독교 운동, 앙꼬 없는 기독교 건설 운동에 앞장을 서 왔다. 1948년 WCC 창립 때부터 오래 동안 총무를 지낸 비셔트 후프트는 네덜란드인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이들은 교회의 에너지를 이른 바 '하나님의 선교,' 윤리, 문화 등 비복음적인 일에 쏟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상적인 인간사회 건설로 이해했다. 그 결과는 재앙이다. 복음 부재의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이 단체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회들은 앙꼬없는 찐빵과 같은 집단으로 변했다. 생명력을 상실했다.


나는 WCC 부산총회에 두 주간 동안 주야간 참석하면서 '앙꼬없는 진빵 기독교'의 모습을 목도했다. 인간의 원죄와 자범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고난당하고 죽고 부활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내가 그 마당에서 만난 에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그리스도들 가운데 한 명으로 전락하고 취급당하고 있었다. 로마가톨릭신학이 주도해온 WCC 신학은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제한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


WCC 부산총회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 기독교인만 사랑한다는 발상은 잘못이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 믿어야 할 까닭, 당위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교회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유럽교회, 북미교회, 대양주 주류 교회들이 자신의 주검을 바라보기에 이른 배후에는 무신론자, 예수 그리스도의 적인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쓰나미를 몰고 온 부산총회에 적극 가담하거나 침묵으로 몸사리기를 하던 부산지역의 유명 목사들이 5.25 해운대 참회집회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나는 점이 많다. 그 날의 참회목록은 불교의 108참회문과 비슷했다. 한국교회를 죽음으로 몰고가려고 달려든 WCC 신학을 환영하거나 묵인한 엄청난 죄에 대한 참회고백이 없었다. 상대주의, 주관주의의 방사능으로 기독교 신앙이 여러 가지 종교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해 가는데 대한 반성, 참회, 현실인식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기독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독성을 분별하지 않은 잘못에 대한 참회가 없었다.무신론자가 교회를 이끄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독자들은 사도행전 30 운동(ACTS30)이 무엇을 하려는지 짐직하리라. 우리는 실패한 현대 기독교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한다. 앙꼬 없는 찐빵 기독교를 배격한다. 죽어가는 기독교의 현실을 직시하고 복음전도에 에너지를 우선적으로 쏟으려 한다.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에 따라 성경적 기독교를 재건하고, 전인 구원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복음에 초점을 두고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운동을 전개하려 한다.


사도행전 30운동은 목사, 전도사만이 아니라 장로, 집사, 교사, 성도 모두가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섬기는 기독교 운동이다. 복음을 이해하고, 일목요연하게 전할 줄 아는 제자, 단순한 복음, 단순한 교리, 단순학 신학, 단순한 실천, 단순한 삶, 단순한 메시지를 동족과 이웃나라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전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첩경이다. 나는 한 명의 영혼도 그리스도께 인도해 보지 않은 목회자, 신학자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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