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완전한 모범기도
기도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활동이며 고귀한 행동이다. 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대할 때보다 더 위대한 순간은 없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의 모든 복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알현하는 일인 동시에 면밀히 자기를 검토하는 활동이다. 영적 생활의 진상, 즉 자신의 신앙 상태를 시험하는 긍정적 시금석이다.
우리 조상들은 서낭당 고개에서 복과 안녕을 빌었다. 서양인들은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구한다. 염주 알을 굴리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염불기도로부터 마리아 상 앞에서 올리는 기도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기도의 내용은 주로 소원성취, 안녕, 보호이다.
그러나 기독교 기도의 내용과 접근방법은 무속신앙이나 이교의 간구와 같지 않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하는 통로이며 영혼의 호흡이다. ‘주기도문’은 올바른 기도의 완전한 개요를 담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를 가르쳐 준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때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는 기도를 하려고 하면 말문이 막히고 말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조금만 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밤새도록 기도하실 수 있습니까? 산에서 기도하고, 새벽에 기도하고, 혼자서 기도하실 수 있습니까? 어떤 기도가 올바르며 응답될 수 있는 기도입니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때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주기도문’은 그냥 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를 마무리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주술적인 효과를 가진 것도 아니다. 어떻게 무엇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를 기뻐하시는가를 가르치려고 주신 것이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완전한 개요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올리는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의 모범이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은 일정한 원리와 방법에 따라야 함을 뜻한다.
성경은 모세의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 다니엘의 기도 등 여러 개의 기도들을 담고 있다. 가장 유명한 기도는 대제사장 예수의 중보기도(요 17장)이다. 이 기도를 축소, 요약하면 ‘주기도문’이 제시하는 원리, 접근방법, 내용과 동일하다.
바람직한 기도는 그 길이가 한 시간 동안이든, 밤을 새우든, 오 분 동안이든, 길게 하든, 짧게 하든 간에 ‘주기도문’으로 요약되며 축소된다. 목소리를 높여하든, 작은 소리로 하든, 홀로 하든, 회중이 함께 하든 간에 우리의 바람직한 기도는 ‘주기도문’의 확대이고, 이 기도문이 제시하는 원리와 접근방법에 기초한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가르침은 기도의 응답이나 효험에 관심이 많은 기도를 배격한다는 것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기도를 배격한다. 기도의 주된 목적이 소원성취, 보호, 안녕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다분히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자신의 문제꺼리, 난처한 일에 너무 관심이 많다. 눈을 감는 즉시로 소원을 아뢰기 시작한다. 소원의 조항들을 수 없이 반복하며 아뢴다. 그리고 응답이 없을 때 자신의 믿음 부족을 한탄하거나, ‘신통력’ 있다는 자를 찾는 경우조차 있다.
기독교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위한 수단이다.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소원 성취, 보호, 안녕을 구하기에 앞서 해야 할 것이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관심을 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의 절박한 처지, 터질 것 같은 근심, 일상적인 염려 등을 아뢰기 전에, ‘달라,’ ’소원한다,‘ ‘바란다’고 간구하기 전에,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중히 문안을 올리듯 하나님의 성품, 사랑, 자비, 능력을 생각하고 찬양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만일 옆집 아저씨를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친 아버지를 향해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어떤 일을 부탁한다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진노의 자식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함, 높으심, 영광을 기리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먼저 상기시키시고 있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친숙함, 친근감이 있기까지 우리의 소원을 아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크고, 높고, 영화로우신 아버지! 완전하시며,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범죄자의 돌아옴을 기뻐하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바를 파악하고 계시는 아버지!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질그릇 같은 죄인을 만나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시는 아버지! 눈을 감으면 즉시로 알현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으며,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아버지! 그 하나님께 올리는 바람직한 기도는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자녀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주기도문’이 제시하는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을 칭송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거룩하심과 그의 나라와 뜻을 기리며 찬양하는 일이 앞선다는 것이다. 하늘의 임금을 알현하는 신하나 백성에게는 소원을 아뢰기 전에 그분의 권위와 완전한 통치에 대한 경의와 신앙고백이 요구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깊이 인식한 후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높이는 일과 그 분의 나라의 임함과 그 분의 뜻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주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 당신은 거룩한 분입니다. 당신은 허물이 없으시며,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당신은 왕 중 왕, 하늘의 주관자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이어질 때 기도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다니엘의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이 원리에서 일치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이 땅에 시작되었고, 재림과 심판으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 나라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가르침을 삶으로 받아들여 시행하는 자에게 뻗어나가고 있다. 지구 이쪽 편과 저쪽 편의 기독인들 가운데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주기도문’의 세 번째 원리는 소원을 아뢰기 전에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다짐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에 관한 경하(敬賀)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부름꾼이나 하수인이 아니다. 우리의 소원을 아뢰기 전 먼저 그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의지, 그분의 통치를 받겠다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 “행복한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 고통이 중단되기를 원합니다만 계속되든 중단되든지 간에 나는 당신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요구된다. 이 점에서도 기독인의 기도는 비기독인들의 기도와 다르다. 우리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기도문’의 네 번째 원리는 영육 간 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육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빵 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범죄, 과실을 용서해 주실 것과, 세상의 유혹이 있을 때, 그것들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와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올려야한다. 기도는 자기를 면밀히 검토하는 영적 작업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의 기도가 세상의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육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기복적이라고 비난하거나 매도할 수 없다. 배고픈 사람이 빵을 구하거나 병든 자가 치료받기를 기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의식주, 건강, 교육, 건전한 사회생활, 국가, 세계의 평화, 빈부타파, 구조악의 파괴 등 인생사에 필요진다면 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
주님은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주권자이시다. 주권자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신다(마 6:32).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시고,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하신다. 햇빛과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죄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그리고 적절하게 내리신다. 만사를 당신의 계획과 작정하신대로 운행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육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이루어 우리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자녀들이 당신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감격하며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알도록 하신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심을 체험하고 깨닫고 신뢰하도록 하기위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원리는 기도 내용에 따라 일정한 몫을 할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의 절반을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 분의 이름의 거룩함과 나라와 뜻을 높이는 일에 할당하고 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 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는 첫 부분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기도가 '젯밥'에 주된 관심을 가진 세상의 기도와 다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정립, 나라와 뜻을 기리며 그 분의 주권적인 통치에 대한 고백이 주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기도의 주된 목적은 소원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며 영혼의 호흡에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중보기도도 그것의 절반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에 할애하고 있다. “내가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러 왔사오니”로 계속된다. 이처럼 우리가 한 시간 동안 기도하면 30분 정도를, 20분 동안 기도하면 10분을, 성급히 우리의 소원을 아뢰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거룩함, 나라, 뜻을 기리고 찬양하는 일에 할당함이 바람직하다.
‘주기도문’의 전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 7:7)라고 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 9-11)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자신의 주권적 통치를 이루어 가신다.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심으로써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게 하시며 신뢰하게 하신다.
기독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의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영혼의 호흡이며, 하늘 아버지와의 사귐의 대화이다. 기도라는 수단으로 하나님과 좋은 사귐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을 닮아 갈 수 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부요해지며 승리하며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자원과 지혜를 공급받을 수 있다.
최덕성/ 고신대확교 고려신확대학원 교수
이 글은 <월간고신>에 기고한 것이댜. <월간고신>은 이름을<생명나무>로 이름을 바꾸어 출간하고 있다. 필자가 1989년에 고려신학대학원ㅇ에 전임교수로 부임한 얼 마 뒤에 기고한 글이다. 위 신앙잡지사가 임의로 1998년 4월호에 재차 게재했다. 기도의 이해와 실천에 유익힌 글이다.
최덕성 박사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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