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전의 아상주의/ 강춘건

by dschoiword posted Dec 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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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전의 아상주의

강춘건

고려신학대학원 신학석사학위논문

 

 

차 례 

서 론 -------------------------------------2

제1장 김홍전을 통한 시대 조명

1. 배교의 시대 ---------------------------------4

2. 상실의 시대 ---------------------------------11

3. 비뚤어진 시대 -------------------------------14

제2장 구원론 ------------------------------------22

1. 최낙재의 구원이해 ----------------------------23

2. 김세윤의 구원이해 ----------------------------24

3. 김홍전의 복음이해 ----------------------------25

1) 부정적인 표지 -------------------------------28

2) 긍정적인 표지 -------------------------------29

제3장 아상론(我想論)

1. 근본적인 변화 -------------------------------- 33

2. 아상주의(我想主義)의 실체 : 아상과 신앙 ------------ 34

제4장 아상주의 타파론

1. 아상 죽이기 ---------------------------------- 39

2. 하늘에서 내린 믿음으로 가능

1) 칼빈의 믿음 --------------------------------44

2) 김홍전의 믿음 ------------------------------45

3) 믿음의 실체 --------------------------------52

결론 -----------------------------------------61

참고문헌 ---------------------------------------63

 

서 론

 

한국방송공사는 2004년 10월 2일 토요일 오후 8시에 「한국사회를 말한다」 라는 프로를 방영했다. “선교 120년 한국교회는 위기인가?”라는 소제목의 기독교 관련 특집이었다. 이 방송의 기획의도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있었다. 먼저, “한국교회 위기는 어디서 오는가?”였고, 다음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가?”였다. 사회자는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하면서, 현재 한국(남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개신교도이며, 세계의 제2의 선교대국으로서, 국회의원 255명 중 120명, 상장기업의 임원 중 43%가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교회의 긍정적인 평가로 한국의 근대화와 복지에 이바지한 점, 민주화에 이바지한 점, 그리고 이웃돕기 및 사회 봉사활동 등을 이야기 했으며, 부정적인 평가로는 친일파 청산 부재, 독재권력 비호, 불투명한 재정 운용, 목회자 세습 등을 언급했다. 또한 한국교회 전체 자화상에 대한 조사 결과도 발표했는데, 그 중 한국교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응답이 31.3%, 그렇지 못하다는 응답이 59.3%라고 전했다.

 

세계교회는 한국 기독교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언급해 왔다. 먼저는 수십 년의 짧은 기간에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영향력은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 방송도 한국교회가 기적적으로 성장한 부분과 또한 교회가 한국의 근대화와 복지에 많은 공로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지금은 그 도덕적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으니 다시 교회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입장이었다.

이 방송은 방영되기 전부터 찬반논란이 있었다. “현 정권의 대형교회 죽이기가 아니냐?” 혹은 “각 교회는 나름대로 사명이 있는데 교회를 너무 단편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 “모든 교회가 일률적으로 구제, 사회문제, 선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하느냐?” 등이었다. 물론 교회 내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현재의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답다면 대형교회이든지 소형교회이든지 비판의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며,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웠더라면 친일행적, 권력비호, 목회자 세습이나 재정 운용 등의 비판이 왜 나오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국방송공사의 속내가 무엇이었든 지간에 그 내용은 몇몇 대형교회에만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심각한 도전을 던져주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제작자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간에 그 진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은 교회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여러 가지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참다운 모습을 회복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비본질적인 측면에 많은 힘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대세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타락과 부패의 요소를 보이고 있다. 장차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원인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생기는 것일까? 많은 요인들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참다운 구원과 신앙론의 부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구원론의 개혁이었다. 한 사람이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신앙을 회복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신앙과 구원의 참된 의미가 회복되어야만 가능하다.

 

김홍전 박사(1914-2002)는 한국교회가 외적으로는 성장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많은 부패의 싹을 내포하던 60-90년대에 독립개신교회(지금의 성약교회, 강변교회, 성은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그 교회 강단에서 뿌렸던 메시지는 진정한 복음이 무엇이며, 참된 신앙이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과 참된 신앙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참된 구원의 의미를 깨우치는 구원론과 비뚤어진 신앙을 바로잡는 신앙론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그가 신앙과 연관해서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아상주의(我想主義) 타파였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참다운 중생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아상주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옛사람을 따르는 삶을 말한다. 셀프 콤플렉스(Self Complex)라고도 하고, 자기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홀(自惚)이라고도 표현한다. 이것은 이교적 신앙, 종교적 신앙, 공리주의적 신앙, 행복주의적 신앙의 뿌리이며, 위선, 가식, 육신적인 모든 것의 원천이다. 그런 것들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아상이다. 올바른 신앙은 아상을 버리는 것이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아상을 탈피하는 것이다.

 

김홍전의 아상주의에 관한 메시지는 그 당시의 개교회를 향한 것이었지만 미래의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바라본 선지자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노라고 확신하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실제에 구원의 효력을 상실한 채 살아오고 있다. 그것은 아상이 아직도 그의 신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현시대에 교회는 많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운 상태이다. “말씀은 많지만 진정한 생명은 없다.”는 구호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많이 회자되었으나 지금은 이런 구호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김홍전 박사의 강설문은 구원의 의미를 다시 조명하게 하고, 비뚤어진 신앙의 뿌리인 아상주의를 타파하여 신앙의 본질을 상실해가는 교회의 치유를 도울 것이다.

 

제1장 김홍전 박사의 시대

 

김홍전의 강설을 살펴보면, 그는 당대의 교회에 관해 대체로 세 가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첫째로 배교의 시대에 대한 언급이다. 특히 말씀의 배교를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큰 세력(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정통고백의 흐트러짐, 개인의 말씀분별력 부재, 교회의 바른 말씀 선포 부재 등)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말한다. 두 번째로 믿음의 증거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상실해가는 시대에 대한 언급이다, 세 번째로 구원과 신앙의 잣대가 비뚤어진 시대에 대한 언급이다.

 

1. 배교의 시대

 

“오늘날 교회의 중요한 현실이 배교라는 현실인데, 이 배교라는 현실이 왜 발생했느냐 하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맨 처음에 시작한 교회가 이 세상적인 것을 다소 용인하면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소고 1」(108)

“근대에 이르러 세계의 교회가 타락하게 된 큰 원인의 하나가 이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를 운용해 나가는 방법론을 하나님이 내신 계시를 확인하는 문제에까지 원용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주기도문강해」(44)

 

김홍전은 불과 30-40년 전에 자신이 목회를 하던 시대를 배교의 상황으로 언급했다. 그가 배교로 보고 있는 실질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배교라고 할 때는, 현재의 교리나 거기에 의한 운동자체가 분명히 역사적인 교리에 위배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역사적인 교리를 표면적으로 배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배교라고 그렇게 얼른 낙인찍기는 어려워도, 실질상을 배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남장로교의 경우입니다.”

“지금의 배교의 실상은 정통이라는 이름 밑에서 배교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라는 이름 밑에서 배교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를 열심히 내걸고 배교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은 어디가고 이론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언급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김홍전은 겉모습의 배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으로서 실질상 배교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실질상 배교로서 말씀의 배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일제 강점기 때는 신사에 참배한 교회가 거짓 교회이며, 그 시대가 교회 배교의 시대였듯이 현시대는 말씀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 곧 배교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본질을 흐리는 것으로 자유주의와의 무분별한 일치, 연합운동을 들고 있다.

 

김홍전은 「교회에 대하여 1」, 제13강에서 “지금 배교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강렬하게 더욱 치열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면서 자유주의와의 비뚤어진 일치운동을 경고하면서 배교라고 하고 있다. 그는 같은 책 제4강에서도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면서 자유주의를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배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신앙고백이 다른 자들과 연합하는 것은 배교하는 것이며, 그냥 예배만 드린다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를 표방한 단체들이 있다. 그들은 본질은 고려하지 않고 기독교의 모습만 하고 있으면 다 교회인 줄 알고 연합과 일치 운동을 해 나가고 있다. 이것이 대세이다. 가만히 보면, 기독교 연합과 일치운동의 근본 목적은 기독교의 본질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을 과시하기를 원하고, 이만큼 성장했으면 이제 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 하는 식이고, 거대한 종교행사를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어서 이 사회에 한국교회의 힘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있을 절박한 순간에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신들을 하나는 오른편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한과 야고보의 높아지려는 어리석은 행동과 비슷하다. 이것은 흡사 현대의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것과 비슷하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과 회고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본질 안에 또는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목적 가운데, 자기 시대의 이익 안에 존재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한 목소리를 내고 힘을 과시하고 무언가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 정작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연합운동과 연합 단체들은 언제든지 배교의 위험에 있고 또 배교 중이다.

그는 그들의 문제에 대해 세 가지를 언급하는데 기독론과 구원론과 실천신학적 측면에서 원인을 찾는다.

 

“오늘날의 큰 문제는 구원론과 기독론이라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의 배교의 장본이 된 신학의 가장 중요한 거점의 하나는 기독론에 있어서 전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전승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관념에서 벗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전연 별다른 인물로 그려 놓은 건 아닙니다. 다 승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상 중요한 부분에서 부인하고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은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사회개량이나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는 것인가?.......(중략)........ 개인이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것으로 끝나는 건가?........(중략)....... 또 오늘날 큰 문제는 구원이 현실세계에 어떻게 적용되어서 무슨 역할을 하게 되는가 하는 실천신학상 문제입니다.”

 

김홍전은 계속해서 언급하기를 많은 교회들이 세계의 “여러 가지 분쟁의 관계나 첨예한 관계에 들어가서 간섭하고 함께 협력해서 세계 평화를 이루고 안정을 이루도록 노력을 해 나가자” 하는 식으로 나가고 있고, 그들은 결국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홍전은 그들에게 있어서만은 “그리스도가 결국 그런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간다고 말하고 있다. 또 언급하기를 배교는 덮어놓고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필연성을 가지고 전진”하는 것이며,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에는 “배교”라고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의 바른 자태”라고 한다는 것이다.

 

김홍전은 신앙고백이 같지 않는 세계 교회와 손잡으면 순결한 교회를 이룰 수 없다고 한다. 그의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는 교회는 신앙고백이 같아야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교파나 교회 분리의 원칙을 언급한다. 그는 “충분히 수긍할만한 교리상 신앙상의 이유, 또 빛과 어두움이 서로 합할 수 없다는 원칙 하에서 거룩해야겠다는 즉 구별되어야겠다는 주장 때문에 나뉘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그의 분리에 대한 “거룩성의 원칙”이다. 그는 구별되기 위한 분리를 인정하는 편이다. 그래서 “권력을 잡고 우월한 자리에 않고 싶어서 나뉜다면 분쟁이지 정당한 분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분리한 교파가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대해 언급하기를, “그 나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바른 도리 가운데 확고히 서서 나아감으로써 그 열매를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증시해야만” 분리한 것의 정당함을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순수한 고백공동체로서 교회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자신들이 믿는 고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목숨까지도 내버렸던가? 그 당시는 옷을 입느냐 입지 않느냐 하는 단순한 문제를 가지고도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 한국교회의 무분별한(신앙고백을 따지지 않은) 연합과 일치 운동은 정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인지 아니면, 교권주의를 형성하고 다시금 어떤 세속적인 힘을 가져보겠다는 것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김홍전은 「목자와 양 1」, 제12강, 특별히 배교시대에 교회에서 말씀 맡은 자의 책임과 개인들의 교회 선택에 대해 언급한다. 시대의 “교회가 배교해 나갈 때에 교회의 지도자가 나쁘면 그 교회의 교인들은 특별히 나쁠 것이 없으면서도 그냥 같이 앙화 가운에 빠져”들어간다. 그러면서 그 교회를 선택한 당사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네가 다는 몰라도 말씀을 많이 듣고 어떠한 교회를 네가 다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택할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하면서 교회 선택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묻고 있다. 물론 그는 그 개인이 알면서도 그 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적인 이유로서 인간적인 정과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김홍전은 교회의 배교의 과정에 대해서 「사사기소고 1」, 제1강에서 설명한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버리고 점차로 이방신을 섬기게 되는 과정과 연관해서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나중에 이방신을 섬길 때 그렇게 변질되는 과정에는 중요한 다리가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 다리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관의 큰 개념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자세하고 필요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 개념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희미해진 부분이 나중에 다른 사상으로 점점 대치되면서 배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관의 큰 개념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본인들은 신관이 바뀐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으니까 처음에는 아도나이라고 부르든지 바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처음 아도나이나 바알이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이교신을 두고 한 말은 아니며, 애굽에서 자신들을 인도한 하나님으로서 알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점점 더 깊고 실제적인 신 개념으로 새로워져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희미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에 이교신의 개념이나 그 속성이 들어오고 점점 처음의 하나님 개념이 대치되고 나중에는 이교신의 개념이 더 압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교회의 배교 과정도 이와 같이 설명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라고 하는 큰 개념은 알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이고 현실적인 것에는 무관심하다. 그냥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셨지” 하고 끝내버린다. 그럴 때 다른 세부적인 것, 즉 동정녀 탄생이라든지, 육체의 부활이라든지, 등과 날마다 현실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 등은 다른 사상으로 대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원주이시면 됐지 꼭 동정녀에게서 나셔야 할 필요가 있느냐” 혹은 “예수님을 믿으면 됐지, 꼭 부활했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 하는 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를 염두하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김홍전은 「교회에 대하여 4」, 제45강에서, 배교의 현실이 발생하는 조건과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최우선 원인을 언급한다. 배교적 현실이 발생하는 첫째 조건으로 세속주의를 든다. 세속주의는 ㄱ. 세상의 속된 것을 좋게 받아들일 때, ㄴ. 큰 탁류 속에 함께 휩쓸려 갈 때 생기는 것으로 신자 개인이 육적인 생활을 하는데서 시작한다. 둘째 조건으로 귀신의 가르침, 사이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그래서 참된 기도가 아닌 것을 참된 기도로 알고, 참된 찬송이 아닌 것을 참된 찬송으로 알고 부르며, 참된 헌상이 아닌 것을 참된 헌상으로 알고, 참된 신앙이 아닌 것을 참된 신앙의 바로미터로 보게 된다. 이런 배교적 조건이 형성된 현실 하에서 배교의 원인이 되는 가장 첫째 되는 요인은 “육신에 속한 생활”이다. 이와 같은 불법의 능력은 처음에는 교회에 서서히 뿌리를 내림으로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혼자만이 아니라 큰 물결로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교회들의 배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미국은 “교회가 교회기업이 되어가고 있으며, 목사는 교회를 기업으로서 잘만 운전하면 훌륭한 목사”가 된다. 그래서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니고 교회교(Churchianity)”가 되어가고 있다. 기독교의 참된 정신과 교육이야 어디로 가든지 상관없고 “교회 하나가 실팍하게 잘 되어 나가면 그거 좋지 않으냐는 식,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대의 배교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그렇게 되어 가며, 역사의 종국에는 결국 적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홍전이 말한 배교의 큰 핵심은 말씀의 변질에 있다. 자유주의 신학, 신정통주의, 비뚤어진 복음주의적 신앙, 말씀의 변개 등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비뚤어진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가장 핵심적으로 복음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령한 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앙과 구원의 도리를 기본으로 설명해 나가고 있으며, 참다운 신앙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것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비뚤어진 신앙의 자태가 어떻게 비뚤어진 기독교를 만들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사단적인지 얼마나 배교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대는 어두워도 주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하신다. 시대가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 해도 참다운 복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이가 참다운 복음을 선포하기 마련인 것 같다.

 

2. 상실의 시대

 

증거를 상실한 교회는 실질상 교회 부재의 현실을 나타내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태 1」(60)

“주께서 오늘 나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나를 구원하신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살아나가는 것이 심히 중요하다.” 「교회에 대하여 1」(117)

 

김홍전은 시대의 교회가 드러내야 할 증거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상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신앙의 자태 1」, 제2강에서, 교회의 세상을 향한 증거 상실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세상을 향해 신앙의 증거를 상실한 교회는 사실상 교회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증거를 상실한 교회-교회부재와 같음”이란 소제목이 이를 드러낸다.

 

그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통해서 이를 언급해 나간다. 롯은 소돔을 선택해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곳이 죄악의 도시임을 알게 되었을 때(처음에는 몰랐다 하더라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안주했다. 심판이 바로 임하는 그 순간까지. 그나마 겨우 신앙은 있어서 마음에 고통 했을 뿐(벧후2:7), 그의 가정은 거룩한 교회로서 자태를 드러내지 못하고 증거를 상실한 교회가 되었다. 단지 풍요와 부의 현실에 안주했다. 그 교회는 증거를 상실했고, 실질상 교회의 부재였다. 그는 “그러면 이러한 괴악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항상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질문을 던진다. 그는 “역사의 방향이 주님의 심판을 받기에 현저한 조건들을 갖추어 나갈 때”, 롯처럼 그저 “마음이 상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롯처럼 “그 사회에서 비익을 나누려고 해서도 안 되고”, 롯처럼 “거룩한 성격을 상실”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끝까지 증거자로서 자기의 증거를 고지하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증거하는 교회가 있어야 그 사회가 유지된다고 한다. 숨어있는 교회(롯의 교회)는 의미가 없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의인들이 구체적으로 그 믿음을 증거하고 있어야 한다. 증거하고 있지 못하면 실존이 아니다. 큰 교회라도 참된 속성과 참된 능력과 사명에 대한 각성이 없다면 교회의 부재인 것이다. 정통이라고 스스로 떠들어도 사명이 없으면 교회의 부재인 것이다.

 

김홍전은 같은 책, 제6강에서, 사명의 상실에 대해 언급한다. 이스라엘의 광야시대의 교회를 말하면서, 오늘날 많은 교회가 광야 시대의 교회와 같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율법을 주셨고, 성막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고, 다른 민족에 대해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다(출19:4-6).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게 된다. 그들은 왜 그렇게 불평하는 것일까? 김홍전은 이런 불평이 정말로 필요한 불평이 아니라 배부른 불평임을 자세히 입증해 나간다. 그러면서 불평의 가장 큰 이유로 “불신앙”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 들어간 후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세울만한, 은혜를 받을 만한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택하신 이유에 대한 “신앙의 지적 요소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구원하여 그 종 된 땅에서 이끌어 내었는지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상실했기에 불평과 원망이 계속해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의 상황을 오늘의 교회의 문제로 들고 온다. 오늘날 교회는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 명확한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교회를 왜 만들었는가? 그의 표현으로 말하면 “예수 잘 믿다가 천당 가려고 정거장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가? 마치 비행기 표를 예매해 두었다가 비행기 타고 가듯이, 하나님이 부르시면 후루룩 타고 천당 가려고 기다리는 터미널 빌딩인가?”하고 그는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에도 광야시대처럼 필요한 의식주를 늘 공급해주시고, 질병도 고쳐주시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지만 그것은 교회에게 무슨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기네가 다 활동을 잘해서 잘사는 줄 알며” 그렇게 착각하고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이 있어서 자신들을 부르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는 사명과 구원받는 믿음에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원받은 믿음이라는 것은 ‘천당 간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천당 간다고 말로만 하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믿음이라는 것은 가나안과 같은 이 땅, 바벨론과 같은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 땅의 유혹과 자극을 맹렬하게 물리치고 파괴할 수 있는 자각, 그리고 보다 강렬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자각이 생기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에 대한 자각이 없는 믿음이면 구원받았다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거의 결론 같이 사명에 대해 확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개인의 생의 목표가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의 기본은 항상 전체의 부분으로서 즉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만 의의를 가지는 까닭에, 우리는 그 전체가 무슨 목표를 가지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역사를 만들어 내는가, 이 역사는 어떤 성격으로 지어져야 하고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3. 비뚤어진 시대

 

“항상 주의해야 할 무서운 사상은 인조적인 종교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인간의 중요한 생활 활동의 내용으로 여기는 사상입니다. 즉 기독교라는 명의를 가지고도 하나의 인간적인 종교로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기도에 대하여」(222)

 

거의 모든 책에서 언급되는 부분이 배교주의, 교회로서의 증거와 사명 상실, 그리고 비뚤어진 신앙에 대해서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시대에 대한 언급은 보다 보편적인 측면으로서의 요소인 반면, 세 번째 시대적 요소는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신앙적 상황과 관련이 많다. 김홍전은 “한국적 신앙”이라든지 “한국적 토양”이란 표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한국 교회 안에 산재한 잘못된 신앙에 대해 매우 많이 언급했다. 그는 한국의 미신적인 상황과 연관하여 행복주의 혹은 공리주의를 가장 크게 경계하고 있다. 다 이교적인 구원관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세계 모든 교회들도 가질 수 있는 요소이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샤머니즘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로 한국적 기복주의이다.

 

「기도에 대하여」, 제11강에서 말하기를, 잘못된 신앙의 표지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언급하고 있다. 한 사람이 신자가 되었을 때, 그가 신자로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거룩하신 뜻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질인 복음을 알기보다는 종교적인 제의를 먼저 배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있는 복음을 더 이상 배우지 못하고 종교생활로 전락하고 만다. 본질에 기울어야 할 마음이 제의에 사로잡히게 된다. 김홍전은 이런 상태를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 들어가는 상태”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한편으론, 자기 “행복을 더욱 증진시키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하는 바탕 위에서 기도의 중요성, 헌금의 중요성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래서 헌금을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위한 제도로 생각하고 성경을 자기의 행복을 위해 자기 종교를 위해 이용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복음을 가르치기보다는 복 받는 비결을 가르치며, 행복추구론(eudaemonism)을 가르친다.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며,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십일조하고 봉사할 것을 지시한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었다. 김홍전의 표현을 빌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좀 더 하나님 앞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일까?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가르쳐주셨는가?” 이런 것은 “자기의 종교적인 프로그램 하에 어떠한 좋은 방법론”을 찾는 것과 같다.

 

먼저, 기도의 이교적인 냄새를 살피면서 논의를 확장해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책 「기도에 대하여」에서, “세상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을 때 하늘을 향해서 비는 것”과 참된 기도를 구분한다. 또 종교의 행위로서의 기도와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방도로서의 기도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하는 기도 가운데에는 불신자들에게도 있는 종교적인 요구로 말미암아 도출되는 기도와 동질의 것이 있다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이 없는 기도인 셈이다.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와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하는 기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격적인 신과의 교통이 있느냐 없느냐 일 것이다.

 

김홍전은 기도의 비뚤어진 자세, 특히 이교적인 부분에 대해, 공리주의 혹은 행복주의로 기도하는 자세의 잘못을 짚고 있다. 그러한 기도의 태도로서 “자기의 생활이 좀 더 유능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하는 기도(우리가 유능해야 할 이유는 열매있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예배 시 차례를 지내듯이 의식의 하나”로 하는 기도, 기도를 마치 “종교생활의 한 프로그램 정도”로 여기는 의식, “자기의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하는 기도, 기도 해놓고서도 이루어지면 기도해서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된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 다시 말하면 기도가 일반 자연법칙 안에 포함된 경우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또 그는 언급하기를 “독특한 경지를 쫓는 마음에서 하는 기도”(토굴에서 환상, 황홀경, 종교 삼매 등 신비주의), “재난을 예방하는 차원이나 일이 순조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기도”(필자 생각엔 세상 사람들이 고사지내듯이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 같다.) 혹은 기도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해두면 손해는 없겠지” 하는 식으로 하는 기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서” 하는 기도(‘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들어주시겠지, 당연히 복을 주시겠지’ 하면서 하나님을 잘 모르고 하는 기도)” 등은 한국교회 상황에서 일어나는 이교적이고 샤머니즘적인 기도에 관한 의식들이다.

 

그는 또한 신령한 자의 기도와 인간적인 의의 기도를 구분한다. 하나님 앞에 취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의나 인간적인 선으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적인 의를 추구해 나가는 생활이나 그런 행동 가운데서도 외형적으로 간절하고 충성스럽고 진실한 기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겉으로는 아무리 간절하고 충성스럽고 진실할지라도 인간적인 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잘못된 태도라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신령한 자의 기도가 되려면 성신의 거룩하신 역사를 좇아서 행하고 육신의 소욕을 버리려야 한다고 한다. 그는 인간적인 의의 요구나 혹은 선미의 요구에 의한 종교 행동으로서의 기도를 잘 분별해야 함을 강조점으로 내세운다.

 

그는 한국교회의 지나친 기도 강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도를 거의 만능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목적과 수단이 자리를 바꾸었다고 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더 암매하고 더 타락해 가는가에 대해 반문한다. 그는 기도 그 자체를 공로로 삼는 것은 이교적이고 공로적이고 비기독교적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보다는 기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경건한 생활의 열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정상적인 기도에 대해 언급하기를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요구되는 생리작용이 있듯이 기도라고 하는 것도 중생한 자의 새로운 생명이 “자연적인 요구”로 발생하는 것이지 “무슨 사업이나 종교의식”으로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새사람의 자연적인 요구”가 기도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도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나 특별 행사를 거부한다. 그것 자체가 종교적인 의식으로서 종교적 공리주의나 미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한국교회는 특별히 기도에 치중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신령하다거나 특별히 능력 있는 교회의 역할을 한 적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반문하기를 “3년 기도한다고 은혜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나?”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역사에 대한 자기 의무를 부담한 교회인가?” 라고 한다. 그가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목적이 없는 기도이다.

그의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다음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기도 가운데에는 허다하게 행복추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가 많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만 원래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지도 아니하고 그저 자기가 당면한 문제나 어려움을 면키 위해서,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의 현재 상태보다 좀 더 행복스러운 길을 찾을 욕심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 앞에 새사람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는 잘못된 요구를 제하고 정당한 필요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갈 길이 어떤 길이고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바로 생각하면 거기에 따라서 비로소 우리의 필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도로 구하는 내용은 그가 어떤 길을 가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기도에 대하여」에서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 책을 토대로 나름대로 요약을 해보면, 1. 자기를 부인하는 자세(행복주의 혹은 공리주의 부인); 2.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목적을 알려는 자세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달라는 자세; 3.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세; 4. 믿고 구하는 태도를 제시한다.

 

기도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관점은 다른 모든 영역에도 동일하다. 헌상이라든지, 예배라든지, 성경공부라든지, 성찬이라든지, 이런 요소들은 다 은혜의 방도와 관련이 있는데, 은혜의 방도에 대한 잘못된 취급에 대해 김홍전은 강하게 지적한다.그는 이런 비뚤어진 신앙을 물리치는데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는 것이 我想主義(아상주의)이다.

 

그는 다른 책에서도 비뚤어진 신앙에 대해 언급한다. 「교회에 대하여 4」, 제45강에서는 20세기 후반의 중요한 현상 중 하나로 말세학을 강조하는 부흥회로 들면서 이것이 가장 인기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착하게 사느냐를 이야기 하면 흥미 없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상태가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사람들은 “나는 내 자신의 생활 가운데 나타난 종교적인 복리와 정신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면 그만이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큰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성경공부조차도 지적인 만족, 수양, 자기 복을 위해, 즉 “자기를 중심 삼아서 맴도는 생각”에서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용주의, 공리주의, 행복주의이다. 그는 신앙적으로 공리주의 가운데 사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와 같다고 말한다.

 

「신앙의 자태 1」에서는 다중의 뇌동심리(雷同心理)가 공리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잘못된 신앙이 되는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자들이 복음의 큰 도리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세계의 대다수 기독교인이 뇌동심리에 의해 이끌리는 사람들이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우” 하고 이끌면 그리로 멋모르고 따라간다는 것이다. “목전의 가까운 이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지도자의 언설에는 귀를 기울이나 참으로 심오하게 계시를 가지고 가르치는 그것에는 귀를 기울이기 싫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진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대중을 꼬집고 있다. 세계의 기독교인 대다수가 이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세계의 잘못된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과 국제주의적인 교회 정치 운동의 간판을 내세우고 선동하면(에큐메니컬 운동) 그냥 그 뒤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뇌동심리도 언급한다. 한국의 과거는 정통적인 근본주의였다. 한국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가 그냥 정통적인 근본주의이니까 따라간 것이지 근본주의 신앙이 마음에 깊이 박혀서 따라간 것은 아니라고 한다. 뇌동심리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사분오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도리를 가지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공리주의가 그 마음을 주도하기 때문에 돈 많고 세력 있는 나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손을 내밀면 덥석 잡는다는 것이다.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공리주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주장을 하던 사람들도 이렇게 갈라졌고 앞으로도 계속 갈라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이것을 기독교 지도자들의 출세를 위한 일종의 탐욕이라고 말하고 있고, 다수는 모르고 따라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끌리는 대중”이 기독교 신앙을 그릇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데 늘 주된 역할을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공리주의 사상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한국에서는 처음에 전도할 때 “예수 믿고 천당 간다든지 복락을 얻고 잘산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면 신자들이 교회에 오래 다녀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크신 경륜의 사실을 이해할 날이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천당을 강조하게 되면 그 사람이 “천당 하나 가려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적 전도에 의해 차라리 그 이전보다 더 강하게 자기 복리가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르침의 순서를 언급하는데 믿고 천당 간다는 것부터 가르치지 말고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사실부터 이야기 하고, 하나님이 “왜 새로운 생명을 주셨는가, 왜 값없이 아무 조건 없이 그에게 주셨느냐,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먼저 깨닫게 하는 것이 구원의 도리를 바로 파악하게 하는 중요한 순서라는 것이다.

 

「신앙의 자태 1」에서도 공리주의식 전도의 위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리주의식 전도 방법의 두 가지를 소개한다. 먼저는, “마음에 괴로움을 덜고” 그다음은 “새로운 행복과 희망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버리면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에 나와서 생활하다가 “과거 자신의 신앙이 공리주의적인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고 “새로운 변혁이 생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 안에서 기독교를 건설해 나간다면 교회가 아무리 외형적으로 커간다 해도 그런 “종교 관념”을 벗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부여해 가면서도 사실상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자기식 종교를 형성해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또 같은 책에서는 공리주의가 신앙을 얼마나 강하게 막고 있는가를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 식, 주 때문에 불신앙의 자태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는 이런 공리적인 문제가 사람들에게 신앙의 기초적인 시금석이 된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참말로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진실성 있게 고백해도 일단 눈앞에 현실상의 문제가 각박히 임할 때, 하나님께 전부를 맡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지니게 된다. 이런 신앙은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신자의 현실에 늘 함께 하는 공리적인 문제가 신앙의 힘을 누르고 있다. 구원의 신앙으로서 중요한 자태는 자기의 공리적인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몇 가지 공리적인 조건에만 머물면서, 죄사함, 천국, 영생만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리의 힘을 이길 수 있는 한 가지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굳게 붙잡는 것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라면 뭐 이 세상에서 살 것 없이 믿는 즉시 천당으로 다 불러 가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바 크신 은혜와 특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고 밤낮 예수 믿는 도리의 기본적인 공리만을 좇습니다. ‘나는 믿고 천당 가요, 하나님이 죄를 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꾸 복을 주세요.’ 이렇게 밤낮 내편의 유리한 것만 생각하는 공리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유치한 생각인데 그런 속에서만 빙빙 돌고 있으니 심오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 이 세계와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경륜의 계획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쳐도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김홍전은 자신이 당시 목회하던 그 시대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 시각으로서 보았다. 그것은 배교적 현실과 증거를 상실한 교회, 그리고 잘못 변질된 신앙이다. 특히 그가 행한 구원의 도리에 대한 강설은 한국의 샤머니즘이 복음과 결탁한 요소와 또 기복신앙에 의해 가려졌던 잘못된 요소들을 밝혀 참다운 구원의 요소들을 드러내고 있어서 한국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는 그 시대 교회를 정확히 보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이 변질된 채 부흥회가 인도 되며, 교회가 얼마나 교회답지 못하게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의 구원의 도리가 얼마나 잘못되게 가르쳐지고 있는지를 보고 있었다. 비뚤어진 구원의 표지와 행복주의, 공리주의로 치닫는 구원과 특히 윤리와 도덕적 차원이 아닌 그 이상의 거룩성이 부재한 현실을 보고 있었다.

 

필자는 최덕성 교수의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에서 언급하고 있는 현대 교회의 비뚤어진 신앙의 모습들이 일제 강점기 친일파의 잘못된 신앙을 온전히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제 강점기에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신앙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냐면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가결한 자들은 참된 신앙이 부재한 자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에 그들이 한국교회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원론의 가장 큰 특징은 - 그들의 이론상 특징이 아니라 그들이 드러낸 실제 삶에서 - 자신의 행복주의와 공리주의를 위해 시대와 타협한 것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부터 잘못 설정된 구원론이 - 이론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잘못되었다고 증명된 - 계속 한국교회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고, 보이지 않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해방 후 진정한 공적 참회의 모습이 없다는 것은 구원에 관한 도리에 있어서 기초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회개 없이 성화는 없다. 참다운 구원의 도리를 가지는 것이 그 시대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비뚤어진 구원론은 계속 이어지게 마련이며, 그것은 교회를 흔들며, 사회의 악이며, 결국 배교에까지 이르게 한다. 일제 강점기를 보더라도 비뚤어진 구원의 도리를 가진 교회나 개인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으며, 얼마나 크게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병폐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구원론은 신자의 삶에 가장 밀접하고 중요한 도리이다. 이것은 한번 생각하고 끝나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이제 비뚤어진 구원론의 과거사 청산을 시작해보자.

   

제2장 구원론

 

“나는 오늘의 교회의 무능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이란 무엇인가」(21)

 

김홍전은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데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구원과 관련해서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현실과의 문제이다. 비뚤어진 구원론의 가장 큰 특징은 실생활에서 증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참다운 구원의 도리는 반드시 실생활에서 증명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거짓과 참이 그 열매로 드러나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점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참된 구원론의 부재이다. 한국교회는 구원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실증되고 실현되어야 하는지 성경대로 정확하게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 비뚤어진 구원론의 가장 큰 핵심은 구원에 관한 모든 서정에 인간의 자력이 개입되고 있으며, 구원받았다고 자처하는 모든 이들의 삶도 자력으로 치닫고 있는 경향이다. 인간의 공로사상이 여기서부터 나오기 시작하며, 권력욕, 명예욕, 물질욕이 이에서 시작된다. 이에서 교권주의, 잘못된 교회주의, 교회자본주의, 자본주의식 성장주의, 업적주의 등이 나온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윤리부재의 교회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교회가 칼빈주의 구원론을 표방한다고 해도 이론뿐이며, 실질상 자력 구원을 말하고 있다. 진정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식자들이 이런 점을 하루 이틀의 논의한 것이 아니다.

 

구원론의 부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며, 내가 이 땅에 왜 존재하며, 왜 있어야 하는지의 근본 이유의 부재로 이어진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구원의 의미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기초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치하 속에 많은 교회들이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애써 양심을 속이면서 주장하거나 합리화한 것은 그들이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구원론의 부재이다. 과연 구원이 무엇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실증되지 못한 현실 앞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서쪽으로 가고 있는 배 안에서 내가 아무리 동쪽으로 향해 뛴다고 해도 동쪽으로 가지 못하는 현실과 같다고 하겠다. 이것이 근본적인 것이다.

 

비뚤어진 구원론의 가장 큰 결과는 구원과 생활과의 관계에서 괴리가 생기는데서 시작된다. 구원받은 자가 사회에 빛이 되지 못하거나, 실상 일반 사회인들의 윤리나 도덕보다 더 이상적이지 못한 상태에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잘못된 구원론은 구원에 관한 앎이 구원받은 자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신행일치의 부재이다. 이것은 구원의 참다운 의미가 잘못 전달되었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의미를 모르거나 이다. 그러면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최낙재의 구원이해

 

사죄의 목적은 거룩한 생활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40)

 

최낙재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구원에 대해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구원이란 사죄를 전하는 것이며, 두 번째로, 구원이란 거룩하게 살도록 하여주는 것이며, 세 번째, 구원받은 무리는 하나가 되어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을 설명하면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은혜와 함께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하는 은혜는 구원의 내용 가운데 두 번째 오는 중요한 은혜라고 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변화된 생활이 없는 구원은 생각할 수 없으며, 영생에 이르는 것은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것이 곧 사죄라는 것이다. 그는 사죄의 개념에 의롭다하는 은혜(칭의의 은혜)와 거룩한 생활의 은혜(성화의 은혜)를 다 포함하고 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설명을 첫 번째 부분과 연결해서 설명을 하는데, 즉 구원이란 사죄를 전하는 것인데, 그 “사죄의 목적이 바로 거룩한 생활에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용서 받게 할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벗어나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선을 행하게 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사죄를 받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으며, 그는 “자연히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이를 행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복음을 전하며 사죄를 전할 때 그 개념이 너무나 빈약한 것을 봅니다. ‘사죄를 받으면 화를 면하고 죽음에서 구출 받는다. 그러므로 사죄를 받으라.’ 하는 데에 그치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또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생애를 살아야 할 일에 관해서는 별로 말하는 것이 없고 가르치는 것이 없습니다.”

“사죄를 받았는데 이런 삶(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없다면 그 사죄가 무슨 교화가 있습니까? 항상 죄를 짓고 회개한다 하고 또 그러고 또 그러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기가 사는 삶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한번 살펴볼 만합니다.”

 

최낙재는 위의 원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매우 “빈약한 개념의 사죄”를 전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면,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것과 그에 해당하는 삶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전하지만 그것이 삶으로서 증명이 되고 열매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전하는 데는 매우 빈약하다. 아상을 어떻게 하면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 대부분의 설교이다. 주님의 능력이 칭의 부분에만 강조되고 칭의의 삶을 실제화 시키시는 주님의 능력은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 김세윤의 구원이해

 

“새로운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런 윤리가 없는 믿음은 곧 거짓 의존이며 거짓 믿음입니다. 바로 미신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93)

 

김세윤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도 한국 그리스도인의 문제에 대해 특별히 지적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제”라고 하면서 바로 여기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윤리를 내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것이 한국교회의 문제가 아닌가?” 하고 말하고 있다. 믿음은 있다고 하나 윤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언급하기를 ‘하나님도 내가 이용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 바로 이것이 사람의 “꾀의 절정”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가장 큰 교만”이며, “하나님과 가장 크게 분리된 상태”라고 한다. 그러면서 계속 언급하기를 “그런데 순종이 없는 믿음, 새로운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런 윤리가 없는 믿음은 곧 거짓 의존이며 거짓 믿음입니다. 바로 미신입니다. 결국 순종이 없는 믿음, 윤리가 포함되지 않은 믿음, 이것이 곧 미신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결국 한국 교인들이 미신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는 제자도란 말이 한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것이 “믿음이 미신화된 가장 큰 증상”이라고 하고 있다.

 

김세윤의 한국 교회의 구원과 생활에 대한 진단은 정확하다. 한국교회의 믿음의 미신적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아예 없는 것이거나 잘못된 가르침으로 형성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진정한 구원론의 부재인 셈이다.

 

3. 김홍전의 복음이해

 

“믿어야 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신앙의 내용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종교적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그대로 구원의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48)

 

김홍전은 「복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는 오늘의 교회의 무능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런 상태는 복음의 능력이 너무나도 발휘되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 이유로서 ㄱ. 신자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의 빈곤 ㄴ. 몇 번이고 반복하여 힘 있게 전파되어야 할 복음이 실제로는 그렇게 전파되지 못하고 있음을 들고 있다. 즉 구원론의 부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신자들에게 복음이 즐거운 소식이 되어 마음에 울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한다. 그는 복음을 듣고 믿었다 해도 복음이 당연히 가져올 구원의 실증이 없다면 다시 바르게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구원에 관한 실증의 원리(자연스럽고 당연한 원리)이다.

 

1) 부정적인 표지

 

김홍전은 이 책에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 즉 구원에 대해 잘못된 구원의 표지에 대해 중요하게 언급한다. 다음과 같은 사항은 구원의 진정한 표지가 아니라고 한다.

① 정통신학이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

② 단지 종교적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

③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는 것이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이나 참구원의 보장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참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는 일 같은 것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 받을 것이 아니다.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이러한 일이 참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보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참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열매, 즉 없어서는 아니 될 결과가 이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참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세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결론이다. 주님의 말씀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 했다. 분명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자기들의 뜻과 자기들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신앙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구원의 신앙이 아닌 것을 구원의 신앙으로 알고 따라가는데 너무 익숙하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신앙의 척도를 삼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 신앙의 기준을 삼고, 얼마나 교회에 오래 다녔느냐 로 믿음의 여부를 측량하려 한다. 아상주의에서 나온 평가들이다. 그래서 김홍전은 이런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그러나 그가 신앙생활을 위하여 어떠한 물질적 희생을 지불하였다 할지라도 마음 속 깊이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자기의 정신적 쾌락과 위안을 얻으려 하는 생각이 부서지지 않는 한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를 박을 수가 없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자기 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열성만을 가지고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신앙의 자태 1」, 제4강에서 그는 구원의 표지에 대해 주의할만한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광야에서 넘어진 그들은 구원 받았는가?”라는 소제목 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 후 광야생활을 언급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 중에 늘 불평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는 신앙상태를 견지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신앙상태에 있어서 세 가지가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먼저, 그들에게는 신 개념이 아주 빈약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들을 왜 이곳으로 불러내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그들을 향해 어떤 거룩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지적인 요소의 빈약을 말한다. 그들은 지적인 신앙에 있어서 극빈하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서적 요소가 빈곤하다. 그래서 그들은 늘, 언제나, 항상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들의 원망은 2대까지 이어진다. 세 번째로 그들은 의지적 요소가 빈약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세 가지 요소를 들어 결론 내리기를 “이런 점으로 볼 때 그들에게는 구원의 신앙적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김홍전은 열 명의 정탐꾼들의 비신앙적인 보고를 듣고 불평하고 원망했던 그 사람들, 그래서 믿음이 없어서 광야에서 다 죽을 것이라고 예언 되었던 그 사람들을 구원 받은 자라고 말하기를 꺼려한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정당한 마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정당한 의지를 포함한 즉 지․정․의를 구원의 정당한 요소로 말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신앙」에서 책 전반에 걸쳐, 개혁주의 신앙의 원리를 따라 신앙에 대해 여러 가지를 언급한다. 역사신앙(historical faith) 현세신앙, 기적신앙, 구원의 신앙이 그것이다. 이것은 크게 바른 신앙과 헛된 신앙의 구분으로서, 앞에 있은 세 종류는 구원의 신앙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그는 「신앙의 자태 1」, 제4강에서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기적신앙(miraculous faith)이었고,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종결”이었다고 말한다. 왜냐면, 그들은 홍해를 가르는 주님의 기적을 체험했고, 지금까지 인도하며 많은 기적을 체험했지만 온전한 하나님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기에 구원의 신앙의 모습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의 신앙으로서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함”을 언급한다. 즉 어떠한 하나님이신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대하여 4」, 제53강에서는 말씀과 연관해서 구원의 신앙을 언급한다. “예수 믿는 도리를 용이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뭐라고 하시는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않는다면 뭘 가지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뭘 가지고 구원 받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들어야 할 것을 언급하는 가운데 한 말이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을 수 있느냐는 반문이다.

 

「목자와 양 1」, 제13강에서는 히브리서 6장 4-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과 구원의 신앙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구절은 알미니안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위해 흔히 잘 이용하는 구절이다. 그는 이 구절을 구원받은 사람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한번 비췸을 얻었거나 또한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거나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에게 속한 양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증거인가? 그는 언급하기를 확실한 주님의 양이라는 증거는 그가 목자의 말과 거짓 선지자의 말을 식별한다는 것이다. 즉 주의 말씀을 식별하는 것이 참으로 주님의 양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홍전은 인간을 향해 거룩한 뜻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불확실하거나 정서나 의지의 요소가 부족한 것, 또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말씀과 사이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 등을 부정적인 신앙의 표지로 언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 긍정적인 표지

 

그렇다면 참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표지는 무엇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부분들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로, “오직 예수님을 의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는 마태복음 7장 21-23절에 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는 그들을 바로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란 논지로 제시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믿고 의지하는 일이 참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다.”라고 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주여!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자기들의 행위를 의존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그런 태도들이 자신들의 천박한 종교적 감정이나 지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언급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움직여 보려던지, 자신의 천박한 종교적 감정이나 지식에 의하여 하나님을 해석하고 이를 하나님은 당연히 들어주시는 것으로 기대하고 강요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에 의한 것도 아니요 또 구원받은 증거도 되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이런 신자들을 각 방면에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는 말하기를 “실증할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이 수반되는 자각 있는 지식을 기초로 한 신앙이 참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요, 이것이 열매 있는 신앙이다. 그 외에는 모두가 헛된 신앙이다”라고 한다. 덧붙여 설명하기를 “역사상에 있던 예수님의 생애와 사업을 인정하고 또 스스로 그것을 남에게 가르쳤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을 가져오는 신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역사적 교리를 그대로 틀림없이 받아들여 지지하고 전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복음의 내용이 오늘 현재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않고 의의도 갖다 주지 않는다면 참 구원을 가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주 언급하는 구원받은 자가 드러내는 실증에 관한 원리이다. 그는 “실증의 원리”란 용어 자체는 사용하지 않지만 “구원받은 자로서의 실증”이라든지 “증거” 혹은 “증시” 라는 잦은 표현을 통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중생자의 생활」, 제1강에서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함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실질상 존재라는 사실은 나사렛 예수로 이 땅에 와 계신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현실적이고 실질적이라는 말로서, 조금이라도 가치가 덜하거나 실존성이 박약하거나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오셨을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계신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생생하게 인식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살아 계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시는데, 그것은 말로만 할 것이 아니고 그 분 자신이 나의 내부에서 명확하게 인식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김홍전은 그런 새사람이 있는 사람은 실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같은 책 제8강에서 “구원받은 자다운 생활은 안이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해 말하면서 구원이란 무상의 가치를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인데 그것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가졌다는 분명히 증거가 있다고 한다. 또 제10강, 전체에 걸쳐서 “자력이 아닌 성신의 역사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소원함”에 대해 언급한다. 김홍전은 새생명을 가진 중생자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앙의 상태, 그런 실증을 종종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소원으로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2:13)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성신께서 내 안에 역사하시면 무리하게 자기 의를 만들어 내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해야 할 것을 마땅히 하게 하면서 나아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중생자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상태라는 것이다. 즉 성신께서 소원을 두셨다면 실증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중생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소원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힘을 주셔서 실천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신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의 증거라는 것이다.

 

「목자와 양」, 제12강에서도 “양이 목자를 따라가고 있다는 현실적 증거”로서 한 명의 교인이 매일 매일 장성하고 거룩한 나라의 사실들을 깨닫고 점점 더 알아가는 것들이 “숨길 수 없이” 나오게 되며, “자기도 모르게 나타”나며,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 「구원의 신앙」, 제2강에서도 “그 생명은 하나님의 자식의 생명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자식다운 격을 구전하게 드러”낸다고 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면 구원받은 자는 그 자체 안에 실증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실증의 원리는 자연스러움이 그 특징이다.

 

세 번째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표지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로서 대신할 수 있다.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는 자기 생애에 일어난 중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실이요, 구원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되는 유일한 기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구원의 절대적인 보증을 이외의 다른 기적에서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중생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의식을 가진 자의 중생과 의식이 없는 자의 중생이다. 「그리스도 안의 유아」, 제7강에서 그는 말하기를 믿음의 고백이 반드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식물인간이나 고백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일 경우를 예로 든다. 이들은 믿음의 고백이 없을지라도 만약 하나님께서 중생하고자 하신다면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마저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누구를 구원하시고자 할 때 그 사람의 조건 여하를 막론하고 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신 것을 강조하며,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대권임을 말하고 있다.

 

「구원의 신앙」, 제5강에서도 중생의 요건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한다. 어린아이에 대한(의식이 아직 불분명한) 것과 의식이 분명한 사람에 대해서 이다. 여기서도 그는 어린아이가 복음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에게 복음이 전달될 때는 그 복음에 의한 어떤 작용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언급하기를 의식 활동이 있다가 지금 의식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반드시 구원 못 받았다고 단정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하나님의 사랑의 거룩한 뜻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대하여 4」, 제49강에서도 “의식이 없는 자의 중생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의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놓기 때문이다.” 중생에 대해 김홍전은 사람의 의사 여하에 관계없이, 사람의 상태 여하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독단의 대권을 가지고 만세전에 선택하신 그 사람을 적시에 불러내실 수 있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 그는 중생이 “개과천선해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중생에 대한 오해로서 도덕적 생활을 다 고쳐서 좋은 사람이 되어서 예수 믿을 수 있다는 발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의 부도덕과 연약과 결핍과 죄악을 초월해서 강력한 것이다.” “건질 사람은 누구든지 건진다. 이것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는 설명한다.

 

네 번째로, 그는 참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는 지식의 정도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 지식의 정도는 정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은 조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확실한 구원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은 칼빈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칼빈도 믿음은 지식에 근거를 둔다고 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믿음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기독교 강요. Ⅲ.ⅱ.1-2). 긍휼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믿음이라고 했다(기독교 강요. Ⅲ.ⅱ.7). 확고한 지식은 그가 구원을 가지기에 충분한 지식을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2장에서는 참다운 구원론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참다운 구원론의 부재는 삶에서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결과를 내며, 그것의 이유로는 참다운 구원의 의미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는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참다운 구원의 의미를 안다고 해서 바로 삶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단지 아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삶까지 연관되어야 한다. 그런데 삶까지 연관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다음은 이런 점들을 논의해보자.

 

제3장 아상론(我想論)

 

1. 근본적인 변화

 

“문제는 그 사람들의 본질이 개조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자태 1」(316)

 

근본적인 변화는 제도나 외형의 변화가 우선이 아니다. 타락, 배교, 탐욕, 부정부패, 도덕적 결핍 등 근본적인 원인은 제도의 부재가 아니다. 교회의 부재도 아니며 말씀의 부재도 아니며 바로 인간 자체에 있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서 나온다. 변화되지 못한 본성, 새롭게 되지 못한 인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독교 모습은 있지만, 진정한 기독교는 없고, 성직자의 모습은 있지만 진정한 성직자는 없는 이유는 옛사람(아상)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변화는 참된 중생의 능력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진정한 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 중생의 효과로 살아가는 길뿐,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 뿐, 아상을 탈피하는 것뿐인 것이다. 이것은 신앙론에서 나온다.

 

김홍전은 사람의 본질이 먼저 개조되어야 함을 언급한다. 그는 개혁의 실질을 말한다.

 

“개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첫째 도덕적으로 저급한 심상과 또 지혜에 있어서 암매한 심상을 고쳐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고쳐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제도, 곧 외부적인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저급한 심상을 두드려 고치려면, 여호와의 법이 엄연히 있으므로 그 법에 비추어 살면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삶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모습이 보이지 않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반대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믿는다는 말은 아직까지는 그에게 거짓인 셈이다. 그 믿음이 아직 실상이 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믿음이 실상이 되기 위해서 근본적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의 심상이 변화되기 위한 실제적 기초로서 살펴보아야 할 주제는 김홍전의 아상에 관한 개념이다. 김홍전이 추구하는 신령한 생활은 한마디로 아상(我想)을 탈피하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아상주의(我想主義)의 실체 : 아상과 신앙

 

“성경이 경전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려면, 반드시 없어져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홀(自惚)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것을 아상(我想)이라는 말로 자주 쓰고 있습니다.” 「사사기 소고 1」(72)

 

“예수 믿는 사람이 참으로 구원 받고 구원의 신앙을 가졌으면 ‘자기’라는 것이 없어지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없어졌다는 것이 구원의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구원의 신앙」(106)

 

김홍전은 신앙과 연관해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상주의이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중생하고 신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참다운 중생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가장 포괄적인 이유로서 아상주의를 들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옛사람을 따르는 삶을 말한다. Self Complex라고도 언급한다. 이것은 이교적 신앙, 종교적 신앙, 공리주의적 신앙, 행복주의적 신앙의 뿌리이며, 위선, 가식, 육신적인 모든 것의 원인이다. 그런 것들이 한마디로 아상이다.

 

「사사기 소고 1」, 제2강에서는 “능히 좋은 교회로 잘 발전하려면 기본적으로 꼭 없어져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상이 없어져야 합니다.” 라고 말한다. 「교회에 대하여 4」, 제48강에서는 배교의 원인으로서 아상을 말하며, 제55강에서는 교회의 속화가 아상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 제5강에서는 성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비뚤어진 아상을 탈피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기도에 대하여」, 재8강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이 기도응답 그 자체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상 때문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는 주님의 뜻을 모르고 자신이 기도한 데로만 응답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기도는 비록 그것이 “간절하고 대단히 종교적일지라도” 그것 자체만을 집착한다면 그것은 아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때때로 기도 응답을 늦게 주시는 이유는 기도가 인간의 “자기 아상이나 아만(我慢)에서, 즉 옛사람의 종교적인 요구나 옛사람의 선미(善美)를 지향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즉시 주시기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책 제9강에서는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아상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렇게, 김홍전은 아상이라고 하는 것을 신앙의 가장 큰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아상탈피는 종교적 생활을 버리는 것이고, 공리주의를 벗어버리는 것이고 자기 욕심, 옛사람을 벗는 삶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종교로 만드는 것이 아상이다. 기독교는 삶이고 실제이다. 개혁주의는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삶이자 실제이다. 개혁주의는 인격적인 주님과의 매일의 교제이다. 그 가운데 내가 매일 더 개혁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라 할 때 주님과 진정한 교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교제 안에는 반드시 매일의 생활의 개혁을 포함하고 있다. 김홍전은 이교적인 종교 감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많이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아상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의 특이한 민족성과 강하게 결합한 나머지 기복주의를 만들고 윤리부재의 삶을 만든다.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가리며, 복음의 능력을 멸시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아상이 다 막고 있는 것이다.

 

김홍전은 아상을 탈피하는 것과 관련해서 특이하게 강조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관련해서이다. 「그리스도안의 유아」에서 보면, 그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 먼저 육에 속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불신자로서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다. 나름대로의 선을 행하기도 하고 문화, 예술 등 진선미를 추구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육신적인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으로서 단지 성신의 온전한 인도하심 가운데 거하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꼭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며, 육신에 속하여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한다. 책의 제목인 「그리스도 안의 유아」에서 “유아”란 바로 어린아이, 즉 육신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3:1의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에 대한 언급이다. 이들은 공리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늘 어린아이처럼 제자리를 맴돌며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세 번째로, 신령한 사람으로서 그는 온전히 성신의 인도하심 가운에 거하는 사람을 말한다.

 

김홍전이 생각하는 육적인 사람은, 특별히 악하거나 윤리 도덕적으로 크게 결함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별 이상 없고 보통 사람과 같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는 이런 사람을 아상에 잡힌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지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는 선한 의지가 아니라 자기의 아상에 사로잡힌 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하겠다고 하는 그 의지마저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의 의의 반대는 인간의 불의가 아니라 인간의 의다. 인간의 불의는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더 드러낸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는 것은 인간의 자기 의이다.

 

김홍전은 인간의 선한 의지조차도 버려야 한다는 입장을, 시험과 연관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 이 책은 마태복음 6장을 강설하는 가운데 주로 주기도문을 강설한 책인데, 제17강,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제목에서, “선의와 미덕의 형태로 찾아오는 시험”에 대해 소개한다. 그는 시험의 형태는 많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러지 않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사랑하고 남을 돕고 남을 위하여 봉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시험이 되는 때가 많이 있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라고 한다. 악을 행하라고 것만 시험이 아니고 선을 행하는 것도 시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정이 많고 남에 대해서 동정심이 많은 사람은 사단이 그 동정심을 이용해서 시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정당한 목적지를 향해 바로 걸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미덕이나 선일지라도 시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아상이 나쁜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모습으로도 나타남을 말해준다.

 

이런 부분에 대해 「그리스도 안의 유아」, 제2강에서는 본질적인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그는 언급하기를 “인간성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육신의 요구란 결국 성신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육신의 욕망이라는 것은 선덕도 있고 악덕도 있다”고 하면서 “어떤 선덕과 선한 이론과 이상”이라는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선한 의욕만 있으면 그것 가지고 주님을 위한다, 교회를 위한다 하는 것은 분별이 없는 신앙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센티멘털한 심정이 불신자에게 타당할지모르지만 신자에게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선을 향한 욕망이 자기에게서 나올 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느끼고 성신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덮어놓고 내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당위가 아니다. 이것이 아상주의이다. 선이라도 자기의 아상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의지와도 관련이 있으며, 공리주의, 미신적인 종교 등 특히 한국적 샤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 제1강에서 구원의 신앙을 이렇게 정의한다.

 

“구원의 신앙이란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고 자기 일생의 길을 주께 다 맡기고서 지금까지 자기가 구상하고 계획하고 경영하던 것을 일단 다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시작하느냐 하면 자기를 완전히 드리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와서도 자기를 드리기 꺼린다면 그것은 자기의 공리적인 요구에 무엇을 덧붙이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믿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새 생명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환연히 깨어난 자태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세상의 종교와 기독교가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예수를 믿고도 아직 자기를 주님 앞에 전부 드렸다는 정신과 자세를 갖기를 꺼리고 적당히 자기를 수양하는 의미로, 그렇지 아니하면 좀 더 지적인 것이나 좀 더 앞선 어떤 것을 얻어 보려고 하는 자기의 이익에 대한 고려가 늘 앞서 나간다면 그것은 공리종교이지 참된 기독교는 아닙니다.”

 

여기서 자기를 수양하는 의미로 섬긴다든지 자기의 이익에 대한 생각이 늘 앞서간다든지 하는 것은 다 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는 구원받은 자의 도덕적인 삶과 아상과 관련해서 말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계획에 맞는 생활”이란 소제목 하에서 한 개인의 도덕적인 생활과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따르는 삶을 비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이 땅에 두시는 이유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사는 것에만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참으로 그가 구원함을 받고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나라의 계획 가운데 들어간 사람이라면 한마디로 그 나라의 계획에 맞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한다. 이 말은 구원의 신앙이라는 것은 단지 자신의 도덕적 성취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경륜에 따라 살아가고 있느냐를 더 중점을 둔 것이다. 그것은 아상을 버려야 가능하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자기를 수양하고 개발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목적이 불분명하면 이것은 자기의 공리적인 종교적 욕구일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상관은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끊임없이 나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런 나까지라도 포기하는 것이다. 전적 포기.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전적인 포기가 필요하다. 자기의 전적인 포기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옛사람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옛사람은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죄의 문제 해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4. 아상주의 탈피론

 

1. 아상 죽이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는 멸하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유아」(52)

 

김홍전의 죄의 사유에 관해 중요한 요점은 죄사유함의 효력발생이다. 이것은 믿음과 연관되며 구원받은 신자의 삶의 생활과 바로 직결된다. 구원은 옛사람이 죽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 할 수 없다. 만약 옛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새로운 생명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김홍전의 십자가의 죄사유함에 대해 고려할 점은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공로가 현실 속에 어떻게 효력을 발생하는가이다. 한 예로, 그는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생각하는 데서, 즉 그런 믿음이 없는 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증명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의 유아」, 제5장은 죄의 형벌과 죄의 세력의 강력함, 그리고 우리가 그런 가운데서 해방된 것과 그것의 현실적인 효력에 대해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먼저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타락하는 이유에 대한 언급한다. 선에 대한 의지와 죄의 세력에 대한 그의 통찰은 탁월하다고 하겠다. 그는 언급하기를 인간 안에 죄가 있기 때문에 “선을 향한 자연스런 욕망에서 나오는 것들조차 결코 온전하거나 순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있을지라도 죄의 큰 세력이 그 보다 더 강한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자태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부패와 거짓이 뒤섞이게 된다. 다시 말하면 “결국 항상 부패와 추악과 거짓과 잘못이 뒤섞여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전한 선이 아니”란 것이다. 그는 죄의 세력이 강력하다는 것에 대해 또 언급하는데, 죄의 세력이 우리 속에 뻗으려고 할 때 포장된 선으로 가장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죄의 세력이) 가급적 저항과 마찰을 작게 하려고 그가 가지고 있는 의와 선과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고 꾀는 것”이라고 한다. 죄의 세력이 신자를 지배할 때 처음부터 “나는 죄다” 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 사람 속에 는 그래도 선에 대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항을 줄이기 위해 선이나 의로 포장된 죄가 마음에 슬며시 들어온다. 그래서 “(죄의 세력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참 도리 안에서 살고자 할 때 항상 인간적인 선의 요구, 미에 대한 요구, 진리 탐구의 요구, 의에 대한 요구를 가지고 사람을 꾀어 나간다”고 말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사람이 선을 행하는 도중이라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세력이 스며들어 어느덧 그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속죄의 은혜와 그 현실적인 작용에 대해 설명한다. 기존의 많은 경우 속죄에 대해서 말할 때, 속죄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김홍전의 속죄의 교리는 현실성이 있고, 실제적인 것이 그 특징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현실의 현저한 결과란 무엇인가?”의 답으로 첫째, 예수님의 공로로 먼저는 형벌이 면제되었고, 둘째, 나를 지배하는 무서운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러면 이 법은 어떻게 적용되고 운용됩니까?” 라고 하면서 실제와 현실의 문제로 나아간다. 그는 믿어야 할 것을 말하는데, “이런 사실을 믿고 의지하고 성신을 좇아 행할 때 적용”된다고 하고 있다. 그래야만 “자기의 욕망을 행하려고 하고 자기 이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신앙이란 지금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미래에 내가 죄의 형벌을 면제 받았다 하는 것을 따지기보다는 지금 현재 구원의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고 어떠한 능력을 베푸시는지를 자신이 경험함으로써 아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속죄의 경험으로 증험한다.

 

“그렇다면 그런 경험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죄사유와 죄의 세력에 대한 현실적 적용에 대한 그의 질문이다. 그는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무서운 진노를 내리실 때 같은 어려움이라도 불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진노이지만 신자에게는 그것이 사랑의 징계라는 것이다. 이것이 죄사유와 죄책의 면제에서 현실적으로 신자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만약 ‘미움’이 나를 지배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에 대한 믿음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공로에 다시 신뢰하고 붙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현실적인 작용, 현실적인 역사라는 것을 우리가 신뢰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는 말 한마디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움의 마음을 회복해서 자유하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성신을 쫓아 행하는 것으로 연결해 나간다.

 

그는 결론적으로 설명하기를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데서 생기는데, 이것이 곧 아상이며 옛사람이다. 곧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서 나를 지배한다면 이것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수정과 같이 맑은 심상”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죄의 큰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을 받는 생활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막는 것은 “나의 선(善)”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주신 마음이 아닌 그냥 이 세상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살면 언제든지 무너지고 만다. 신자에게는 단지 도덕적인 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운 품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을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열정으로 종교를 행하고, 아상이 담긴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다고 한다.

 

「중생자의 생활」, 제4강에도 김홍전은 앞선 논의를 언급한다. 그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도덕적 개과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임을 강조하면서 중생한 사람이 죄를 범하는 이유는 성신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생자의 가장 중요한 도리는 단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과 그 공효가 실제 역사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홀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 안에서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그 십자가의 공효가 나를 둘러싸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나의 죄 값을 치른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죄의 권세, 죄의 지배력이 다시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와 역사가 또한 거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지 아니하면 특별한 은혜를 받을 수 없고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는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실을 실지로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여기서 죄를 ㄱ.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거룩 법에 미치지 못한 것. ㄴ. 우리의 마음자리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마음자리에 이르지 못한 것. ㄷ. 그런 것들을 일으키는 본질이 우리 속에 있어서 나를 잡아끌고 가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그런고로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하게 하려면 ....... 죄가 주관치 못하게 하는 공효도 내가 온전히 몸에 입어야 합니다.”라고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완전한 구원의 사실이 죄 값을 치른 것과 죄가 주관치 못하는 공효까지 말한다(롬6:14).

 

그래서 자기의 옛사람, 자기 속에서 죄를 짓게 하는 옛날의 모든 기능이나 감정이나 움직임을 자기가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신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죄에서 해방된 사실을 실질적으로 체득해야 한다. 지옥의 형벌을 면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고, 또 죄의 권세에서 나를 벗어나게 했다는 것도 체득할 수 있다. 체득하려면, 성신의 법이 나를 해방했다는 말씀을 믿고 성신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는 “오직 성신님만을 의지함” 소제목 하에 언급하기를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인정하는 심정이 생길지라도 그 때마다 주저하고 성신님께 의지”해야 한다고 하며, “나를 주장하심으로 내가 인간의 힘으로 이 선을 행하려고 하지 않게 하시고, 인간의 힘으로 이 불의를 이겨보려고 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직 성신님이 나를 주장하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온전히 해방하신 큰 사실을 여기서 다시 체험해 나가게 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순결한 심정의 상태”란 “자기가 무엇을 한다는 의식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붙어 다니지 아니해야”하는 상태를 말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 하는 동안에는 아직도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고 언급한다.

 

「교회에 대하여 4」, 제50강에서, 중생한 사람은 “과거와는 달리 가장 근원적인 생명의 에너지가 이번에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인 까닭에 영혼의 기능도 전에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육신적인 지(知)는 말씀을 아는 지식(知識)으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육신적인 정(情)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감정(感情)으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육신적인 의(意)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의지(意志)로 그 속에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생의 효력으로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죽은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가능하다.

 

한국교회의 구원과 관련하여 참된 생활이 부재하다. 그것은 죄의 세력을 이기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현실상 성신을 통해 적용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죄의 사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은 나의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으로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가 다 사함 받고, 미래에 있는 죄의 형벌인 심판과 사망에서 면제받는다. 또 하나는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은 죄의 현실부터의 해방이다. 우리는 구원받았고 중생했다. 그러나 곧바로 하늘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신다. 죄의 세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세상에 말이다. 이 땅에서 완벽하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김홍전은 「신앙의 도리」, 제5강에서,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나에게 현실상 늘 증명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항상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옛사람이 죽은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는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요소에 잘못된 가르침이 있어 왔다. 물론 전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온전한 믿음의 도리에 거하는 것이 온전한 구원의 도리이다.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중세 개혁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발견이었다.

 

2. 하늘에서 내린 믿음으로 가능

 

“믿음이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신앙」(35)

 

1) 칼빈의 믿음

 

칼빈은 그래서 자신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믿음의 문제에 대해 제3권에 언급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강조점은 믿음은 성신의 주된 역사라는 점, 믿음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점, 그리고 그 지식은 말씀에 근거를 둔다는 점이다.(기독교강요, Ⅲ.ⅰ-ⅱ)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2장에서 믿음의 성격을 밝히는 이유를 몇 가지 설명한다. 먼저, 사람들이 믿음을 단지 생각(opinion)이나 신념(persuasion) 같은 것으로 이해한 점이다. 칼빈은 이런 것으로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없기에 믿음이 생각이나 신념이 아님을 밝힌다고 했다. 또한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사람들이 위험스럽게 현혹되고 있기 때문이며, 다음으로 믿음이 단지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깊게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칼빈은 당시 이신칭의라는 말에서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믿음의 진정한 성격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그는 기독교강요 3권 2장 8절에서 유형의 믿음(formed faith: 사랑을 행하는 믿음)과 무형의 믿음(unformed faith:사랑의 행위가 없는 믿음)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면서 믿음이면 하나이지 왜 사랑이 있는 믿음과 사랑이 없는 믿음이 무슨 구분이냐면서 구분 자체를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런 믿음에 대한 구분을 배격해야한다고 한다. 이런 구분이 그들은 믿음을 하나의 지적인 동의(assent)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도 성경의 제시된 것을 받을 수 있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의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닌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논증해 나간다. 즉, 칼빈은 당시 믿음에 대해 잘못 사용되고,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 변증했다.

 

믿음에 대해 다시 개혁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에 근거한 믿음으로, 오직 성신의 역사로 가능한 믿음으로 말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성령의 주된 역사는 바로 믿음이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표현하는 일상적인 용어들은 대개의 경우 믿음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그가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Ⅲ. ⅱ. 4) 오직 믿음으로만 복음의 빛에 들어갈 수 있다. 잘못된 믿음은 잘못된 복음으로 인도한다.

칼빈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믿음은 우리를 향해 베푸신 자비하심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며, 또한 성신에 의해 우리의 정신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 쳐졌다.”(기독교강요. Ⅲ. ⅱ. 7) 여기서 보면, 칼빈은 믿음을 지식 혹은 앎으로 본다. 이것은 느낌이라든지 감정에 의존하지 않는 정의이다. 여기서 세 가지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는 믿음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믿음의 근거라는 것이며 세 번째로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방식으로서 성신의 역사, 결국은 성신님의 주된 사역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두 번째 부분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더 좋은 통찰력을 제공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도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이 사람의 마음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믿음은 하늘에서 내려와야 만 한다.

 

2) 김홍전의 믿음

 

믿음은 가장 본질적으로 구원의 사실이 거기 있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신앙의 도리」에서 김홍전은 성경에 나오는 믿는다는 말이 다 구원의 신앙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란 의미로 ‘구원의 신앙’이란 말을 사용한다.

 

ㄱ) 믿음- 구원의 증거

 

그는 「구원의 신앙」, 제1강에서 “구원의 증거로서의 믿음”을 설명한다.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구원의 사실이 거기 있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믿음이란 “믿음이 네게 있으니까 그것을 자본 삼아서 구원을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유1:3) “그것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다. 신자에게는 “구원의 사실과 동시에 그의 영혼의 기능 가운데 믿음이라는 중요한 현상이 벌써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믿으면’ 이라는 말은 이 조건이 구비한 것으로 인하여, 그것을 대가로 해서 너에게 구원이 온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믿으면 거기 구원의 사실이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볼 때, 우리는 믿음이란 구원의 사실이 거기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내용이며, 우리 영혼의 기능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심겨주신 믿음이라는 중요한 한 현상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사실들은 확인하고 확신하게 됨을 알게 된다.

 

ㄴ) 믿음- 위로부터 오는 것, 자녀다운 마음의 구체적인 표시, 말씀에 대한 신뢰

 

「구원의 신앙」, 제2강에서, 믿음과 중생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중생 전에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억지로 “믿어보려고 애를 써”서 믿는 것도 아니다. 또한 “철학적 사색이 믿음을 대체할 수” 없다. “믿음이란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로부터 온 “믿음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서 역사하여 생명으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생명이 하나님의 자식의 생명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자식다운 격을”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자녀다운 격을 어떻게 드러낼까? 말씀의 순종으로 드러낸다. “하나님의 자식다운 영혼의 활동 속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고 의지하는 기능”이 그 안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생하게 하시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의 성향은 늘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가려는 “필연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시작한다. 김홍전은 이 시작점까지를 중생에 포함시킨다. 그러므로 중생한 신자는 필연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영혼의 기능으로 인해 늘 하나님의 향해 서있으며, 그로 인해 자녀다운 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성신을 의지해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식다운 생활의 행보를 하는 것이 성화의 생활”이라고 한다.

 

“믿음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자식다운 마음 상태의 구체적인 표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이므로 필연적으로 말씀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나에게 요구하고 규제하고 명령하는 것을 따르게 됩니다.”

 

ㄷ) 믿음- 구원의 실질에 관한 표시

 

「구원의 신앙」, 제4강에서는 “믿음은 구원의 실질이 우리 안에 왔다는 것을 표시”하는 말이며 “구원의 확실한 사실은 그 사람의 믿음이라는 전체적인 상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구원이 그 사람에게 임하게 되면 그는 그것을 아는 표시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의 실질을 베푸실 때, 그 표시로서 내 마음에 믿음을 주신다.

 

ㄹ) 믿음- 구원을 확실히 승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씨

 

「구원의 신앙」, 제5강에서는 “구원이라는 사실이 단번에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동시에 성도에게 믿음이 심긴 것”이라고 한다. “믿음의 씨(semem fidei)”가 심기었는데, 이것은 “확실히 승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말한다. 씨가 심기운 자는 장성한다. 그러나 구원받기 전에 들어가서 믿음의 씨가 점점 자라는 식의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ㅁ) 믿음- 거룩한 방법

 

또 다른 책에서도 김홍전은 믿음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스도 안의 유아」, 제6강에서는 “사람이 믿음에 대한 대가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며, 사람은 “다만 그것을 하나님이 내신 법칙으로 받을 뿐”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역사하셔서, “믿음이라는 큰 능력이 그 속에서 발동되고 작용하여 알아듣게” 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믿음이 “나타남으로 확실한 인식을 가지고 ‘과연 그렇다’ 하고 승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책, 제7강에서는 “거룩한 방법”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사람이 “속죄함 받은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실과 그의 속죄의 사실을 알게 하시는 거룩한 방법으로 그에게 믿음을 주”신다. 고로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믿음으로 속죄에 대하여 확신하게” 된다. 억지로 믿는다고 말로 자꾸 반복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이 와야 합니다.”여기서 보면,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법칙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ㅂ) 믿음- 거룩한 목적과 뜻이 있을 때 비로소 작용하는 것

 

김홍전은 믿음을 인생의 삶과 목적에 관련해서 중요하게 언급한다. 「기도에 대하여」, 제9강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목적이 먼저 오고,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정당한 위치에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이 우리 안에 작용”한다고 한다. “믿음이란 항상 기도의 목적이라든지 동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능력이 이 땅위에서 증시되어 나가는데 내가 그릇으로 쓰이기 위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신앙의 자태 1」, 제7강에서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했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내신 거룩하신 계획과 목적을 아는 믿음이라고 역설한다.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건져 내셨느냐 하는 것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는 구원의 믿음에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첫 단계는 구속의 도리를 아는 믿음이고 다음은 구속의 이유를 아는 믿음이다. 그러면서 언급하기를 “그것(구속의 이유)은 모르고 하나님은 나를 건져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 하면 그것이 구원의 믿음인지 또는 소위 정통교리를 그냥 받아 가지고 그것만 밤낮 외고 있는 그런 믿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그는 믿음과 사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기독교인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이미 배포되어 있는 사실을 보이는 역사의 세계 위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입니다........ 보지 못하는 세계에 하나님께서 이미 구상해 놓으신 것을 보는 역사의 세계에서,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니까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믿음을 가져야 내가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갖는다 하는 것은 내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비치되어 있는 사실이 믿음이라는 형식으로 내게 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은혜의 방도를 통해서 그 비치되어 있는 사실이 내게 오면 이 비치된 사실이 역사의 과정 위에서 실현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는 것은 먼저 하늘의 뜻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한 것이듯이 하늘에서 먼저 나를 향한 사명이 있고 거룩한 뜻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셔서 알게 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란 거룩한 뜻이 먼저 있고 난 후 인간의 영혼에 작용하는 것이다.

 

“바른 신앙의 자세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상당히 관대하고 훌륭한 품성을 나타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의 일생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계획과 경륜의 내포 안에서 분명한 목적을 향해서 진행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종교의 자세는 될지언정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란 먼저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신 본래의 거룩한 목적과 거룩한 경영의 테두리 안에 있는 동안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ㅅ) 믿음- 존재하고 실현될 것에 대한 증거

 

「신앙의 자태 1」, 제8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시인함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시니까 내가 승인하게끔 되는 것이고, 그 승인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과 연관한 신앙이 내 속에 있는 까닭에 승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백히 파악해야 할 사실은 실재의 세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 존재의 사실을 나에게 신앙이라는 형태로 알려주고 그 신앙이라는 상태가 내 안에 있을 때 나는 그 사실을 시인하는 심리적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존재가 먼저 있기에 우리가 그것은 승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승인하기 전에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된 믿음이 먼저 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분의 존재를 승인하게 된다.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에 대한 승인은 그 신앙이 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서 “믿음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알게 하신다. 그래서 그 “신앙이 그것이 존재하고 실현될 것을 증거”하게 된다. 여기서 믿음이란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ㅇ) 믿음- 인간의 암매한 본성을 뚫는 힘

 

김홍전은 믿음에 대해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여분으로 전해준다. 그는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무신론자는 자신이 유신론의 논리에 굴복해도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논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부패한 인간 본성 그 자체가 암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이 오직 하늘에서 와야만 하는 이유와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인간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본성 그 자체가 암매하기 때문에 그 이유가 논리를 가지고 있고 타당하고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해도 믿음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상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믿음은 그것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린 하늘에서 내린 믿음이 인간의 타락하고 암매한 본성을 깨뜨리고 아상을 부서뜨려서 한줄기 강한 빛으로 그 심령 속에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김홍전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요약해보면, 구원의 증거로서 믿음, 하늘에서부터 오는 것으로서의 믿음, 자녀다운 마음의 구체적인 표시로서의 믿음, 말씀에 대한 신뢰로서의 믿음, 구원의 실질을 표시하는 것으로서의 믿음, 구원을 확실히 승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씨로서의 믿음,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으로서의 믿음, 거룩한 목적과 뜻이 있을 때 비로소 작용하는 것으로서의 믿음, 존재하고 실현될 것으로서의 믿음, 그리고 인간의 암매한 본성을 뚫는 힘으로서의 믿음이다. 가만히 보면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인 것을 보게 된다. 구원이라든지 구원의 실질이라든지, 거룩한 뜻과 목적, 존재하고 실현될 것, 등은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다. 김홍전에게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에 관한 하늘로부터의 증거, 신뢰, 표시, 거룩한 방법, 기본적인 씨, 작용, 존재, 실현, 힘을 말한다.

 

믿음은 하나의 인간적인 조건이 될 수 없다. 선물이기에 조건이 될 수 없다. 수단은 된다. 그것도 성신님께서 우리를 위해 발생시키시는 거룩한 수단이지 우리가 발생하는 육신적인 수단이 아니다. 믿음은 순수한 성신님의 역사이며, 거룩한 선물이다. 인간의 어두운 아상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믿음은 하늘에서 내린 믿음이라야 한다. 배교를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은 성신의 역사하신 믿음이다. 순교자의 믿음은 땅에서 온 믿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 믿음이다.

 

주님께서는 왜 믿음을 주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알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알고 받아들이게 된다. 하늘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마음 가운데 부어진 증거, 표시, 거룩한 방법, 씨, 작용, 실현, 힘으로 인해 우리는 알고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우리는 하늘에서 내린 증거, 표시, 작용 등이 있어야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들을 알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며 사명을 감당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의롭다 칭한다는 그 효력이 나에게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의미이다. 그래서 믿음은 구원이 거기 있음을 알고 받아들이는데 먼저 필요하고 그 후에 주님께서는 구원의 효력을 우리에게 발생시키시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구원의 사실을 알고 받아들일 때, 그 다음 구원의 효력이 발생한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의 사실을 알고 받아들일 때, 그 다음 칭의의 효력이 발생한다. 믿음은 가장 본질적으로 구원의 사실이 거기 있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3) 믿음의 실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고 실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 중에서)

 

2004년 10월 6일, 12:00, 고려신학대학원, 대강당에서 경건회 시간에 변종길 교수의 이신칭의에 대한 말씀이 있었다. 서두에 한국교회, 개신교 그것도 보수교단에 속한 몇몇 교수들 사이에 천주교처럼 이신행칭의(二信行稱義)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신행칭의가 나온 이유로서 세 가지를 언급했다. 먼저는 한국교회가 행함에 대한 강조가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다 신학적인 이유인데 샌더스의 신학이 등장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신자 개인의 신앙이 크게 약화되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로 그는 세 번째를 지목했다.

 

개인 신앙이 약화되었다는 것 때문에 이신행칭의가 나왔다는 것은 심각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개인 신앙이 약화되었다면 올바른 말씀으로 고쳐나가야 한다. 그러나 말씀을 바꾸면서 신앙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진리를 투표해서 결정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언가 어두움에 단단히 사로잡힌 것이다. 이신행칭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개인 신앙의 약화 때문에 개인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편을 사용하겠다는 것은 다시 선한 모습으로 즉 광명의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온 사단의 전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변종길 교수는 이신행칭의 교리가 나오게 되는 배경을 설명한 후 참된 이신칭의의 의미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로, 이신칭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며, 행위로 의롭다함 받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로 이신칭의는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는 믿음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한 형편이다. 말로는 이신칭의를 외치며 교회성장의 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정작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고 있다. 믿음이 주인공인지 하나님의 주권이 주인공인지 구분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주인공인지 내 마음 가운데 믿는다는 그 생각이 주인공인지 모른다. 그들은 흔히 말한다. “믿기만 하면 된다.” 이 표어는 “오직 믿음”이 한국적으로 토착화된 구호이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믿음은 한마디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칼빈은 믿음은 오직 성신의 주된 역사라고 했다. 믿음은 하늘에서 와야 한다. 그러나 믿음이 인간에게서 나오면 교회는 부패하고 배교를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앞서 김홍전이 언급하는 바, 죄가 교회에 들어올 때 “나는 죄다”라고 하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한 의지를 통해 교묘히 들어오기 때문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미신적 혹은 주술적 믿음이다. 대부분의 이신칭의가 대가로서의 믿음의 개념에 머무른다. 구원은 믿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이 주어지는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있다. 즉 조건인 것과 수단적인 의미의 혼동이다. 물론 수단의 의미에서도 우리의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베풀어주시는 수단으로서의 믿음이다. 또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에 지나치리만큼 강조하면서도 실상에 들어가면 행위로서의 축복을 또한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중적인 샤머니즘의 구조 가운데 있다. 그래서 지나친 이신칭의의 강조점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믿음 그 자체가 본의를 벗어나서 또 하나의 행위로서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좋으면 잘살게 되고 믿음이 좋으면 병도 낫게 되고 믿음이 좋으면 만사가 형통한 것이다. 못사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오로지 행위와 반대되는 의미로서 만의 믿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자기 지식이나 생각으로 가득한 얄팍한 믿음, 명료한 의식이 없는 거의 샤머니즘적인 이교적 믿음,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믿음, 목회자에게 무조건적 충성하면 복 받는 줄 아는 믿음, 십자가의 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 순간에만 필요한 정거장 같은 믿음 등이다. 그리고 믿음이 좋다는 말도 얼마나 많이 오용하고 있는지 모르며 정확히 말하면 종교적인 의미로 혹은 샤머니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믿음은 구원의 도리를 받는데 잠깐 필요한 스쳐지나가는 노점상 같은 차원의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실로 구원의 전 서정에 필요하다.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믿음이 필요하며, 원죄와 관련해서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며, 회개 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며, 중생자의 생활은 늘 항상 주님을 믿는 생활이며, 성신의 내주, 기도, 성화 등 모든 일상사에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

 

점진적 성화가 계속적 믿음으로 가능하다. 계속적 믿음으로 계속적 회개가 가능하다. 거룩한 삶은 계속적 믿음으로 가능하다. 우리에게 더 신뢰함이 날마다 필요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아직 우리가 날마다 성신을 신뢰함으로 아상을 탈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성화를 체험하지만 여전히 내부에 부패한 본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외부에 죄의 세력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는 계속적으로 회개하며 또 죄의 세력과 싸워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이루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모든 것이 일회적으로 끝나버린다. 한번 믿으면 끝나는 식으로, 한번 회개하면 끝나는 식으로. 요즘에는 회개도 없다. 눈물도 없다. 진정한 헌신도 없다. 계속적 믿음, 계속적 회개, 점진적 성화에 포함된 것을 무시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번 교회에 나와서 시간만 지나면 집사가 되고 시간만 지나면 장로가 된다. 안수집사가 되는 가장 첫째 조건은 십일조 생활을 하는가, 주일날 빠지지 않고 교회 나오는가, 이다. 본질적인 것은 일회용이 되어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은 지속되고 있다. 오직 점진적 평수확장, 점진적 큰 자가용, 점진적 자신의 영향력 확장, 점진적 물질의 부요가 있을 뿐이다.

 

한국 교회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세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가 믿음 가운데 있는가? 여전히 20년, 30년 신앙생활에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다. 신앙생활의 횟수를 더해갈 수록 왜 더 이기적이 되며 더 종교적이 되며 더 샤머니즘적이 되고 더 안일하고 더 세상의 축복을 더 바라게 되는가?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가지지 않은 보신적 선민주의에 빠져 있다. 칼빈은 믿음은 결코 경건한 기질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기독교 강요. Ⅲ. ⅱ. 8). 그러나 경건한 기질은 잊은 지 오래다. 한국 교회 믿음에 대한 가르침은 심각한 수준에 있다. 변화도 없고 성령님의 능력도 없는 완전한 알미니안식 가르침이다.

 

믿음의 성경적 의미

 

우리는 믿음의 성경적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 바울이 그 시대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을 한 의도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 시대 그 말을 했을 때의 역사적 의미를 간과하는 것은 큰 오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한다.’ 할 때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믿음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만약 이신칭의 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 또 바울이 이신칭의를 말할 때, 믿음과 가장 대조되는 개념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생각한 그들의 개념이다. 그들은 율법을 행하면 그 자체로서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이 아니란 의미에서 이신칭의를 말했다.

 

바울의 율법의 개념은 엄밀하게 말하면 부정적이지 않다. 단지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는 것이지 지키지 말아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하거나 나쁜 것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율법주의에 대한 반대였지 율법에 대한 반대는 아니었고,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 결코 실천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이신칭의를 언급할 때, 유대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그 잘못된 생각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고 여겼는데, 바울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말했다. 바울은 그들의 행동 그 자체를 가지고 가타부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잘못된 행동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윤리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 아닌 경우라도 그것을 의지해서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그 생각과 정신을 지적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하면서 그런 행위로 자기가 의롭게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 바울은 십일조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함으로 의롭다고 여기는 그 정신을 비판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할례문제는 그것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바울은 할례를 행하는 문제에서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없고 반드시 안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사도행전 16:3에서, 바울은 유대인들로 인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바울이 할례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면, 그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다. 진리를 거론하는데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왜냐면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 행위 자체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방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23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마음으로 드리는 그것을 고치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바울이 이신칭의를 말하고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선한 행위 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를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또 의롭다 하는 것과 하등 상관이 없는 할례나 기타 의식들을 의지해서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는 그런 잘못된 생각도 의지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왜냐면 이것이야 말로 이교적인 종교이며, 행위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해야 할 실천사항을 그만 두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천은 하되 그 잘못된 정신은 좀 고치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의미이다. 그 정신이 문제이며, 잘못된 심상이 문제이지, 십일조가 문제가 아니며, 주일성수가 문제가 아니다. 의식적 행함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경향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니까 아예 아무 실천도 하지 않고 신자의 생활을 중요시하지도 않는 경향으로 뚜렷이 양분됨을 보여준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서 판단하기를 “이것은 행함이다” 혹은 “이것은 믿음이다”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어쩌면 인간의 눈을 가지고 판단할 때 한 사람의 믿음이나 행함이라는 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수도 있다. 사람은 행하면서도 주님을 의지할 수 있으며, 믿는다 하면서도 얼마든지 자신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할 때, 믿음이 주인으로 들어서서는 안 된다. 믿음이란 하나님만이 의롭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 믿음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면 자신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형식만 조금 달라졌을 뿐 실질에 있어서는 유대인들과 같은 상태인 것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에는 내가 믿었기 때문에 내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믿었기 때문에’ 라고 하는 또 다른 종류의 행함을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믿음이 또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함정에 벗어나야 한다. 또한 행함이 믿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보는 함정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앙하고 따르며, 그 분께 헌신하는 모든 삶과 활동을 말하는 것이지 믿음이란 단지 정신작용의 한 시점이라든지 한순간의 지식이라든지 시간적으로 한 순간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것을 포함해서 구원의 전 과정에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믿음으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고 내가 중심이 된다면 그것만큼 우상적이고 이교적인 교리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게 되고 그 분만이 의롭게 하실 수 있다는 의미이다. 믿음 그 자체가 중심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이신칭의의 잘못된 가르침은 바로 믿음 그 자체의 강조이다. 믿음 그 자체의 강조는 그것이 또 하나의 행위임을 말한다.

 

그래서 구원의 전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차원 안에서 믿음으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구원의 전에도 인간의 하는 일은 없다. 구원 후에도 인간의 하는 일은 없다. 인간의 행위가 자기를 의지한 것이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다. 나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며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는 것이다. 구원의 증인으로서 나의 올바른 행위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면 그 행위는 나의 행위가 되지 않는다.

 

믿음의 본질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것들을 요약하면서 믿음의 본질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믿음 그 자체가 빠질 수 있는 허점의 문제가 있다. 이신칭의를 강조함에 있어서 오류가 될 수 있는 점이 있다. 좀 더 짚어보면 “오직 믿음으로”에서 “오직”에도 함정은 있을 수 있다. 원문에는 “αλλα”(롬3:27) 이다. 물론 “오직”해도 나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러나”로 풀 때 함정에 보다 덜 빠질 수 있다. 우리는 “오직”이란 말 때문에 오는 허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천이 필요 없다는 반론은 아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실천이 필요 없다는 반증을 주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믿음 생활에 행함이 없다면 과연 그 믿음이 가짜인 것을 야고보가 이미 2천 년 전에 강하게 언급하지 않았던가? 개혁주의 신앙의 특징은 말씀중심, 하나님중심, 교회중심을 강조하면서 동일하게 신행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바울도 어느 곳에서도 실천이 필요없는 듯한 그런 불순한 의도를 포현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오직”이란 말로서 은근히 실천은 필요 없지 않느냐는 이미지를 풍긴다면 잘못이다.

 

그리고 “행함”이라는 것이 순전히 인간의 편에서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은 성신의 유기적 인도하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성신을 따른 행함은 성신의 행동이다. 성신께서 나를 통해 행하실 때, 그것이 성신의 열매요, 성신의 행하심이다.

 

두 번째로, 확신의 진위여부의 문제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잘못된 확신에 대한 우려를 생각해야 한다. 확신을 가진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잘못된 근거에 기초한 잘못된 확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마7:21-23; 히6:4-6).

 

세 번째로, 이론과 실제의 문제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하나의 이론이나 철학적 생각이나 혹 정통으로 내려온 것으로서 받아들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실제적인 것으로서 자신에게 적용됨을 아는지 구분해야 한다. 김홍전도 구원의 표지에 대해 말할 때 정통이라는 것이 구원받는 신앙의 표지는 아니라고 했다. 물론 이 말은 어느 자유주의자들처럼 정통을 부인하려는 입장에서 나온 말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신칭의가 전통으로 내려온 것으로, 혹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실제의 사건과는 의미가 없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또는 우리 전통이 그렇다고 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수단으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이며, 실제적인 의미로서 인간에게 바로 적용되는 것이다.

 

네 번째로, 주체가 누구이냐의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 때문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이신칭의에 대한 깊은 지식 때문인지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지만 “믿음”이란 단어 앞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실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눈이듯이 말이다.

 

현시대에는 예수님을 빼버린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오게 된다. 이것은 흡사 교회에 불법의 세력이 서서히 들어와서 성도를 배교의 현실로 끌고 가는 것과 흡사하며,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하면서 그 내면에는 “그것을 읽는 본인이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때만 하나님 말씀”이란 복선을 깔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나의 예수님에 관한 생각이나 지식을 믿음으로”라든지 혹은 “나의 확신을 믿음으로”가 되어버렸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구원의 역사를 믿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인 역사를 믿으면 안 된다. 칼빈이 믿음이란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그 실제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또한 그 지식 자체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 자체가 의롭다함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다.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주신 성령님께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점은 믿음 그 자체도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고 믿음에 관한 지식도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고 인간적인 의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세 번째와 네 번째를 같이 생각해볼 때, 믿음이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제이며 그 대상은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이다. 물론 이론이나 지식은 하늘에서 주신 것이라야 한다. 그 대상되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지식, 이론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과 연결이 없는 그 자체의 이론이나 지식은 아무소용이 없다. 이것은 신학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주의를 요하고, 신학적 지식이 풍부한 학자에게도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신학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지식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고, 학자에게는 그 지식이 비록 그릇되지는 않았다 해도 하늘에게 능력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닌 이상, 지식 그 자체가 행위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고 실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 상황은 우리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준다. 그 당시 바리새인, 대제사장, 사두개인, 서기관, 그리고 성경에는 없지만 세속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어간 쿰란 공동체들은 모두 성경에 정통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였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가 왔을 때 이들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초기 세례요한이나 나중에 제자들만 빼고 말이다. 당시 쟁쟁한 학자들은 왜 하나님을 몰랐을까?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낸다.

김홍전은 「계시로서의 예수님」이란 책, 제1강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로서 먼저는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과 다음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헤브라이즘을 들고 있다. 잘못된 헤브라이즘이란 중생의 도리를 떠나 형성된 것으로서 자기 개발 프로그램처럼 종교생활을 하고 자기가 무엇을 쌓아가려는 식의 종교를 말한다.

 

필자 소견으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이다. 한마디로 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자기들의 머릿속에서 만든 하나님을 믿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지식만 믿었지 실제의 하나님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누가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는가? 세례요한과 베드로와 탄생초기 몇몇 이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특히 이스라엘 당시 종교적 식자들은 왜 몰랐는가?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믿은 것이지 실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올바른 지식이든 바른 지식이 아니든 간에 그것은 단지 그들의 머리에만 있었을 뿐, 능력도 힘도 효력도 믿음도 발생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실제 하나님이 아니었다. 얼마나 무서운 현실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이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믿는 것과 실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르다. 우리의 이신칭의에 대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지식을 믿는 것인가, 실제를 믿는 것인가. 믿음이 하늘에서 와야 실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라고 하시 않았던가? 이것은 오늘의 현실에도 마찬가지이다. 2천 년 전 지식에만 하나님이 있고 실제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믿음 없는 이스라엘의 쟁쟁한 식자들처럼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겠는가? 역설적으로 오늘날에도 베드로나 바울, 세례요한처럼 하늘에서 주신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지 않겠는가? 지식은 함정이 있다. 실제가 더 중요하다. 이신칭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신칭의의 실재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결 론

 

김홍전은 비뚤어진 신앙은 아상주의(我想主義)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아상주의란 자기중심의 신앙을 뜻한다. 옛사람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기행복 추구의 신앙 스타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는 하지만, 바람직한 기독교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는 것을 뜻한다.

 

한국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부조리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아상주의적 신앙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불일치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으로 발돋움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신행불일치를 보이는 한국교회의 모순을 타파하자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는 바, 김홍전은 그것이 아상주의라고 파악했다. 하늘에서 내린 믿음이 아니라 땅에 기초한 세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상주의의 원천과 뿌리는 자기행복주의, 공리주의적, 기복신앙이다. 김홍전은 아상주의를 타파하는 방법으로 “하늘에서 내린 믿음”을 제시한다. 이 믿음은 암매한 아상을 깨부순다.

 

한국교회는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에 비례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이 부족하다. 그 이유는 아상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된 구원론과 신앙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정확한 의미를 성경대로 조망하지 못했다. 구원을 인간의 행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마저 없지 않다. 아상중심의 신앙에 뿌리를 둔 신앙 때문이다. 아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늘에서 내린 믿음이 그 사람에게 있어야만 가능하다. 아상이 계속 남아 있는 한 참다운 신앙을 가지는 것은 어렵다. 아상은 영적, 도덕적 능력의 부재로 이어진다. 한국교회가 아상을 탈피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신앙과 구원의 의미를 회복하여 정체성 상실을 극복하고 생명력을 가지는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논문을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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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지

성약 출판소식, 제37호, 2003. 3. 3.

성약 출판소식, 제40호, 2003. 8. 14.

성약 출판소식, 제42호, 2003.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