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참고표기법
차정식
1. 내가 알기로 '표절'이란 개념은 19세기 헤겔 이후 본격적으로 조형되기 시작한 근대적 발명품이다. 마찬가지로 저작권(copyright)이란 개념도 20세기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쌍생아 중 한 갈래다. 그 이전에는 이런 것들이 심각하게 사회적 의제로 논의된 적이 없었다. 가령 신구약성서와 중간기 문헌, 특히 위경(pseudepigrapha)은 자료 비평의 방법으로 추적하면 오늘날 개념의 표절 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런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저자도 독자도 이를 문제 삼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미래학자들이 예견하듯 앞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수명이 30년 정도 남았다면 그 이후 이러한 동시대의 개념들이 전혀 다른 지평에서 논의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유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시대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 글 쓰고 학문하는 이들의 중요한 윤리적 기준으로 부상한 표절 및 저작권 침해 문제에 대해서 날로 그 잣대가 엄격해지고 있는 터라 이 시대적 기준에 맞춰 이를 존중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 역시 특별한 창조적 열정이 요구되는 학위논문과 학술 연구 논문, 학술연구 저서, 나아가 문학과 예술의 창작품 등에 대해서는 이러한 기준의 엄격한 적용이 필수적이라고 줄곧 생각하고 행동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을 비껴 나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의 장르와 형식이 엄연히 존재하며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도 무시하지 않았다. 교과서와 각종 교양 도서류, 기독교 신앙 도서와 평이한 개론적 내용을 담은 신학 도서 등에 저런 엄격한 학술적 기준을 들이대며 숨통을 조이는 것은 교각살우라고 본 것이다.
이 다양한 글쓰기의 스펙트럼 속에 이른바 성서 주석이란 다소 애매모호한 장르가 자리한다. 이 범주에는 고도의 학술적 주석서로 정평이 난 Hermeneia 시리즈의 주석서부터 각주와 복잡다단한 학술적 쟁점에서 비껴 선 채 공유할 만한 연구의 평균치 내용을 담아내는 평이한 수준의 성서 주해서에 이르기까지 두루 포함되기 때문에 딱히 단 하나의 기준으로 그 글쓰기의 규범을 설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주석 시리즈의 성서 주석은 평신도와 목회자를 두루 겨냥하며 전자보다 후자의 관점을 살려 20년 전에 기획되고 이후 20년에 걸쳐 집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서구 성서학계에서도 이 장르의 복합성을 이제야 주시했는지 최근 이에 대한 학술적 토론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Timothy D. Finlay and W. Yarchin, ed., The Genre of Biblical Commentary: Essays in Honor of John E. Hartley on the Occasion of His 75th Birthday (Oregon: Pickwich, 2015).
2.
얼마 전 '성서 주석 쓰기의 어려움'이라는 제목의 페이스북 글(이 글 아래 참조)에서 자세히 밝힌 대로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내 <성서 주석: 로마서>는 1년 내로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최대한의 응집된 에너지를 모아 17년 전에 산출된 책이다.
본문 번역상의 이의에 대한 추가적 설명 용도 이외에는 "가급적 각주는 달지 않는다"는 편집위원회의 집필 규정을 마냥 무시하기 어려웠고1), 그렇다고 참고한 자료를 저자 개인의 심중에만 파묻어 두기엔 찜찜하여 내가 타협책으로 선택한 방식은 간략한 '본문 내주' 방식(본문 안에 참고 자료를 간략한 약호로 표기하고 뒤의 참고 문헌 목록에 자세한 내역을 밝히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포괄적 참조 표기법으로 학술 논문이나 학술 연구 저서에서 흔히 사용하는 각주의 Ibid.(직전 자료를 연거푸 표기하는 방식)나 op. cit.(하나 건너 앞서 인용한 자료를 재차 인용하는 방식)의 빈번한 사용으로 동일한 참조 항목의 촘촘한 반복 사실을 표기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본문의 괄호 안에 연거푸 똑같은 참고 자료를 표기하는 게 성가시고 독자의 가독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괄적인 참조 표기법의 정당성을 살려 관련 자료를 한 차례, 또는 듬성듬성 인용하면서 본문 주 형식으로 처리한 것이 엄정한 학술 논문이나 학술 연구 저서의 인용 및 참조 표기법의 상례에 비추어 미진하거나 모자라게 보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2007년 제정되고 2015년 개정된 교육부의 연구 윤리 규정에 따르면 불만족스러운 점이 충분히 인정된다.
당시 로마서에 대한 변변한 연구 논문 한 편 산출한 적이 없는 30대 초반의 성서학자로서 일단 내게 익숙한 외국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여 읽고 분석하면서 내 주석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방법론적 미흡으로 인해 지적받을 만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서론 부분에 해당되는 로마서 연구사나 학문적 논의와 연관된 개론적 지식 부분에서는 그동안 서구학계에서 다루어온 로마서 연구의 진행 사항을 예의 주요 연구서를 통해 광범위하게 참조하면서 그 출처를 본문에 명기했지만 빼곡한 각주로 여러 차례 표기하지 않은(또는 못한) 점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족과 미흡한 점, 현재의 엄격한 기준에 비추어 비정상성으로 지적받을 만한 점에 대해 이 주석서를 구입한 독자 여러분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드린다.
그러나 1, 2권 도합 1,000페이지에 이르는 이 주석서의 본문 주석에는 해외의 유수한 주석서와 연구 논문을 참조하되 기본 분석과 해석의 틀은 내가 고유한 아이디어로 짰고, 그 본문 해석의 내용 역시 보편타당한 지식의 공유 이외에 내 나름의 창조적인 해석을 제시하면서 상당 부분 나름대로 고군분투한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이성하 목사님이 이 주석서의 미심쩍은 부분을 네뎃 군데 샘플로 보내시면서 확인, 대조를 요구했을 때 내가 답변한 점도 이러한 배경을 깔고 있다. 목회에 바쁘신 분이 학자의 부실한 작업으로 말미암아 신경 쓰게 한 점, 또 현재의 엄정한 학술적 기준에 비추어 미흡한 까닭에 본의 아니게 실망시켜 드린 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했고, 당대의 상황에서 본문 주의 표기가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그나마 그 본문 주를 창구로 하여 이 책의 참조·인용 표기가 얼마나 꼼꼼한지를 이 목사님이 사냥하며 탐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차례 이성하 목사님과의 통화를 통해 이 주석서의 저자 중 일원인 저명한 김 모 교수님과 김 모 목사님을 언급하기에 내가 존경하는 이 분들과 협의하여 포괄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 대화를 시도했다.
김 교수님의 입장은 나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집필 당시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원천 기술에 해당하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이론을 각주 등의 참조 표기 없이 인용했다면 당연히 사과해야 하는 반면 수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불가피하게 중첩될 수밖에 없는 해석과 분석 내용을 담아내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그런 절차 없이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 그분의 기본 입장이었다. 물론 어디까지가 대체로 용인될 만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의 범위인지는 해당 경우마다 다르고 복잡하여 성서학자들 사이에 별도의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던 중 이 시리즈의 주석서 집필에 참여한 분들 50명 중에 은퇴하시거나 목회 현장으로 나아간 분들을 제외한 현역 교수 10여 분들을 중심으로 하여 공통의 입장을 표명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이 소통의 작업을 한 달간 꾸준히 진행해왔다. 그 결과 당시의 집필 규정, 주석서란 장르의 애매모호한 특수성, 2007·2015년 연구 윤리 규정에 비추어 부족한 점, 앞으로 재집필과 개정판 생산의 희망적 가능성 등을 출구 방안으로 담아 저자들의 입장을 두루 대변할 발표문을 작성하여 이성하 목사님을 비롯한 독자분들께 성의껏 응답하고자 하였다.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애당초 문제를 지적받고 사과하고 절판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개인적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응답하고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쉬운 길이었겠지만, 이는 학계 전체의 문제로서 응분의 책임을 지면서도 미래 지향적이고 생산적인 해결책을 찾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문건이 완성된 직후 그것을 해당 출판사의 공지사항 코너에 올리는 방안이 무산되었고, 이 사안을 최초 보도한 <뉴스앤조이> 언론사에 보내기로 의견이 모아지던 마당에 '집필 규정에 따라 집필한 주석서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강경한 입장이 막판에 돌출하여 상황이 교착되기에 이르렀다.2) 그만큼 각 저자들이 자신의 주석서에 근거한 상황 인식과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이 다양하고 상이하다는 증거가 되겠다. 내가 볼 때 각 저자에 따라 절판을 거론할 만한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아예 학문성을 살려 새로 집필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또한 개정판을 내는 것이 합리적인 사례도 있는 듯하며, 저자 각자의 학문적 양심과 주관적 소신에 따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경우도 꽤 많은 듯했다. 내 경우는 본문 주로 성글게 처리한 참조 표기를 각주로 보다 촘촘하게 재처리하고, 지난 17년간 Robert Jewett의 로마서 주석서를 비롯해 좋은 외국의 주석서가 몇 권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국내의 로마서 관련 논문도 수십 편이나 나온 터라 해외의 새로운 연구 성과까지 수렴하여 개정판을 내면 미래지향적으로 훨씬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였다. 하여 내 몫의 비용 부담을 포함하여 그 가능성을 출판사와 타진하였고, 이성하 목사님께도 그 개정판이 나오면 가장 먼저 한 질 증정하겠다고 밝혀 나름의 공감을 얻어 낸 바 있다.
3.
그나저나 이성하 목사님의 고충 어린 노고를 통해 성서신학계는 큰 경각심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판에 그가 가위를 들고 홍길동처럼 나타나 선지자 노릇을 해 온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한다. 때로 그의 겸손한 어투에 비해 종종 비아냥거리는 듯한 조롱조의 글투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 역시 학자들의 부실함에 비추어 충분히 감내해야 할 현실이려니 생각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내가 향후 편집 책임을 맡은 <한국기독교신학논총>에서는 그 연구 윤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규정을 재구성하고, 신학 연구자들의 자성과 다짐을 표기하는 선언문을 포함시키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번 캠페인을 통해 조심스럽게 '표절 근본주의'의 위험도 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세상에 나오는 책이 모두 학술 연구서가 아니고 교양서와 교과서, 또 애매모호한 주석서 장르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진대, 한 가지 글쓰기 기준으로 모든 신학책을 한 통속으로 규정하는 것은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출판사가 앞으로 평신도를 위한 교양 도서, 신앙 도서, 평이한 신학 도서를 내기가 어려워지지 않겠냐고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이러한 책들 역시 출발점은 학자들이 밝혀낸 전문적인 '지식'을 기초로 하지만 저자가 나름의 소화와 재구성을 통해 참조나 인용 표기 없이도 충분히 그 몫을 다할 수 있는 출판상의 효용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 주석서·주해서 양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여 차제에 서구의 경우처럼 Hermeneia에 비견될 만한 고도의 학술적인 주석서에서 각주 없이 평범하면서도 연구의 현 단계를 폭넓게 반영하는 내용의 목회자·평신도용 주해서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세분화와 그 형식적 고유성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또 한 가지 제안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기존 학자들의 저서를 뒤지며 부실함을 까발려 고발하는 전략적 필요성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성하 목사님을 비롯한 현재 소장 학자들이 그 뜨거운 에너지를 모아 뛰어난 연구에 매진하여 기존 학자들의 부실함을 극복할 만한 주석서 및 훌륭한 연구 저서를 산출하여 축적해 나가는 것이 여전히 학문 식민지의 기지촌을 방불케 하는 척박한 이 땅의 신학 연구에 생산적인 기여를 하는 지혜로운 방안이 아닐까 싶다. 이성하 목사님 또한 이러한 열정을 재구성하여 그의 신약학 박사 학위논문을 조속히 완성, 부실한 한국 성서학 아카데미에 도전적인 연구와 학구적인 자극으로 기여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만이 나를 포함하는 이 땅의 부실한 신학자들의 결핍을 극복하고 우리 신학계를 창발적으로 세워나가면서 내가 우려하는 '표절 근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더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산출하여 부실한 나무를 대체할 만한 더 좋은 나무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사명과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공유돼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학 표절 반대' 사이트가 동종 교배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관련 의혹의 예문에 대해 다양한 이견이 피력되고 수용될 수 있도록 탄력적인 운영의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료된다. 가령, 김정우 교수님의 의혹 제기 지문에 대하여 김 교수님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일일이 다 반박하고 나름의 정당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울러, 그는 성서 주석서(biblical commentary)의 장르에 대한 논문을 읽고 공부하면서 조만간 이와 관련된 본인의 논문을 발표할 계획이 있다. "거의 번역 수준" 운운하는 대목에서 이견이 분분하지만 학자들이 공연히 끼어들어 이전투구 판을 만들며 피로감을 자초할까 대개 저어하는 분위기 같다. 순수한 열정조차 과도한 경직성에 휘둘려 애당초 의도와 달리 쉽사리 정치권력화하고 섣부른 낙인 찍기로 변질되는 사례를 우리는 지금도 주변에서 숱하게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또 다른 관점의 지적들이 두루 인용, 참조되어 활달한 대화와 겸손한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다면 이 사이트가 공론의 장으로 유용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몇몇 특정 개인의 배타적 블로그 차원으로 고착돼 끼리끼리 의기투합하여 강파른 '자기 의'의 분출로 영향력 과시하기, 일단 까발려 '의혹'으로 망신 주기, 내 기준대로 내 말대로 회개하라고 강요하기 수준에서 겉돌 우려도 없지 않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2007년 이후 생산된 특정 학자의 특정한 학술적 글과 책이 (신학자의 경우뿐 아니라 다른 영역도) 표절 의혹이 심각하다고 여겨지면 그 학자가 속한 대학의 관련 위원회에 이를 통지함으로써 공적인 기관에서 이 문제를 공정한 절차를 밟아 처결할 수 있도록 해당 학자에 대한 인격적인 배려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혹의 사실 여부나 정당성 차원과 무관하게 의혹의 언급만으로도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이 논란의 뇌관을 너무 경솔하게 건드려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명예 훼손이 초래되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육부의 표절 심사 규정 및 일반 학회·대학의 관련 위원회 규정에서도 이 점을 적시하여 표절 대상이 될 만한 학자의 담론을 심사할 때 그것이 공론화 과정을 거쳐 확정 발표되기 직전까지는 비밀 준수(confidentiality)의 원칙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이런 기준에 근거하여 이전의 다른 학위논문을 90% 정도 베껴 낸 학위논문, 다른 학자의 연구 논문을 자기 저서에 아무런 출처 표기 없이 전재한 경우, 외국의 논문을 거의 번역하다시피 재탕하여 자신의 논문으로 대체한 경우 등등 몇 가지 사례를 직간접적으로 접하여 예의 심사 절차를 밟도록 다룬 적이 있다. 물론 그 결과는 일부 솜방망이 징계 이외에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그 당사자의 오류를 바깥으로 떠들면서 그 한 가지 건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싸잡아 매도하는 분위기를 조장하지는 않았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로 글을 쓰게 되어서 이성하 목사님과 여러 독자 여러분들께 거듭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1) 문제를 제기하는 일각에서는 이런 규정 따위는 당연히 무시해 버리고 그 집필 제안에 응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소급 화법으로 주장하는데, 그건 당시 상황뿐 아니라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보더라도 좀 무리한 측면이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발생될 걸 미리 예견했더라면 집필을 거부하는 것이 현명했겠지만, 17년 전 내가 당면한 상황에서는 주석서의 장르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물론 그 표절 시비의 가능성에 대한 예견이나 우려는 전혀 없었다.
2) 이로 인해 황망해할 겨를도 없이 미국으로 급하게 출국해야 하는 일정으로 이성하 목사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이 또한 사과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