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목사 안수, 김세윤과 이광호 (찬성, 반대)

by dschoiword posted Apr 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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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목사 안수, 김세윤과 이광호


김세윤 교수가 성경편집성을 주창하고 나섰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 실린 이광호 목사의 글을 퍼온 것입니다. "여자목사 제도는 과연 성경적인가: 김세윤 교수의 '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에 삽입된 것'이란 주장을 우려하며"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이광호 목사는 "오직성경"의 원리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1.


지난해 말 합동 측 총회장의 총신대학 '기저귀 발언'(2003.11.12) 이후 교계가 시끄러웠다. 그는 경건회 도중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여성의 기저귀'를 들먹여 적절치 못한 표현을 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여자목사제도에 대한 견해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인 다수의 사람들은 '기저귀'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이 여성비하 문제로 확산됐다. 당시 당사자는 용어채택으로 인한 자신의 실언을 사과했지만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자목사 안수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이르렀다.


기저귀 발언 이후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는 지난 7월 5일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를 초빙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 교수는 나름대로 이유를 나열하며 여자목사제도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 ("'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 편집된 것!" <뉴스앤조이> 제90호, 2004.7.8, 참조).


그러나 나는 우선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무모한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경저자가 기록한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말할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유린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고 싶지 않다. 나아가 한 저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한국교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 보수주의 교단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 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는 점과, 시대에 편승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자세가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나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신앙을 가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 만일 직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2.


(1)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 교회의 직분은 필수요건이다. 즉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다. 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한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써, 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 즉 직분은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과 직책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 선교부장, 구제부장, 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 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에서 맡긴 일을 능률있게 하기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한다.


직분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므로 목사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가 있었는데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책이 아니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아론의 자손에서 세워졌다.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니면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제사장직과 목사직분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이 남성이어야 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경륜으로 말미암는 직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높은 자리'를 남성들만 갖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 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현재 논의하고 있는 직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른 문화를 본다. 교회는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긴 역사를 걸쳐 이어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것을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하는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토론은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깊게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지난해 말, 직분과 여성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총신대학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80% 정도의 학생들이 여자목사 제도를 찬성 혹은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집계했다(총신대보, 제 256호 2003년 10월 14일. 참조). 그 설문조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거나 그것이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총신대학생들이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른 신학대학이나 많은 기독교 여성 단체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오늘날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나 여성들의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 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구약성경을 보면, 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 룻, 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은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 또한 교회의 직분 개념과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그는 구약시대에 훌륭한 여 사사와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 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관련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개념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만일 여성과 관련된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시대 교회의 규범으로 이해한다면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해석상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 교회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에서 드러나듯이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3.


(1)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 24,25)고 이야기했다. (그 말씀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 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의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소위 교회 안에서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연관된 것이다. 여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24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직분을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인해 그 직분을 허락하지 않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여성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목사의 교사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의 직분을 갖고 있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에 들어와, 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며, 모든 직분은 남녀가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는 논리다. 나아가 그들은, 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권위와 연관된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다. 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 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 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의 직분을 맡도록 허락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교회 가운데 여자목사를 금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지켜야할 규범이며, 그것을 통해 배워야할 분명한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자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여자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다. 드보라, 기생 라합, 룻, 마리아, 엘리사벳, 한나, 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고 그런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 없이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 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나의 이런 말에 대해, 현실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 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4.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목사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모습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앞의 김세윤 교수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야 갑작스럽게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14:34,35의 삽입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번 주장도 한국의 여성단체에서 초빙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내용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라기는 교회 가운데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아니다. 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목사라는 직분으로 인해 더 나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목사가 된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 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또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이광호 목사


1.


지난해 말 합동 측 총회장의 총신대학 '기저귀 발언'(2003.11.12) 이후 교계가 시끄러웠다. 그는 경건회 도중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여성의 기저귀'를 들먹여 적절치 못한 표현을 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여자목사제도에 대한 견해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인 다수의 사람들은 '기저귀'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이 여성비하 문제로 확산됐다. 당시 당사자는 용어채택으로 인한 자신의 실언을 사과했지만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자목사 안수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이르렀다.


기저귀 발언 이후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는 지난 7월 5일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를 초빙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 교수는 나름대로 이유를 나열하며 여자목사제도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 편집된 것!" <뉴스앤조이> 제90호, 2004.7.8, 참조).


그러나 나는 우선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무모한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경저자가 기록한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말할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유린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고 싶지 않다. 나아가 한 저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한국교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 보수주의 교단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 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는 점과, 시대에 편승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자세가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나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신앙을 가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 만일 직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2.


(1)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 교회의 직분은 필수요건이다. 즉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다. 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한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써, 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 즉 직분은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과 직책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 선교부장, 구제부장, 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 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에서 맡긴 일을 능률있게 하기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한다.


직분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므로 목사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가 있었는데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책이 아니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아론의 자손에서 세워졌다.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니면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제사장직과 목사직분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이 남성이어야 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경륜으로 말미암는 직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높은 자리'를 남성들만 갖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 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현재 논의하고 있는 직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른 문화를 본다. 교회는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긴 역사를 걸쳐 이어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것을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하는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토론은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깊게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지난해 말, 직분과 여성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총신대학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80% 정도의 학생들이 여자목사 제도를 찬성 혹은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집계했다(총신대보, 제 256호 2003년 10월 14일. 참조). 그 설문조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거나 그것이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총신대학생들이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른 신학대학이나 많은 기독교 여성 단체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오늘날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나 여성들의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 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구약성경을 보면, 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 룻, 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은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 또한 교회의 직분 개념과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그는 구약시대에 훌륭한 여 사사와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 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관련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개념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만일 여성과 관련된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시대 교회의 규범으로 이해한다면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해석상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 교회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에서 드러나듯이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3.


(1)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 24,25)고 이야기했다. (그 말씀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 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의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소위 교회 안에서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연관된 것이다. 여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24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직분을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인해 그 직분을 허락하지 않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여성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목사의 교사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의 직분을 갖고 있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에 들어와, 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며, 모든 직분은 남녀가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는 논리다. 나아가 그들은, 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권위와 연관된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다. 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 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 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의 직분을 맡도록 허락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교회 가운데 여자목사를 금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지켜야할 규범이며, 그것을 통해 배워야할 분명한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자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여자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다. 드보라, 기생 라합, 룻, 마리아, 엘리사벳, 한나, 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고 그런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 없이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 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나의 이런 말에 대해, 현실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 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4.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목사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모습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앞의 김세윤 교수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야 갑작스럽게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14:34,35의 삽입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번 주장도 한국의 여성단체에서 초빙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내용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라기는 교회 가운데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아니다. 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목사라는 직분으로 인해 더 나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목사가 된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 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또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