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가 설명한 “칼빈과 머리카락 하나 차이”

by dschoiword posted Dec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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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가 설명한 “칼빈과 머리카락 하나 차이”

 

장기영, 페이스북에 실은 글

 

웨슬리는 1765년 5월 14일에 칼빈주의자 존 뉴턴(John Newton)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구원론, 특히 칭의 이해는 “칼빈과 머리카락 하나 차이”밖에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 비록 웨슬리 학자들은 그가 말한 머리카락 한 가닥이 “기대한 것만큼 가늘지 않았음”을 지적하지만, 그럼에도 두 신학 사이에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구원의 원천임을 강조하는 본질적 동질성이 있다. 이점은 설교집, 일지, 서간, 논쟁적 신학 논문, 메소디스트 연회록 등 웨슬리의 직간접적 저술 전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웨슬리가 표준설교집의 첫 번째 설교로 수록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Salvation by Faith, 1738)은 올더스게이트 체험 직후인 1738년 6월 11일에 행한 옥스포드 대학 채플 설교(교수들이 정기적으로 돌아가면서 하는 설교)로, 그가 모라비아 교도들로부터 전수받은 루터 신학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있다. 웨슬리는 에베소서 2: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모든 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부요하심, 우리는 전혀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그가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한다. 웨슬리는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서 나타나는 어떤 선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결과이기에 “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설교 전체에서 웨슬리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신칭의, 성화 등 개신교 신학의 핵심 내용을 설명한 후, 루터를 통해 이러한 진리를 다시 회복시키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설교를 마무리한다. 웨슬리는 칭의에 초점을 둔 설교 “믿음에 의한 칭의”(1746)에서도 루터, 칼빈과 유사하게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드린 화목제물을 통해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사해 주시는”(롬 3:25) 은혜임을 강조하면서, 성화가 칭의의 조건이라는 로마 카톨릭의 주장을 부정하고, 칭의의 열매가 성화임을 분명히 했다. “메소디스트의 원리”(The principles of a Methodist, 1740)라는 논문에서는, 칭의에 필요한 세 요소를 “하나님 편에서는 그의 크신 자비와 은혜, 그리스도 편에서는 그가 몸을 바치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가능케 된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 우리 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으로 가르치면서,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의, 곧 우리 행위의 의를 제거한다”라고 설명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강조한다. 우리가 2장에서 이미 살펴본 웨슬리의 언약 신학 역시 인간의 타락 이후 행위 언약의 폐기와 은혜 언약의 수립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으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원천임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의 구원을 가르칠 때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가까울 정도로 불가항력적 은혜가 존재함을 강조했다. 구원의 예비 과정인 선행은총은 불가항력적 은혜이다. 웨슬리는 인간의 전적 타락 및 원죄 교리를 통해 인간의 자력 구원이 불가능함을 가르쳤는데, 그렇다면 “구원의 길 중 적어도 어느 한 지점에서는 불가항력적 은총이” 외부로부터 임해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의 상태에서 인간을 끌어올려야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원하기도 전에”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인격적인 반응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끌어올린 것이 선행은총이라고 가르쳤다. 웨슬리는 구원을 위한 예비적 은총인 선행은총 외에, 죄를 깨닫게 하는 은혜, 칭의와 중생, 성결, 영화 등 구원 과정의 결정적 사건들 역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가르쳤다.

 

"불가항력적 은혜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믿음을 주시며 그 믿음을 통해 우리 영혼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이 주어지는 순간에는 불가항력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깨닫게 하신 순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또 다른 여러 순간에 자신의 영혼에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하심을 발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들 전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항받을 수 있고, 실제로도 저항받아 왔다고 믿습니다."

 

웨슬리는 “신중하게 숙고한 예정”(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 1752)에서 칼빈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약 여러분이 '우리는 구원에 대해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립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우리도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활동 없이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일을 하신다고 주장합니다'라고 덧붙인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도 이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칭의를 주시고, 성결하게 하시며, 영화를 주시는 것, 즉 구원 전체를 포괄하는 이 세 가지 은혜가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사역임을 인정합니다."

 

"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향유하는 많은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에 지존자의 능력이 강력하게 자신들에게 역사해, 주님의 음성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며’(왕상 19:11)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이 강력히 쏟아부어진 때를 기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때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전혀 저항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급류를 저지하려는 것은 손으로 바다의 파도를 막거나 태양을 중천에 멈춰세우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웨슬리는 심지어 무조건적 예정도 부분적으로 인정했는데, 이는 그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게 쓴 1743년 8월 24일자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바울을 복음 전도자로 택정하신 것같이, 어떤 사람이 특정한 일을 하도록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음을 믿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어떤 나라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누리도록, 어떤 나라는 복음을 듣도록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음을 믿습니다 … 어떤 개인은 특별한 세상적, 영적 유익을 얻도록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음을 믿습니다. 또 나는 (그것이 옳음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영원한 영광을 누리도록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영광으로 예정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멸망한다거나, 누구도 영원한 저주를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습니다."

 

데일 요컴(Dale M. Yocum)은 웨슬리의 여러 글들을 종합해 그가 인정한 무조건적 예정의 여러 형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에베소서 1장 3-12에서 아홉 번이나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성경적 예정론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 본질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 성자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택하신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구원 사역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구원 계획을 이루어갈 집단을 예정하셨다. 이 선택은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선택”이다(창 25:23, 사 45:4). 따라서 선택 받은 국가나 집단 안에 있더라도 구원은 믿음에 의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눅 3:8, 갈 3:7-9, 롬 2:28-29). (3) 하나님은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개인을 선택하신다. 구원의 준비를 위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개인(느 9:7, 롬9:7-14), 역사를 이끄시기 위해 모세나 다윗, 고레스 같은 특별한 지도자(시106:23, 시 78:70, 사 45:1), 구원계획을 실현할 베드로, 바울과 같은 특별한 사도를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롬 1:1, 갈2:8). 넷째, 확장된 하나님의 백성의 공통체 교회를 선택하셨다(엡 2:11-13, 롬11: 20). 이와 같이 비록 예정의 범위와 내용을 설명함에 있어 루터, 칼빈과 차이를 보이더라도, 웨슬리 역시 예정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중요한 일면으로 가르친 것은 분명하다.

 

흔히 많은 칼빈주의자들이 웨슬리를 비난해온 내용은,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구원의 원천으로 가르친 데 비해, 웨슬리는 인간의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근거없는 것이다. 웨슬리가 언급한 종교개혁 신학자들과의 “머리카락 하나 차이”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머리카락 하나 차이”란 어떤 차이를 의미하는가?

 

웨슬리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 1739)에서 그 해답을 잘 보여준다. 이 설교는 메소디스트 부흥운동이 급격히 확장되던 시기, 웨슬리가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 특히 조지 휫필드(GeorgeWhitefield)와 예정론 논쟁으로 갈등을 빚던 중에 출판한 설교이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로마서 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 대가없이 사랑하심”으로 설명하면서, 그 은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롬 5:8) ‘경건하지 않은’(롬 5:6) ‘우리 모두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 및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심’(롬 8:32)으로 나타났기에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의 모든 것”임을 강조한다.

 

종교개혁 신학과의 차이는 “값없다”는 표현이 한 가지 의미로 쓰이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웨슬리는 “값없는”(Free)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두 가지로 분리해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 안에서 값없을”(free in all)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값없다”(free for all)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한다. 이 중 후자인 “모든 사람을 위해 값없다”는 의미의 “free for all”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흘리셨으나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속죄론 주장으로, 칼빈주의자의 주장, 즉 예수님은 예정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해 피 흘리셨다는 제한 속죄론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웨슬리가 말한 “칼빈과 머리 카락 하나 차이”는 인간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인지, 예정 받은 사람만을 위해서인지의 차이인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의 근거없는 비난과 달리,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 안에서 값없다”(free in all)는 주장에 있어서는 루터,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깊은 동질성을 지닌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집니다. 전체로든 부분으로든, 또 어느 정도로든 은혜는 사람 속에 있는 여하한 능력과 공로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의 선행이나 의로움, 그가 이룩한 것이나 그의 사람됨 … 노력 여하 … 좋은 성품이나 선한 바람, 선한 목적과 의도에도 달려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은혜의 원천이 아닙니다. 은혜의 열매이지 뿌리가 아니며,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사람 속에 무슨 선한 것이 있거나 선을 행한 것이 있다면 그렇게 만들고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는 모든 사람 안에게 값이 없는 것, 즉 사람의 어떤 능력이나 공로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값없이 내어주시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만 달려있습니다."

 

매우 중요하기에 다시 한번 반복하자면, 웨슬리 신학이 루터,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갖는 분명한 차이는, 은혜가 “모든 사람 안에서 값없다”(free in all)는 주장에서가 아니라 웨슬리의 은총론의 또다른 핵심 개념인 은혜가 “모든 사람을 위해 값없다”(free for all)는 주장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free in all” 주장에서 종교개혁적 “오직 은혜” 전통을 온전히 계승하고 있음에도, 보편 속죄론을 가르치는 “free for all” 주장에서 종교개혁 신학과 다르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확대한 나머지, “free in all” 주장에서 깊은 동질성을 가진 사실조차 부인한다면, 이는 웨슬리에 관한 깊은 무지나 의도적인 악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케네스 콜린스는 제자이자 동료인 크리스틴 존슨(Christine Johnson) 박사와 함께 쓴 최근의 공저 논문에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협력적 은혜”라는 은혜의 두 가지 요소 중 전자인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웨슬리 신학의 근본적 토대로서, 웨슬리는 이 은혜를 더 자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이 성숙할수록 이 은혜를 더 크게 강조했음을 밝힌다. 콜린스와 존슨은 “웨슬리 신학 전체를 신인협력적 은총 개념 아래 종속시키는 오류”의 원인은 많은 사람이 “웨슬리 신학에서 ‘오직 믿음으로’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음,’ 그리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 사이의 연관성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정확히 지적한다. 콜린스와 존슨이 지적한 오직 믿음과 갑없이 주시는 은혜, 그리고 값없이 얻는 구원 사이의 연결은 웨슬리의 가르침에서 정확히 발견되는데, 웨슬리는 구원이 오직 믿음을 통해 순간적으로 주어질 뿐 아니라 믿음 역시 은총에 의해 순간적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침으로써 구원의 믿음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강조했다.
 

 

출처: 장기영 저, 개신교 신학의 양대 흐름: 루터 신학 vs. 웨슬리 신학 (부천: 웨슬리 르네상스, 2018) (올해 안으로 출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