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회와 신앙고백서/ 피영민

by dschoiword posted Mar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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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회와 신앙고백서/ 피영민 목사
                                                                   

I. 서론


침례교 신학 과정을 어느 정도 수학한 사람이라면 “침례교는 오직 성경 뿐이요 침례교를 구속하는 어떤 신조도 없고 신학도 없다”는 유의 암시를 수없이 받아 왔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침례교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들은 침례교가 역사적으로 피흘리며 확립해 온 많은 원리들, 예를 들면 종교의 자유 원리, 양심의 자유 원리, 신자의 침수례의 원리, 개교회의 자치의 원리들이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수많은 신앙고백서에 선언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침례교는 지난 400여년의 가시적인 역사속에서 수많은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고, 그 고백서들을 통하여 침례교가 주장하고 간직해 온 원리들을 만천하에 공공연하게 선포하였다. 신조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침례교인들의 역사속에서 이렇게 많은 신앙고백서들을 발견하게 되는 역사학도의 마음속에는 이런 의문이 일어나게 된다. 신조(Creed)는 무엇이며 신앙고백서(Confession)는 무엇인가?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과연 다른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상당한 개념상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신조가 국가교회(state church)에 의해서 비국교도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면, 신앙고백서는 자유 교회(free church)가 자신들의 신앙과 원리를 변증하기 위해서 작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조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야 한다는 강요성을 지니고 있다면 신앙고백서는 특정시대의 특수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스스로 선포한 자발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조가 언어의 획일성을 띠고 있다면 신앙고백서는 고백하는 집단에 따라서 언어가 다른 다양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조가 그 언어 형태를 수정할 수 없는 불가변성을 지니고 있다면 신앙고백서는 수시로 수정하고 증보할 수 있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개념 구별을 전제로 할 때 침례교는 신조를 싫어했으나 신앙고백서는 좋아했다는 명제가 타당성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 구별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엄격한 차이성이 점차 상실되는 현상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어느 국가도 국가가 지정한 신조를 따르지 않는 비국교도들을 마구잡이로 탄압하는 국가는 기독교권에는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깜짝 놀라게 된 사실은 오늘날 한국의 침례교회에서 사도신조를 예배 시에 고백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고 하는 현실이다. 이 사실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논쟁을 차치하고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침례교회 안에서도 신조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신조에 대한 반감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침례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침례교회가 역사상 지속적으로 산출한 신앙고백서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Samford 대학교의 Beeson신학대학 학장인 티모디 조지박사(Dr. Timothy Georg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최근에 이르러 이런 고전적 텍스트들이 많은 침례교도들에 의해서 잊혀질 뿐 아니라, 버려지고 있다. 이런 중요한 일차 자료들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너무나 많은 침례교도들을 괴롭히고 있는 신학적 건망증과 영적 근시성의 한 원인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II. 신앙고백서의 목적과 중요성 


Southwestern 침례신학대학원의 역사신학 교수인 맥베스박사(Dr. H. Leon MeBeth)는 침례교도들이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목적은 네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는, 침례교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였다. 초대교회인들이 식인종이라든지, 방화범이나 근친상간자등으로 오해받았듯이, 침례교도들도 나체로 침례를 주다가 임신한 여자가 많다는 등의 악성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므로 이런 거짓된 오해를 불식하고, 침례교의 신앙이 교회론적인 면을 제외하고는 다른 복음주의적 교단과 차이가 없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맥베스교수는 침례교의 신앙고백서는 침례교의 독특성을 선포하는 목적보다는 침례교와 다른 정통적인 교단과 기본적인 신앙에 차이가 없음을 선언하는 목적이 더 큰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는, 침례교회의 교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시키기 위해서였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제자훈련의 기본 골격으로서 침례교회와 무관한 단체들에 의해 생산된 자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침례교회 자체가 선언한 신앙고백서를 자료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는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형성하는 기능도 수행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지방회나 총회에서 교제의 근거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개교회는 지방회나 총회가 사용하고 있는 신앙고백서를 검토한 후에 그 지방회나 총회에 가입할지 여부를 결정하였다.


넷째로, 이단논쟁시나 권징해야 할 사유가 발생하였을 때에 판단의 근거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런 교리적 판단 기준도 없이는 아무도 이단으로 정죄할 수 없고, 또 아무도 권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교도들은 이런 논쟁이 발생하였을 때 논쟁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신앙고백서에 호소하곤 하였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신앙고백서가 너무 많은 권한을 지니게 되어 성경 자체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경계하였고, 신앙고백의 내용에는 반드시 성서의 구절이 동반되도록 하였으며 제시된 성서의 구절이 부적합하다는 판단이 내려질 때는 언제나 수정하는 자세를 유지해 왔다. 

그러므로 침례교회가 성경만 있을 뿐 어떤 교리적 표준을 제시하는 신앙고백서조차도 없다는 주장은 침례교회의 역사적 유산을 면밀히 살펴볼 때 전혀 타당성 없는 허구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초에 침례교 선교부흥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앤드류 훌러(Andrew Fuller)는 신앙고백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어떤 부류의 저자들 가운데 신조나 신앙의 체계성에 대한 반감을 선포하면서,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권리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받은 일관성 있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계시에 관하여 중요한 원리를 포함한다고 믿어지는 신조나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는 영혼의 자유론에 관해서는 참피온이라고 불리우는 멀린스박사(Dr. E. Y. Mullins) 조차도 기독교 교리를 요약한 문헌을 1923년에 남침례교 총회에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위와 같은 진리와 사실들을 준수하는 것이야말로 선생들이 침례교가 설립한 학교들에서 가르칠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침례교가 낳은 최대의 설교자 찰스 스펄젼(Charles H. Spurgeon) 목사는 아무런 신앙고백서도 없고, 교리적 표준도 없는 교단은 해변 없는 바닷가와 같다고 하였다. 언제 파고가 넘쳐 들어 평화로운 마을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의미였다. 

III. 영국 일반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


 16세기와 17세기는 신앙고백서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루터교는 1530년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내놓았고, 영국 국교회도 1563년에 39개 조항을 선포하였다. 또한 영국과 스콧트랜드의 장로교회도 1646년에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산출하였다. 


가시적인 역사가 1611년에 시작된 침례교회도 이런 시대적 추이를 따라서 많은 신앙고백서를 작성, 선포하였는데, 신학적 차이에 따라서 크게 두 부류의 신앙고백서가 산출되었다. 17세기초에는 화란에서 큰 신학논쟁이 일어났는데 화란개혁교가 신봉하는 칼빈주의신학(Calvinism)에 대항하여 아르미니어스와 그 후계자들인 항론파(Remonstrants)들이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신학을 제시하였다. 1618년의 도르트 종교회의는 이 문제를 크게 다루어 칼빈주의신학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 와중에서 발흥하게 된 침례교인들 가운데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일반침례교회(General Baptists)라 하였고, 칼빈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특수침례교회(Particular Baptists)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온세상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속죄했다는 일반속죄설을 믿으면 일반침례교회이고, 성부가 택하신 자들을 특별히 속죄했다는 제한속죄설을 믿으면 특수침례교회가 되었다. 침례교회는 그 역사의 시발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두 신학의 줄기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일반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를 처음 발표된 것은 존 스마이스(John Smyth)가 작성한 “20개조항의 짧은 고백서”(1609)였다. 1609년에 스스로 관수례를 베풂으로써 “스스로 침례준 요한”(John the Se-Baptist)이라고 불리웠던 스마이스는 이 고백서에서 원죄도 부인하고, 유아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고 했으며, 종교개혁의 이신득의 교리조차 부정함으로써 심지어는 그의 옛친구에게 조차 “잘 변하는 카멜레온,” “그 행로가 달처럼 자주 변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후에는 스스로 받은 침례도 부인하고 화란 멘노파에 가입하려다가 동료에게 파문당하는 수치도 겪은 인물이 되었다.

 

스마이스를 파문하고 영국 땅으로 돌아와 런던 근처 스핏탈필드(Spitalfields)에 첫 침례교회를 세운(1611년)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와 소수의 무리는 “화란 암스테르담에 남아 있는 영국 사람들의 신앙 선언문”(1611) 27개조항을 선포하였다. 그 목적은 이 무리들의 신앙이 화란 멘노파의 신앙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에서 벗어나 일반속죄설을 고백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원죄를 부인하거나 알미니안주의의 자유의지론을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노예의지론을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의지는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고백서는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알미니안주의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고백으로 볼 수 있다. 헬위스와 그 일행은 교회의 계승이라는 사상을 거부하며, 맹세, 무기 사용 및 정부에 관료로 참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멘노파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이 멘노파를 신앙적 조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며, 멘노파와는 다른 독립적 사상을 가진 집단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마이스가 멘노파에 가입도 못한 채 1612년 결핵으로 사망하자 화란에 남아 있는 스마이스의 추종자들은 “진정한 기독교에 관한 명제와 결론들”(1612-14)을 100여개 조항으로 작성하였다. 이 고백서는 스마이스처럼 원죄를 부인하고, 유아의 무죄성을 주장했으며, 아담의 타락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친 것이 아니라는 신앙을 거듭 제시하였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해서도 멘노파와 유사함을 선언하여 결국 이 무리들은 1615년에 이 신앙고백을 근거로 멘노파에 가담하였다. 이후로 이들은 침례교회와는 전혀 별개의 노선을 걷게 되었다.


 1640년대에 이미 50개 이상의 교회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한 일반침례교회는 지방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침례교회는 주로 미드랜드(Midlands)지방에 많이 분포되었다. 미드랜드에 산재한 일반침례교회는 1651년에 30개교회들이 지방회로 모이면서 “30개 회중의 신앙과 행습”(1651)이라는 75개 조항의 고백서를 발표하였다. 이 고백서는 한 개교회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교회가 연합하여 선언한 고백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이 고백서는 그리스도의 일반속죄(17조)를 선언하면서도 자유의지론을 부인(25조)하는 신학적인 중도 노선이 드러나 있다. 전 인류는 아담이 받은 형벌에 자칫하면 동참하기 쉬운 존재(16조)라는 표현으로써 원죄를 직설적으로 부인한 이전의 고백서보다는 조금은 원죄설로 기운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칼빈주의가 아니면서도 일관성 있는 알미니안주의도 아닌 애매한 신학 경향을 지닌 것이 그 특징이다.


일반침례교회에서 선포된 신앙고백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1660년에 나온 “표준 고백서”와 1678년에 나온 “정통신조”이다. 침례교회가 크롬웰이 통치하던 공화정 기간에 크게 성장하자, 침례교회를 뮌스터폭동을 일으켰던 재침례교파와 동일시하여 침례교는 정부를 부인하고 공안을 해치는 무리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1660년의 “표준 고백서”는 일반침례교의 총회에서 이런 비난에 대항하여 침례교는 순수한 신앙과 행습을 가진 사람들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고 침례교를 재침례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선언하였다. “표준 고백서”는 히브리서 6:1-2에 나오는 회개, 믿음, 침례, 안수, 부활, 심판의 여섯 가지 교리를 중심으로 기본 교리를 제시하였고, 특히 새신자는 침례 받고 주의 만찬에 처음 참여하기 전에 성령의 약속을 받기 위해 손을 얹고 기도하는 안수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12조). 


이런 행습은 구교의 견진성사와 유사한 것이었다. 물론 총회가 여섯 가지 교리만을 유일하게 권위있는 교리를 제시한 것은 아니었으나, 여섯 가지 교리만을 고집하는 무리들은 1690년에 “6원리 침례교회”라는 별도의 총회를 구성하여 분리되었다. “표준고백서”는 종말론을 가장 철저히 다루는 고백서라는 특징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명백히 선언하지 않음으로써 17세기말과 18세기초에 이르러 일반침례교회가 기독론의 오류로 인해 이단화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런 문제점으로 말미암아 1678년의 “전통신조”는 그리스도의 양성교리를 명백하게 선언하였으나, 일반침례교회의 총회는 “표준 고백서”에 더 집착하였다. “정통신조”는 일반속죄설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칼빈주의 신학에 근접해 있었으나, 미드랜드 지방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일반침례교회가 17세기말부터 기독론의 문제로 교단적인 이단성을 띠게 되자 크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1748년부터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웨슬리의 부흥으로 회심한 사람들 가운데 침례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지도자였던 댄 테일러(Dan Taylor)는 1770년에 복음적인 일반침례교도들을 런던에 모아서 “새일반침례교회”(New Connection)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6개조로 된 “신앙조례”를 채택하여 서명하였다. 6개조는 인간의 타락성, 도덕법의 영원성, 그리스도의 양성교리,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성령에 의한 중생과 신자의 침수례 원리들이다. 

IV. 영국 특수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


1638년에 런던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칼빈주의 침례교회는 1644년에 런던에 일곱개 교회가 형성되자 첫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제1차 런던고백서”였다. 이들은 “자유의지를 믿으며, 구원의 영원성을 부인하고, 원죄를 부인하며, 행정 관료를 거부하고, 침례를 나체로 베푼다”는 거짓된 소문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 고백서를 제시하였다. 강력한 칼빈주의 은혜의 교리를 선언하면서도 전도해야 할 인간의 책임을 아울러 강조함으로써 복음전도적인 칼빈주의(evangelical calvinism)를 특수침례교회의 표식으로 만들었다. 양심의 자유와 신자의 침수례원리를 포함함으로써 장로교와 차이가 있음을 보였고, 행정 관료의 합법성을 강조함으로써 재침례교와 차이가 있음을 선언하였다. 


1677년에는 “제2차 런던고백서”가 작성되었는데, 이 시기는 찰스1세가 왕정복고(1660년)한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다시 확립하고 비국교도들을 대거 핍박하였다. 그러므로 비국교도들끼리는 차이점보다는 동질성을 강조하려는 분위기가 지배하였다. 따라서 특수침례교회도 영국과 스콧트랜드의 장로교도들이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고백서”(1646)를 기본으로 하고 교회론 부분만을 침례교 입장에 맞도록 수정하여 발표한 것이 “제2차 런던고백서”였다. 11년 뒤인 1689년에는 100개의 특수침례교 대표들이 런던에 모여 “제2차 런던고백서”에 서문을 일부 첨가하여 다시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1677년 고백서와 1689년 고백서의 내용은 32개조로 구성된 동일한 것이며, 신자의 침수례 원리를 제외하고는 장로교의 신앙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1813년부터 영국의 특수침례교회는 “침례교 연맹”을 구성하여 새일반침례교회와 합병을 시도하였고 결국 1891년에는 “영국침례교연맹”(British Baptist Union)을 결성하여 완전히 두 줄기는 합병되었다. 그러나 신학이 다른 두 집단이 하나가 되자 공통분모로서의 신앙고백의 내용은 현저하게 축소되었다. 연맹의 “원리선언”은 단지 세 개항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과 행습에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과, 침례의 양식은 침수례라는 점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복음증거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 이후로 영국 침례교는 신앙고백서가 교회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든 집단이 되었다.

V. 미국 침례교의 신앙고백서


 미국 침례교회에서 처음 발간된 신앙고백서는 1742년에 필라델피아 지방회에 의해서 채택된 “필라델피아 고백서”였다. 이것은 영국의 “제2차 런던고백서”에 두 개 항목만 첨가한 것으로서 하나는 회중찬송을 합법적인 예배 행습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일반침례교회가 실시하던 “안수” 행습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 침례교회에서 “안수”는 사라졌지만, 회중찬송은 더욱 발전되었다. “필라델피아 고백서”는 제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아이작 와츠와 웨슬리형제들이 작시한 찬송들이 예배시에 많이 불리워지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서 시대적인 주제를 포함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영국침례교회는 17세기 내내 회중찬송을 남녀가 어울려 같은 내용을 기도하는 육적인 관습이라 하여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751년에 미국 남부에서 최초로 형성된 지방회인 남부 캐롤라이나의 찰스톤 지방회(Charleston Association)도 “필라델피아 고백서”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필라델피아 고백서”는 명실상부하게 남부와 북부의 공통의 고백서가 되었다.  1845년에 아틀란타주 오거스타(Augusta)에서 남침례교 총회(SBC)를 구성하기 위해 모인 293명의 대표들은 모두 “필라델피아 고백서”를 사용하는 침례교회에서 파송된 사람들이었다. 1859년에 Southern침례신학대학원을 창립한 보이스박사(James P. Boyce)는 신학교의 기본 교리 표준으로서 “원리요약”을 작성할 때 “필라델피아 고백서”를 근거로 하였다. 


한편 1833년에 뉴햄프셔주의 침례교 총회는 “뉴햄프셔 고백서”라고 일반적으로 불리우는 신앙선언문을 작성하여 19세기와 20세기 침례교 신앙고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뉴햄프셔 고백서”는 교회론에 있어서 우주적 교회에 대한 언급을 배제함으로써 지역교회만을 강조하던 지계석주의자(Landmarkists)들의 강력한 호응을 얻어서 19세기 후반에 남침례교회들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뉴햄프셔 고백서”는 기본적으로 “필라델피아 고백서”처럼 칼빈주의적인 경향을 따르고 있지만 은혜의 교리를 좀더 간단하고, 덜 구체적으로 취급함으로써 신학적으로 칼빈주의를 완화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뉴햄프셔 지방에는 “자유의지 침례교”가 벤자민 랜달(Benjamin Randall)의 지도 아래 1780년부터 시작되어 확산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의지 침례교의 발흥에 반응하여 칼빈주의가 인간을 로보트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방해하는 기계적인 시스템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1925년에 남침례교회는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를 교단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였는데 이것은 “뉴햄프셔 고백서”를 근거로 작성된 것이었다. 20세기초에 근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자 남침례교는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북침례교는 어떤 신앙고백서도 채택하기를 거부하였다. 북침례교는 1911년에 자유의지 침례교와 합병한 이후 영국침례교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공통분모를 선언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자유주의신학을 좀 더 쉽사리 받아들이게 되었다. 


 1963년에는 허셸 홉스(Herschel H. Hobbs)의 지도 아래 작성된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의 개정판이 채택됨으로써 현재까지 남침례교의 기본신앙고백서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고백서는 창세기를 신화로 해석하려는 입장에 대항하여 성서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1925년 고백서보다도 포괄적인 교회론을 제시하여 6조에서는 우주적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포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무오론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자 1994년의 남침례교 총회는 “성서무오에 대한 시카고 선언문”(1978)과 “성서해석에 대한 시카고 선언문”(1982)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VI. 결론


침례교회는 신앙의 공통점을 찾아내 끊임없이 고백하였으나 신앙고백서를 최종적으로 무오한 것으로 간주한 적은 없었다. 성서 위에 신앙고백서를 올려놓은 적도 없으며 신앙과 행습의 최종 권위는 언제나 성서에 두었다. 신앙고백서의 내용에 소극적으로 사로잡혀 더 넓은 진리를 탐구하는 자유를 방해한 적도 없었다. 크던 작던 침례교의 집단들은 자유스럽게 자신들의 신앙과 신학을 고백서로 표현하였다. 논쟁을 일으키고 분열을 야기하기 위하여 고백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논쟁이 일어나고 분열이 야기될 위기에 고백서를 작성함으로써 진리를 수호하는 단결력을 보였다. 신학에 관계없이 조직적 통합을 이룬 영국과 미국의 침례교회는 공통분모로서의 신앙고백이 축소되는 현상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교단적 신앙 고백서보다는 목회자 개인의 신앙고백서가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신학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신학을 고백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야 한다. 고백으로 표현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