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전경
특별계시, 지금도 존재하는가?
김응열
주후 2세기경의 몬타누스주의 운동은 기독교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신령주의 기독교였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예언을 외치며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종말의 날을 강조했다. 일련의 광신적 은사주의, 성령주의 무리였다. 몬타누스는 자신의 예언이 새로운 것이며, 새 예언은 성령시대의 새로운 시작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성령의 입이라고 말을 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두 여자, 프리스킬라와 마키밀라도 예언을 말하며 황홀경과 입신상태에서 예언을 했다. 서서히 기독교 표준에서 이탈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예언을 더 앞세우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자주 볼 수 있다. ‘신사도운동’과 같은 은사주의자들은 직통계시와 예언의 은사를 앞세운다. 과연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지금도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 이러한 운동은 ‘오직 성경’이라는 전통을 흔들고,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직통계시란 성령님이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직접적인 계시를 개인에게 주셔서 성도들을 지도하고 있음을 뜻한다. 성경에 준하는 직접적인 계시가 지금도 존재하며, 오늘날의 '선지자'들은 그것을 받아 예언을 한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의 충족성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다가오는 예언에 치중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객관적인 은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닐까?
직통계시는 아직도 존재하는가? 개혁신학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계시는 종결되었고, 다른 계시가 필요하지 않는다고 본다. 성경은 이미 충족하다는 것을 말해줌으로써 직통계시와 같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위치에 올린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성령님께서는 영감을 주셔서 성경을 다시 쓰게 하지 않는다. 기록된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해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계시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조명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계시의 종결
히브리서는 특별 계시가 완성되었으므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하나님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신현과 환상과 꿈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부분에 대해 계시를 하셨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이란 표현을 하시면서 이제는 아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신명기 18장 15절은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릴 것과 또 그 선지자의 말을 들을 것을 명령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 18:15). 그런데 사도행전은 이 선지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20). ‘나와 같은 선지자’ 즉 모든 것을 확실히 알려줄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 보다 뛰어나신 선지자로서 계시에 관한 모든 것을 이루셨고, 부분적인 것이 아닌 완전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천사보다 월등하시고(히 1:4) 모세보다 우월한(히 3:1-6)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가 계시하신 것은 부족한 것이 없으므로 더 이상 다른 계시가 덧붙여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밝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계시의 정점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완성된 계시가 성경에 최종적 형태로 기록됨으로써 성경이 이전의 모든 계시 방법들을 대체하며, 특별계시를 담은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는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계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은 하나님의 계시에 무엇을 가감하는 것을 경고한다. 이 말씀도 특별 계시가 종결되었음을 시사한다. 요한에게 계시된 “예언의 말씀”들에 대해 누군가가 예언의 내용을 추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록한 계시록에 있는 모든 재앙을 그 사람에게 더할 것이고, 반대로, 기록된 “예언의 말씀”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제거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천국백성에서 제하여 버리실 것이라고 하는, 엄청난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다. 더 이상 특별 계시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근거삼아 계시의 종결성을 요한계시록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예언의 말씀은 신약성경 혹은 성경 전체의 조망 아래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한 권으로 볼 때, 계시록이 마지막에 위치하며,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언의 말씀”을 신구약 성경 전체로 적용하는 것은 “후속하는 성경은 선행하는 성경들을 전제하고 거기에 연계하여 그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의 경고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언의 말씀이 더 이상 더하고 뺄 것이 없는 완전한 계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기록된 이후 더 이상 새로운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계시된 말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듣는 자들에게 충분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논의를 종합하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종결되었고, 더 이상 새로운 특별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계시 시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계시가 나타났고, 그 아들 안에서 모든 계시가 완성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최종적이며 최상의 계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은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사람들의 전통에 의해서든 언제라도 어떤 것도 성경에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한다.
성경의 충족성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기록인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충분하지 않다면, 다른 계시가 필요할 것이며, 앞으로도 계시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충족성이란 성경 이외의 다른 특별 계시가 필요 없음을 의미한다.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의 모든 계시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를 구원하고, 성도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즉, 선지자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말하거나 기록한 것이 모두 성경에 포함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의 조항들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완전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시 19:7-9).
시편 19편 7-9절은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를 표현함으로 완전 절대 충분함을 나타내어 주고 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고 한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 문맥에서 보면 여기서 ‘성경’이라는 단어는 기록된 말씀이며, 성경을 의미한다. 이 말은 우리가 성경 안에서 읽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들의 전부이며, 그러한 말씀들은 우리를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지혜롭게 해 줄 수 있는 충분한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준비함에 충분한 교훈을 한다고 일러주는 구절도 있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 행위 완전한 자는 여호와의 법을 따라 행하는 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의 기록된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 완전한 삶을 사는 일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 이 말씀은 청년이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삶을 통해서 ‘자신의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다’는 언급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7).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어 우리가 온전하고 또 선한 일을 행하는 온전한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다"라고 말할 때, 계시가 완전하며, 따라서 이 말은 계시의 종결과 성경의 충족성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직통계시’와 같은 어떠한 형태의 계시도 존재하지 않으며,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내적 조명
앞의 논의는 성경의 권위와 동등한 특별계시가 종결되었으며, 계시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기에 충분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생각조차 없다는 뜻인가? 성령이 우리의 지정의를 움직여 무엇인가를 말하고 지도하고 권고하는 일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감동이 있다. 이 감동은 성령 하나님의 내적 조명의 결과다.
더 이상 특별계시는 불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내적 조명은 오늘날 교회와 개인에게 필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6항은 내적 조명이 계시를 구원론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조명이란 성령의 주권적 사역으로 계시된 진리를 신자에게 밝게 비추는 것으로 신자의 눈으로 하여금 진리를 밝게 보게 하는 영적 사역이다. 조명은 구원받은 신자에게 필요하며 신자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게 하기 위한 영적 능력을 갖추게 한다. 아무리 기록된 계시를 가졌다 할지라도, 성경을 매일 읽는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깨닫는 능력을 갖출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하지 않다거나, 권위가 없다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적인 부패함 때문이다.
인간은 흑암의 권세 아래, 죄의 권세 아래 있었으나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신자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우리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조명은 기록된 성경의 내용을 해명하는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탐조등을 비추어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오류에서 벗어나게 하고 진리 가운데 확실하게 거하게 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조명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객관적 확신, 믿음에 대한 확신은 성령의 내적 조명에서부터 온다. 신학자 존 칼빈은 오직 내적 조명으로 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성령의 조명은 진리에 대해 확실하게 하고 감화는 내적 확신을 준다. 그 결과 하나님께 마음이 이끌려 자발적으로 순종하되 보다 더 효과적으로 순종하게 된다. 우리가 믿는 믿음과 진리에 대한 확신은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 이론 등에 근거하지 않는다. 믿음에 대한 확신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조명하시고 감화시키는데 있다. 오직 성령이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것이다.
직통계시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을 직접적인 계시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 같다. 계시와 조명은 구별된다. 조명은 기록된 계시와 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조명은 새로운 계시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계시를 비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조명은 숨겨진 것들에 대한 어떤 계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지혜와 지식의 보물들에 대한 적용인 것이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진리를 비추실 때 비로소 교회와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우리는 계시를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은 기록된 말씀을 조명하신다는 차원에서 그 분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늘날 새로운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그 계시를 하나님 말씀보다 더 우선시 하는 자들은 모두 가짜이다. 성경은 명백하게 특별 계시가 종결되었고,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 얻기에 충분함을 말해준다. 성령께서는 새로운 말씀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하여 주신다. 그래서 지혜로운 기독인은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얻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오직 기록된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붙잡고 그 뜻을 조명하여 달라고 매달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게 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을 기대한다.
/김응열
김응열은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2학년 학생이다. 이 글은 최덕성 교수가 개설한 "성령론"( 2016, 가을학기) 학과목 과제물로 제출한 논술형 '텀 페이퍼'이다. 글의 내용과 글쓰기 형식이 돋보인다.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