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언어생활/ 찰스 스펄전

by dschoiword posted Oct 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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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언어생활

 

찰스 스펄전

 

 

1. 목회자는, 스스로 목사임을 나타내려는, 우쭐하는 모습을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라고 칭하셨습니다.
(그 호칭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일단 그 호칭은 ‘사람의 아들’ 즉 겸손한 호칭입니다. 보통 사람과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 크시고 높으신 주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면,
그 종들인 목회자들은, 그 ‘인자’ 이상으로, 자신을 높여 불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투, 복장, 몸가짐 등으로.. 더욱 목사답게 보이려고 하는데요..
저 스펄전은, 반대로 그냥 ‘보통 사람’으로 지내는 것이,
가장 목사답게 보이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권위는 오직 영적으로만 나타내는 것입니다.

대학교수와 목회자의 비슷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들만의 특유한 모습이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일반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홍학이 우아하게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나,
황새가 근엄한 척, 깊은 생각에 잡혀 있는 모습을 보면,
모든 목회자가 그렇지는 않지만, 저는 자꾸 일부 목회자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2.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저 스펄전은,
목회자는, 그냥 보통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풍기는 것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빈틈없는 목회자의 티를 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 인간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목사의 가운을 입고, 너무 목사 티를 내는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천하게 지내신 예수님의 모습을, 거꾸로 따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목회자를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의 근엄하고 인간답지 못한 태도 때문이라고 봅니다.

진정으로 권고하거니와,
그런 분들은, 요단강으로 가서, 자기 몸을 일곱 번 씻어서
그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처럼 말입니다.

목회자는 신성함과 더불어, 인간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줄타기와 같이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성을 유지한다고 하면서, 너무 인간적으로만 되어서
신성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신성함은,
고상한 목소리, 권위 있는 복장 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 감화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우다가는, 외식에 빠질 수 있음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

 

3. 목회자는, 어디에 있든지 목사이며,
따라서 자신이 항상 임무 중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임무에서 벗어나 있을 때가 있더라도, 즉각 복귀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쉬는 시간이나, 여가 시간에라도,
항상 선을 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부득불 해야 할 일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임무를 담당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4:2

목회자는 주님으로부터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음성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왕상19:9

(개역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론 활은 때때로 줄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항상 팽팽하게 조여져 있으면, 탄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활의 줄을 끊어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줄은 언제나 팽팽하게 다시 조여질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기타, 바이올린 등의 악기도 마찬가지지요.
줄이 팽팽하게 탄력이 있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휴식을 가지더라도, 거룩한 휴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뉴 포레스트’에 가서 어느 옛날 집을 보았는데,
신기하게 그 방에는 거미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번도 빗자루로 쓸지 않았는데도,
거미가 줄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거미들이 그 방들로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목회자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거미줄이 쳐지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서, 게으르고 한가한 습관들이, 말끔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거미줄이 쳐지지 않은, 항상 말끔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목사는 강단 바깥에서, 사교성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소금이 그릇 속에 담겨 있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릇 밖으로 나가서, 소금이나 음식에 뿌려져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목회자는,
자기의 거룩한 영향력이, 어두운 사회 속으로 (영적으로) 침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혼자 동떨어져서
자기가 ‘맛을 가진 소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혼인잔치에도 참석하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하는 식사자리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과 동떨어져서 스스로 거룩한 체 했던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셨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구별됨(=거룩함)을 지키려 한다면,
그건 바리새인의 태도가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5. 사람들이, 목사라고 해서, 무조건 다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시간을 특별히 할애하여,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그런 목사들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회자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자기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해야 합니다.

꿀통 주위에는, 꿀벌들이 몰려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예이지만, “개조심”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사는 것 같은,
그런 삶의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아무나 오지 말라는 뜻이지요.)

랍비들의 말에 따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해서, 그 지혜를 시험했다고 하지요?
진짜 꽃과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화를 보여주면서
멀리서 어느 것이 진짜 꽃인지, 알아 맞춰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즉시로 신하들에게
‘창문을 열어라’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진짜 꽃에는, 벌들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가짜 꽃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꿀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까?
꿀벌들은, 그가 진짜 향기로운 꽃인지, 아니면 가짜 꽃인지.. 금방 압니다.

 

6. 여러분, 교회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나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목회하려는 목회자는, 그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모든 죄인들을 다 품어줄 수 있는, 드넓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영국의 항구들은, 크고 넓어서,
어떤 선단(배의 무리)이 들어와도, 다 정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조그만 배들은, 아무데나 정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법 큰 배들은, 항구가 넓은 곳으로 골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항구에서는, 그 배를 정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심이 얕든지, 접안시설이 부족하든지.. 하거든요.

목회자가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 항구에 정박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에게로 가서, 그와 교제하면서, 평안과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치 벽난로 가에 앉은 것처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7. 목회자는 언제나 활기가 있어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때때로 피골이 상접한 수도사가
경건한 신자로 추앙 받기도 하는데요,
그가 얼마나 금식과 기도를 많이 했으면, 피골이 상접했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 스펄전은,
그가 금식기도를 많이 해서 야위었을 수도 있지만,
위장병이 나서, 바짝 야위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피골(뼈와 가죽)이 상접한(서로 달라붙은) 것을
은혜의 증거로 말하는 성경 구절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해골’을 경건의 증거로 제시하는 구절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로 ‘활기찬 것이, 경건의 표식이다’ 라고 봅니다.
사람을 만나서 교제하면, 송이꿀처럼 맛이 나는 사람,
만발한 꽃처럼 향기를 발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벌들이 모여들지,
바짝 야위고, 늘 ‘죽음을 바라봅시다’라고만 말하는 사람 주위에는,
벌떼들이 모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죽은 후를 바라보자는 말은 신앙적이지만, 늘 음울하게 그 말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8. 특히 젊은 목회자들에게, 제 스펄전이 부탁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있을 때, 대화를 혼자서 독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입니다.

항상 설교를 하거나, 가르치는 목회자는
사석에서도, 대화를 혼자서 독점하며,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 말 많은 사람이 득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저는 어떤 분과 한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그분은 제게 ‘당신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대화에서 큰 교훈을 받았다’고 말하고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사실은 제가 한 말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 스스로 이야기 하도록 하고, 잘 들어주었을 뿐입니다.

사람이 대화를 혼자서 다 하는 것은,
마치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자기 혼자 다 먹어치우는 것과 똑같은 잘못입니다.

그 자리가 설교석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이 함께, 대화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나중에, 그 목회자가 하는 설교에, 더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사석에서 목회자가, 혼자서 말을 다 해 버리면
설교 시간에도 ‘저 말장이!’ 라고서, 회중은 귀를 닫아 버릴 것입니다.

 

9. 목회자가, 사석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말을 많이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도 목회자의 역할은
<대화의 주제를 잘 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쓸데 없는 말, 또는 뒷담화를 하는 것을
그대로 다 듣고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째서 쓸데없이 시간과 기회를 허비하겠습니까.

목회자는 어디를 가든지, 존경 받는 위치에 있으므로,
대화의 키잡이 역할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키잡이가 어디로 키를 돌리는가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탄 배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 아니라,
위트와 재치로 대화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10. 우리 주님은, 꼭 강대상에서만 설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주님의 설교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대화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식탁에서나
-길을 가다가 만난 우물가에서
-해변에서나
-식사 초대를 받은 집에서,
-혹은 길을 지나던 중에 근처의 밭에서
그러니 우리 주님의 모든 대화는,
다름 아닌 설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의 대화가, 설교가 되기는커녕
얼마나 파괴적인 뒷담화, 또는 시간낭비가 되는 쓸모없는 대화일 때가 많습니까.

물론 언제나 설교같은 대화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점심 뭐 먹었니?’ 같은 일상의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대화’로만, 두 시간, 세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대화를 하는 것도,
신실한 설교 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을,
설교자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11. 그리고 설교를 신실하게 잘 하기 위해서도,
신실한 일상의 거룩한 대화가 꼭 필요합니다.

어떤 대화들은, 우리의 그나마 남은 영성도, 갉아먹어버리는 대화가 많거든요.
그래서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나서, 설교단에 오르면,
그날 설교는 들어보나마나 입니다. 죽 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설교하기 전에, 긴밀히 나누어야 하는 대화는,
필답을 한다고 합니다. 종이에 써서 물어보고, 종이에 써서 답하는 방식 말입니다.
종이에 쓰게 되니까, 말을 아주 간략히 줄이게 됩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쓸데없는 대화를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은, 우리 경건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목회자가 파티나 모임에 너무 자주 나가는 것도, 절제할 필요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경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절제해야 합니다.

위에서, 예수님은, 우물가, 잔칫집도 다니셨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내게 전도의 기회가 되고, 내 경건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다녀야 하지만,
그것이 내게 도리어 경건에 방해가 되는 모임이라면..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재에서 있어야 할 시간, 기도실에서 있어야 할 시간을,
그런 쓸데없는 모임으로 다 갉아먹는 일은, 스스로 절제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막에 가 보면, 죽은 낙타 주위로 독수리가 몰려듭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그 말씀이 나오지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고요!

여러분, 영혼이 죽어 있는 목회자, 성도들이 있는 곳으로, 모이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거기서 뜯어먹을 수 있는 것은 ‘죽은 사체’뿐입니다.

대신에 생명의 떡, 생명수가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모든 모임이 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모임에는, 죽은 고기를 얻는 것 말고, 또 뭘 더 할 수 있겠습니까.

 

12. 여러분, 이것은 예수회 사람들이 성공했던 방식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강단’으로만 공략하지 않고,
‘응접실’로 공략했다고 합니다.

즉 새로 이사 온 사람이나, 도시의 유력한 인사를 전도할 때,
교회로 초청해서 설교로 감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를 방문해서, 응접실에서 그들을 감화시킨 것입니다.

즉 일상적인 대화 가운데서
마치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그 사람의 영혼의 갈급함을 직시하면서,
그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했던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의 대화가, 그런 식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강단에서가 아니라,
응접실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사람들에게 뭔가 생명의 떡, 생명수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강박관념을 갖고서 억지로 하면, 오히려 역효과 납니다.
자기가 평소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평소에 기도와 경건의 삶을 자기가 먼저 살면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경건으로, 사람들을 감화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