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김요한

by dschoiword posted Aug 1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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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요한 새물결출판 대표

# 이 글은 제가 커피샵에서 잠간 짬을 내서 올리는 글이어서 성경구절을 직접 찾거나 전문적인 해석에 대한 문헌 인용을 못합니다. 즉 그냥 가볍게 읽으시라고 올리는 글입니다.

1.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2. 통상 복음을 가리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3. 약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
4 조금 더 깊이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대신하여/대표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여,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할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5. 어찌 보면, 이런 복음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바울적인 이해입니다.

6. 혹자는 이런 바울의 (개인주의적)복음 이해에 반발하여,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 곧 인간세계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간단히 줄여 표현하면,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하지만 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나라의 복음과 바울의 십자가의 복음이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출범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울의 복음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8. 이 글에서는 간단히 신약성경 4복음서를 중심으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9.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말은 사실 "정치적 용어"입니다. 현대의 고고학적, 사본학적 발견에 의하면, 복음이란 말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특히 로마세계에서) 새로운 황제가 출생하거나 등극했을 때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곧 세상을 다스릴/구원할 새로운 구세주(황제)가 나타났다는 것, 바로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10. 그런 면에서 신약성경 복음서는, 로마황제가 아닌 새로운 황제, 진정한 황제, 참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을 4복음서는 어떻게 풀어내고 있을까요?

11. 마태복음의 경우는 '복음'을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는 예수의 출생을 임마누엘 사건, 즉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시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예수께서 하늘로 떠나시면서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은 인클루지오 기법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을 복음으로 정의하고, 그런 관점에서 복음의 특성을 구체적인 내러티브 안에서 전개합니다.

12. 마가복음에서는 '복음'을 하나님의 소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제자도'의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예수께서 40일간 금식 한 후에 사단의 미혹을 이겨내시자 천사들이 예수님께 와서 수종을 들고, 예수님이 들짐승들과 함께 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2-3장의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본분, 시험, 실패를 연상케 합니다. 첫 아담은 시험에 실패하였으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는 시험에 승리하셔서, 첫 아담이 잃어버린 에덴에서의 지위와 특권과 축복을 회복하십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선악과의 시험과 싸움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마가복음에서는 십자가로 상징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온전한 순종과 승리를 통해 첫 아담의 실패를 근본적으로 역전시키시고 인류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으로 등극하십니다. 이 전체 과정을 제자도로 묘사하는 것이 바로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의 구성입니다.

13. 요한복음에서는 '복음'을 '성전과 잔치(영생)'으로 풀어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구약의 로고스, 모세, 야곱 등이 예표한 사명을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성전을 건설하는 자로 묘사합니다.

요한복음 1장 마지막 장면에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무화과 나무 아래서 너를 보았다'고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다나엘은 구약 다윗 시대의 나단 선지자를 연상케 하는 인물입니다. 무화과(감람나무 열매)란 표현은 구약에서 풍족함을 드러내는 상징적 단어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시대에서 이런 풍요의 시기는 오직 다윗-솔로몬 시대외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의 이면은, 지금 예수님께서 사무엘하 7장의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즉 다윗의 진정한 후손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자라는 의미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복음 2장에서 곧바로 예수님께서는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시고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역시 같은 장에서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옛 성전 종교(유대교)는 흥과 기쁨이 고갈된 종교이지만, 예수께서 세우실 새 성전의 종교는 가장 맛있는 포도주처럼 큰 기쁨이 부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따라서 복음이란 예수께서 세우시는 새 성전 안에 들어가 그곳에서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지극히 큰 기쁨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이것이 영생입니다).

14. 누가복음은 '복음'을 일종의 '희년'의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회당예배에 참석하여 이사야 61장을 인용하시면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하는,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전체적으로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성경입니다.

15. 사실 신약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통상 누가복음과 사동행전을 하나로 묶어서 접근을 합니다. 그래서 간단히 누가-행전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서 누가-행전이 하나의 책이란 뜻입니다.

앞에서 '복음'이 원래는 정치적 용어, 즉 새로운 왕이나 황제가 출생하거나 등극했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비단 '복음'이란 단어 뿐 아니라, '구세주', '주(님)', '그리스도'란 표현도 모두 로마 황제에게만 독점적, 배타적으로 사용되던 용어였습니다.

누가복음 2: 10에는 천사가 목동들에게 나타나서 예수의 출생고지를 하면서 이를 '기쁨의 소식'이라고 합니다. 즉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세주, 주,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곧 여기서 예수는 새로운 황제입니다.

누가는 이를 정교하게 묘사하기 위해 아예 누가복음 2;1에 예수가 로마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의 황제입니다. 그는 세상의 구세주이고, 주이며,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황제, 진정한 황제이신, 구세주, 주, 그리스도인 예수가 출생한 것입니다.

새로운 황제인 예수는 이제 기존의 로마 황제의 영역을 점령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행전의 맨 마지막에 가서는 아예 사도 바울이 로마황제 가이사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의 수도 한 복판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하나님께서 구세주, 주, 그리스도인 예수를 통해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복음을 가지고 침공해들어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이 바울을 통해서 로마 제국의 심장까지 전파되어 가는 과정- 즉 사도행전에 나오는 선교의 여정-은 사실상 하나님나라가 로마제국을 점령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15. 로마황제는 점령과 강압과 수탈과 살상으로 자신의 황제됨을 증명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 황제에 의해서 포로가 되거나,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가족을 잃어버리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의 황제 권력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황제이신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을 모든 억압과 눌림과 상함에서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무력이나 수단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가능케 할 것입니다.

16. 어쨌거나 최소한 누가-행전의 복음 이해를 놓고 볼 때, 기독교의 복음이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되고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해방의 복음이니까요.

17. 여기까지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초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글은 전문적인 토론을 위한 글은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가볍게 복음서 해석의 모티브 한 두 가지를 소개했지만, 사실 관점에 따라서 복음서를 관통하는 신학적 아젠다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니 그런 부분을 갖고 불필요하게 논쟁을 벌이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18. 다만 제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은 것은, 한국 개신교는 아직도 복음에 대한 이해가 매우 협소하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즉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대체로 바울의 십자가 사건에 기초한 복음 이해가 한국 개신교에서 이해하는 복음 이해의 전부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은 복음이란 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음', '오직 예수로만 의롭다 함을 받음'과 동치어로 사용합니다.

19.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도 보여드리려고 했듯이, 신약성경 더 나아가 성경 66권이 보여주는 복음에 대한 이해는 그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깊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바울의 신학을 더 깊이 공부하면, 바울도 결코 복음의 내용을 십자가 사건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의 본질 혹은 핵심이지,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20.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의 온전하고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개인이, 가정이, 교회가, 사회가, 국제 관계가, 생태계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정의, 평화, 화해, 기쁨, 감사,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으로의 초대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할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벗님들, 굿밤 되시고, 내일도 복음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