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방언기도가 없는가?

by dschoiword posted Mar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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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방언기도가 없는가?


김동수 교수 (평택대)


최근 성경에 방언 기도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방언은 가짜 방언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는 지난 백년간 사탄에게 완전히 미혹되어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과 유투브로 읽고 본 그들의 주장은 매우 진지했고, 또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틀림이 없다고 매우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들이 어떤 사심이나 욕심으로 이러한 주장을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기에는 성서주석에 대해서 충분히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이 보기에는 매우 엉뚱한 헬라어 문법 해석, 단어 해석, 정황 해석이 많았다. 일반 독자들은 그들의 확신에 찬 말에 설득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그래서 그들이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몇 가지 사항을 들어 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한 것인지를 설명해 보려고 한다.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였다고?

이들의 주장은 바울이 말한 방언의 은사가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라는 어구가 똑 같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같은 어구는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주석의 abc를 모르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같은 어구가 반듯이 같은 뜻이 아님은 같은 저자에게서도 나타난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같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이 되기고 하고(요 3:16), 교회를 핍박하는 하나님의 반대 세력이 되기도 한다(요 16:19). 더구나 동일 저자가 아닌 경우에 같은 어구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뜻으로, 또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외국어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또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말이었기에(14:2), 이것을 실제 외국어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이 실제 외국어였다면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통역의 은사가 따로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할 때 외국어를 잘하는 통역인을 쓰면 되는 것이다. 방언이 외국어라면 방언하는 사람이 통역하기를 기도한다는 말은(14:13) 말이 되지 않는다. 즉 통역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배우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통역이 또 필요했던 것이다. 
  
바울과 누가가 방언에 대해서 말할 때 공통점은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행 2:4; 고전 12:7)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것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말을 배우지 않은 것이었기에 이것이 외국어이든, 실제 언어가 아니든 자신은 그 말의 뜻을 모르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방언을 많이 했다는 것을(고전 14:18) 바울이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어서 외국어를 더 많이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또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부르는 것을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피아노를 잘 치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하는 은사와 같은 것들이 아니다. 여기에 예시로 나와 있는 9가지는 모두 성령의 능력이 일시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현시되는 것이다(고전 12:8-10).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만 인정하지 말고,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현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처음에는 방언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 않고 그 은사를 다른 은사와 함께 열거하다가(12:8-10), 14:2에서야 비로소 이것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첫째, 이것은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14:15 참조). 둘째, 이것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그 내용은 “신비”라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신비란 남들을 알지 못하게 하는 비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관한 어떤 것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자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 찬양, 감사, 축복하는 것이다(14:15-17). 이것을 다 포괄하는 용어가 바로 기도다.

바울이 말한 방언은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이들의 주장의 요체는 바울이 소개한 방언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근거로 바울이 말한 방언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이창모 목사는 『방언, 그 불편한 진실』(서울: Band of Puritans, 2014)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해서 필자의 반박과 적절한 답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장: 바울은 ‘글로사’(방언, 혀)의 복수형은 방언의 은사를, 단수형은 가짜 은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양자를 구별한다. 반박: 바울이 단수형과 복수형을 사용해서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을 구별해서 말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어떤 것의 진위를 설명할 때 저자가 단복수를 사용해서 한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본 바 없다. 또 본문 자체에서도 이런 증거는 전혀 없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방언들”은 진짜 방언을, “방언”은 가짜 방언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는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바울이 독자들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게, 마치 암호화 하듯이 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

2) 주장: 고전 14:2, 4에서 방언이 하나님께 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 반박: 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전혀 말하지도 않은 방언에 대한 정의(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에서 출발해서 이런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반대하는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기록 당시에 인용부호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서 저자는 말할 수 있었고 또 저자들은 그렇게 했다.

3) 주장: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하는 방언(고전 12:3)과 인간적으로 말하는 방언(14:2)을 구별하고 있고 후자를 거짓 방언이라고 생각했다. 반박: 또 고전 14:2에서 “영으로”는 그 의미가 “성령으로”도 될 수 있고 혹은 “사람의 영으로”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성령으로”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와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영으로”와 대척 개념으로 삼고 있는 것은 개역개정판에서 “마음으로” 번역한 “이성으로”이다(고전 14:15-16). 여기서 방언은 사람이 이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에 의해 자신의 영으로 혹은 성령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에 의한 진짜 방언과 인간의 영에 의한 가짜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주장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방언의 진위 문제가 아니라 방언의 바른 사용법을 말하고 있다. 올바르지 않은 사용법 중 하나는 통역이 없이 공적으로 방언을 사용하는 것이고, 올바른 사용법은 공적으로 방언을 할 때는 통역을 동반해서 사용하든지(고전 14:13), 아니면 사적으로 하는 것이다(고전 14:28).

4) 주장: 고린도전서 14:14-15에서 바울이 가정법을 써서 “방언으로 기도하다”라는 말을 쓴 것은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답변: 이것은 헬라어의 기초를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헬라어에서 가정법 구문이 꼭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본문에서 현재 가정법으로 쓰인 구문인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혹은 기도할 때 마다]”라는 뜻이다(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rev. ed., 742). 만약 본문에서 이 사람의 주장대로 가정법 구문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예를 들어 내가 만약 새라면 날아갈 수 있을 텐데, 즉 내가 새가 아니기 때문에 날아가지 못한다는 말)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14절) 그러면 이 문장은 바로 뒤 구절과 모순된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15절) 헬라어 사전을 보면 헬라어 에안( ??ν)+ 가정법 현재 구문은 “...할 때”를 의미할 수 있다.

5) 주장: 고전 14:28에서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는 “집에 가서 혼자 떠들고 혼자 들어라”라고 하는 것이다(364). 반박: 여기서 “자기와 하나님께”에 대척된 개념은 “교회에서”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적으로 혼자 방언하라는 말이다.

방언 통역은 방언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고?

바울은 고전 14:5에서 방언 통역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언의 효과와 똑같은 것이다.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기에 듣는 이의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있었듯이(고전 14:4), 방언 통역은 방언에 대한 통역이었기에 듣는 이에게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이 되었던 것이다. 또 이들의 주장은 만약 방언이 영의 기도라면, 하나님과 은밀한 기도인데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은밀히 하는 기도의 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사실은 아니다. 바울은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하는 기도의 내용을 앎으로 본인이나, 그것을 듣는 이에게 예언과 같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방언 통역의 목적은 방언이 올바른 것인지 거짓 방언인지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 말로 자의적 해석의 극치다. 본문에는 방언 통역이 예언과 같이 교회의 덕(교회의 세움)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 방언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것은 영 분별의 은사이지 방언 통역의 은사가 아니다.

방언이 그친 근거가 로마서 은사 목록(12:6-8)에 방언이 안 나오기 때문이라고?

노우호 목사는 방언이 바울이 로마서를 쓴 그 시점에 그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바울이 로마서 12:6-8에서 여러 은사를 언급하면서 방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때 방언이 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3:8에서 방언이 그친다는 말이 이 때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침묵에 근거한 주장(argument from silence)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는데, 독자가 단순히 상상을 통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로마서 12:6-8에서는 고린도전서 12-14장과는 다른 종류의 은사를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 은사는 영적인 은사라기보다는 재능과 같은 ‘자연적 은사’다. 여기에 예언이 나오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성령의 나타님에 의한 종류라기보다는 믿는 자에게 주어져서 “믿음의 분수대로” 사용하는 것이다(롬 12:6). 바울은 지금 고린도전서에서와 같이 영적인 은사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그러한 은사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지, 그 사이에 이 은사들이 그쳤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식의 추론이 옳으려면 다음과 같은 추론도 가능해야 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다 뺐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추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은사 본문에 방언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울이 방언이 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침묵에 의한 논증일 뿐이다.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 방언이라고?

이들은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라고 한다. 그 근거는 이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대 방언은 만 사람이 하면 만 가지가 되는데, 그 어떤 것도 통역의 규칙에 맞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 본문을 잘 못 해석한 데서 근거한 것이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바울이 분명히 말했다(고전 14:2). 그것을 통역하려면 통역하기를 기도해서 그 은사가 임해야 한다(고전 14:13). 그렇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는 방언을 못 알아듣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함으로 하나님만 알아들으면 되는 것이다.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영으로 하는 방언 기도와 이성으로 하는 기도를 모두 하겠다고 한다(고전 14:15). 그런데 이런 기도를 반대하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방언이 바울이 말한 방언과 같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은 서구 세계에서 늘 있어왔다. 이 분야를 오래 연구한 전문가 중의 하나인 막스 터너는 신약성서의 방언과 현대의 방언 현상을 연구한 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방언이 바울이 알고 있던 것과 동일한 현상이 아니라는 교조주의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성령과 은사』, 새물결플러스, 2011, 549-550). 한국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축복하는 것으로 바울이 말한 방언과 부합하는 것이다(고전 14:15-17). 바울이 이 방언을 많이 말함으로 감사했고(고전 14:18), 또 이러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명령(고전 14:39)을 우리는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안 된다고?

이들은 신자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몇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 다 헛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한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자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또 자신은 이성으로도 기도하겠다고 한다. 두 가지를 다 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마음은 헬라의 ‘누스’에 대한 번역: 이성] 기도하며...”(고전 14:15). 또 바울은 자신이 그 어떤 사람보다도 방언으로 더 많이 혹은 더 자주 기도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4:18). 물론, 그는 방언 기도만 하지 않았다. 이성으로도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 설교했다. 어떤 것도 무시하면 안 된다.


오순절파신학 관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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