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고신 어딜 갈 것인가?/ 정주채

by dschoiword posted Dec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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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고신교회 어디로 갈 것인가?


아래의 기사는 <코람데오닷컴>이 소개한 "고신교회 어디로 갈 것인가?" 주제 세미나에서 정주채 목사가 발표한 글이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정확히 진단하지 않으면 위태하다.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의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고신교회의 나아갈 길에 대한 정주채의 많은 아이디어들은 일면 유익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여러 가지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순교정신의 반대는 성장주의, 고신교회 어디로 갈 것인가?

2015.12.08

코람데오닷컴 기사


“고신교회, 어디로 갈 것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에 장로교회의 나아갈 길을 생각한다.” 2015년 후반기 미래교회포럼이 지난 7일, 8일 부산 소명교회(담임목사 나해주)당에서 열렸다. 안병만 목사의 사회로 시작된 첫째 날 집회에서 미래포럼 대표 박은조 목사(은혜샘물교회)는 “종교개혁의 영성을 이어가는 한국교회, 그 속의 고신교회가 할 역할이 무엇인 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했다며, 전국 각지에서 온 120여명의 참석자들을 환영했다. 코람데오닷컴 발행인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는 기조강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강의함으로 참석자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고신이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전도대상자들인 일반인들로부터 비난과 질시를 당하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악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범죄 곧 간음, 사기, 도둑질, 살인미수… 등이 일어나고 있고, 이단들은 즐거워하며 발호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동성애와 성적 불륜을 정당화하고 이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으나 기독교는 이를 막을 만한 도덕적 권위와 힘을 상실해버렸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위기이다. 이런 때 고신이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고신이 가진 이 시대의 역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이는 이번에 우리가 다루어야 할 주제이다.


1. 고신정신의 확인과 회복을 위한 노력


고신은 그 출발에서 “고신정신”이라고 부를만한 신앙이 있었다. 고신정신이 무엇인가? 여기서 정신이란 영성을 말하는 것이며, 교리나 신학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교리나 신학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다고 해서 그가 올바른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정신이란 살아있는 신앙이다. 개인적으로는 삶과 괴리되지 않은 살아있는 신앙의 기개이며, 공동체적으로는 그 공동체를 이끄는 주도적인 신앙풍토이다. 혹은 어떤 시대를 풍미(風?)하는 신앙적인 사조(思潮)라고도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신정신이란 고신을 풍미하며 이끌었던 신앙의 역동적인 흐름 또는 그런 분위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고신정신을 한두 마디로 정의하거나 요약하기가 어렵지만, 필자는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본다. 첫째는 순교신앙이다.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the Lordship)이심을 믿고 오직 그에게 충성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이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는 신앙이다. 둘째로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산다는 개혁주의 신앙이다. 셋째는 불의와 불법에 대한 투쟁정신이다. 불의한 일에 타협하지 않고 오직 공의를 따라 행하려는 충성된 마음이다.


이는 주로 고신의 설립자들 - 손양원,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송상석 등에게서 나타났던 정신이었다. 그러나 이 정신이 고신교회 안에서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고, 역사적으로도 한 세대를 넘어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고신을 시작했던 바로 그 세대가 끝나기도 전에 그 순수성이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즉 개혁신앙은 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신사참배 죄에 대한 회개촉구는 바리새적인 성격으로, 더구나 교회의 권위가 사적인 권위에 기우려지면서 고신정신은 교파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신은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고신정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우리 안에서도 신앙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1) 개혁주의 신학의 현장화


지금 고신을 풍미하고 있는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라기보다 근본주의적인 보수주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말씀이다. 성경말씀대로 믿고 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이란 끊임없이 성경으로 교회를 살피고, 믿음과 행위가 성경에 합당하지 않을 때 성경으로 돌아가는(back to the Bible) 운동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신학이 교리에만 치중하고 행함에는 매우 소홀하다. 이건 보수신학이지 결코 개혁신학이 아니다. “교회의 선생”으로 불리는 신학교의 교수들, 특히 보수적인 교단의 교수들은 대부분 교회현장과 담이라도 쌓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대관절 신학자들이 현장과 호흡 없이 어떻게 개혁신학을 제대로 가르치며 구현할 수 있겠는가? 교수들이 가끔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나 강의를 하는 것 가지고 교회현장과 호흡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 고신의 경우 대부분의 교수들이 교회 안에서 온갖 불의한 일들이 일어나고 사건들이 터져도 철저히 침묵해왔다. 그러면서 오히려 “신학교에 정치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 정치바람을 타서는 안 된다.”며 방음벽을 세우듯 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고 이를 사수하는 일이 신학교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면 큰 의미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 안에서 역동적으로 작동될 때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교회의 존재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2) 순교신앙의 생활화


순교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색순교요 다른 하나는 백색순교다. 전자는 피 흘림의 순교요 후자는 생활의 순교다.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적색순교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예수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목 베임을 당하고 테러를 당하는 기독인들이 많다. 다행인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적색순교를 당할 우려는 거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교적인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안일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다. 많은 기독인들이 예수 잘 믿어 복을 많이 받고 행복하게 살기만 소원하고 있다. 고신의 경우 순교자들을 자랑하고 추모하면서 순교신앙을 노래하듯 해왔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순교적인 신앙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긴 힘들다. 우리 고신은 성경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오류가 없다는 교리를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중요한 교훈들을 예사로 여기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일점일획이라도 오류가 없다는 교리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한국교회의 타락을 주도한 사상은 물질주의, 성공주의, 성장주의다. 특히 성장주의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거룩한 것으로 위장할 수 있는 매혹적인 사상인데 순교정신과는 반대되는 사상이다.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큰 복임에 틀림없지만 성장과 부흥이라는 틈을 타고 들어온 물량적 성장주의는 한국교회를 타락시키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성장주의는 여전히 그 위세를 자랑하며 목회자들을 세속적인 영광에로 몰아가고 있다. 성장주의가 대교회의 목회자들만 빠져있는 함정이 아니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도 대부분 성장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대교회 목회자들 사이의 차이는 정신이 아니라 능력(?)인 것 같다. 작은 교회나 큰 교회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은 물량주의적이라는 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런 풍토에서 순교정신이 자리할 곳은 없다. 고신교회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3) 불법과 불의에 대한 투쟁정신 함양


불법과 불의에 대한 투쟁정신은 고신에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정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경남노회는 지금까지도 “법통노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노회나 총회에서 누군가가 “법이요!”라고 외치면 잠시나마 장내가 조용해졌던 적이 있었는데 그리 오래된 풍경이 아니었다. 법대로 하자는 분위기가 강했고 특히 불의한 일이 있을 때는 공분이 일어났던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정신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이요 “은혜로 하자”는 말로 불법과 불의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시대다. 직분자가 십계명을 공공연히 범하고도 교회에서 당당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죄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없다. 수치를 자랑으로 여기는 세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의와 불의에 대한 분별력이 약하고 정의감이 사라져 가고 있으며, 소위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은 작은 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에 대한 신앙의 약화다.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고백이다.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고백이 믿음의 터요 기둥이다. 이 믿음이 약화되면 모든 것이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불의에 대한 항거정신이 약화되고 공의를 구하는 일에 열심이 식은 이유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이시며 만유의 주시라는 믿음과 충성심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있으며 우리가 항상 그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코람데오 정신의 실종이다.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신앙의 약화는 교회정치와 행정 등 범사에서 그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사유화, 교권의 횡포, 교회직분의 세속화 - 세속적인 명예와 권세가 된 교회직분, 직분을 얻기 위한 선거운동, 교회치리회의 권위상실과 불신법정 고소 난무, 윤리적 범죄, 등등이다. 결국 불의에 대한 분노와 의를 구하는 열정은 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심에서 나온다. 심령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4) 다시 일어나야 할 회개운동


한국교회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먼저 고신에서부터 교회의 갱신과 진정한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실천적인 순교신앙이 목회자들의 일상생활과 목회현장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희생과 헌신, 성공주의에 저항하는 겸손과 검소한 생활정신, 섬기는 자가 위대하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가 남기신 본을 따르는 종의 정신을 찾아 회복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이런 것이 없이 순교신앙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행위다. 이는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외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자신들을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인체하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기 때문이다.


회개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며 일어났던 회개도, 1907년에 일어났던 회개도 모두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이어났었다. 2007년에 "어게인 1907"을 외치며 서울 상암동 경기장에서 가졌던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에서 옥한흠 목사는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옵소서. 부어주시옵소서. 부어주시옵소서."라는 외침으로 설교를 마쳤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야 한다. 우리 고신은 성령님을 제자리에 모셔야 한다. 근본주의적인 보수신학의 울타리 속에 성령님을 가두듯 모셔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 필자를 비롯하여 우리는 성령 충만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말하고 성령론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자기의 영적 수준대로 성령의 역사를 한정시키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성령 하나님은 겸손한 영이시다. 우리도 그 앞에 겸손한 마음과 경외심으로 서야 한다. 우리는 간혹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서 함부로 이단이나 불건전한 일로 단정하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성령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신중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믿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앞으로 우리 미래교회 포럼도 기도하는 모임으로 방향과 내용을 바꾸어 갔으면 한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역사하는 현장을 사모하며 진지한 기도회로 바꾸어 갔으면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의 특별하신 역사가 없이는 우리에게 변화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알고 있어도, 때로는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로 행하고 있다. 정주채 목사는 목사 장로들의 회개 목록을 다음과 같이 발표해서 참석자들의 기도제목이 되게 했다.


목사 장로들의 회개 목록 ●교회의 주요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을 입술로만 고백하며 실제로는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그의 주권과 영광을 찬탈하고 있는 죄, ●다투고 싸우며 분열한 죄,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거의 무시하듯 하며 살아온 죄, ●성장주의 곧 성공주의에 매달려 복음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본질적인 사역에서는 오히려 멀어진 죄(영혼구원보다 교회성장에 우선을 두었던 잘못들), ●교회를 사유화한 죄(목사와 장로들이 교회에서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죄), ●세속적인 영광과 권세의 유혹에 끌려 상좌에 앉으려고 불의한 노력을 했던 죄(교회 안에서 직분을 얻으려고 이제 거의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선거운동들), ●하나님중심 말씀중심에서 떠나 인본주의(기복신앙)에 끌려 다닌 죄, ●기도하는 일과 말씀묵상과 사역에 게으른 죄, ●외식과 위선과 거짓의 죄, 간음과 음란, 배임(사기)과 도둑질 등의 윤리적인 죄악들, 등등.


고신산하 주요기관들의 혁신과제 (정주채 목사는 고신산하 주요기관들의 고신정신에 따른 혁신과제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독립운영 ●목사후보생들의 과잉배출과 그로인한 목회자 수준의 저질화를 방지하기 위한 신대원의 구조조정 ●고신대학교의 설립이념에 맞는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 집중하는 구조조정 ●유수한 컨설팅회사에 의뢰하여 경영진단을 받고 노조와도 적극적인 대화를 하며 미래를 위한 확실한 대책을 세워야하는 복음병원 ●거대 구조조정으로서의 고려학원과 고신총회와의 분리(고려신학대학원은 총회가 직영하고,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은 총회 산하에 두어 간접적으로 지원을 하되 그 운영권은 학교법인 이사회에 맡기자).



정주채 목사는 고신정신의 회복을 위해서 회개운동을 제안하며, 창자가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지는 아픔과 슬픔을 부여잡고 애가를 불렀던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일밖에 우리에게 남은 일이 없는 것 같다고 결론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