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과 구원

by dschoiword posted Nov 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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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Joonho Lee 페북에서 옮긴 것이다. 원저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논조를 볼 때 고려신학대학원의 모 교수의 글로 짐작된다.


자살과 구원문제에 관한 소고


<서언>


최근 자살자의 수가 급격히 늘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2010년 한해동안 15,566명이 자살했다. 10년 전에 비해 2배가 늘었다. 이는 미국에 비해 3배가 많고 OECD국가 중 1위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자살자들도 많이 나오고 있어서 신학적으로도 논쟁이 되고 있고 목회적으로도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교회사적, 성경적, 신학적 검증이 없는 '자살한 자는 지옥 간다'는 통설로 기독교의 중심교리인 구원론을 흔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회적으로 장례식의 어려움을 갖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살자의 가족들은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교회생활이 힘들어진다.


Ⅰ. 성경에 나타난 자살자에 대한 분석


성경에 등장하는 자살자는 아비멜렉(사9:52-54), 삼손(삿16:23-28), 사울(삼상31:1-6, 대상10:13-14), 아히도벨(삼하17:23), 시므리(왕상16:18), 가룟유다(마27:3-10, 행1:16-18). 아비멜렉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살한 경우이고 다른 사람들은 직접 자살을 한 경우이다.


① 아비멜렉


   아비멜렉은 간접적으로 자살한 인물이다. 여룹바알 즉 기드온의 첩에게서 난 아들로서 왕이 되기 전에 자기 모계 친족 및 백성들을 괴어 이복동생 7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는 3년간 왕으로 통치하다가 반역을 꾀한 무리들과 전투하는 과정에서, 여인이 망대 위에서 아래로 던진 맷돌을 맞고 머리에 치명상을 입어 죽게 되었다. 그는 여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수치스런 말을 듣기 싫어서 병사에게 칼을 빼어 자기를 죽이도록 명령했고 결국 병사의 칼에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들을 죽여 그의 아바지에게 악을 범한 것에 대해 아비멜렉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② 삼손


 사사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게 포로가 되어 다곤 신전의 기둥에 묶여 있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 기둥을 무너뜨려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기도 함께 죽었다. 삼손의 죽음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e)은 성령이 명령한 대로 행동한 것으로 보고 자살과 구별했다.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이 위임한 것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죽었기 때문에 자살자가 아니라고 했다.


③ 사울


 바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치를 피하려고 자신의 병사에게 자신을 찌르도록 명령을 했다. 병사가 거절하자 스스로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목숨을 끊었다. 성경은 사울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이 치신 결과라고 말하면서도 (대상10:13-14) 사울이 죽은 방식 자체나 그와 관련되어서는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소식을 아말렉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다윗이 사울의 생애를 칭송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는 내용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삼하1:11-27).

 

④ 아히도벨


아히도벨은 다윗의 책사였는데 압살롬의 반란 때 다윗을 등지고 압살롬의 책사가 되었다. 다윗이 도망했을 때 압살롬에게 다윗을 칠 방책을 제시했다가 자신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고 오히려 후새의 모략이 채택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신변을 정리한 다음 집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성경은 그의 생을 마감한 방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가 아버지의 묘에 묻혔다가 언급하고 있다 (삼하17:23).


⑤시므리


시므리는 이스라엘왕 엘라의 신하였는데 왕을 모반하여 살해하고 디르사에서 왕이 되어 7일 동안 등극했다. 당시 전쟁 중에 있던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군대장관 오므리를 왕으로 옹립하고 그를 공격하기 위해 왕국으로 향했다. 그 소식을 들은 오므리는 왕궁의 경비초소로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최후를 맞았다 (왕상18:15-19). 성경에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죽은 방식 자체나 그것과 죄와 인과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⑥ 가룟유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넘겨주고 난 후 후회하고 현실을 돌이킬 수 없음을 자책하고 은 30을 성소에 던지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마27:3-5). 성경은 유다가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오는 비참한 죽음으로 '제 곳으로 갔다'고 기록했다 (행1:25).


위의 사건들을 관찰 분석하면 몇가지 사항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경에 언급된 자살은 어떤 것도 우호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삼손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아비멜렉과 사울의 죽음은 범죄에 대해 하나님이 치신 결과로 말하고, 아히도벨과 시므리는 다 '제 주인을 반역한' 인물로 취급되었고 (왕하9:31), 가룟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둘째, 죽음의 방식인 자살 자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물론 사울의 경우 그것이 그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치신 결과로 주석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살이라는 형식과 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울의 죽음에 관해서는 그의 죽음을 영예롭게 만들어 주는 다윗의 조사를 길게 다루고 있다. 아히도벨 경우도 그가 아비의 묘에 묻혔다는 기록을 남김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죽음을 저주했거나 수치스럽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길 수 있게 했다. 셋째, 자살을 구원과 관련시켜 취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룟유다에 관련해서조차 그가 '제 곳으로 갓다'고 했지만 그것이 그의 자살 행위 때문이라고 암시하고 있지 않다.


Ⅱ. 자살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


1. 자살에 대한 교회사적 결정 

 

약 400년 동안 유럽세계의 정신문화의 배경이 되었던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에서는 자살에 대해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면서도 특별한 경우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질병이나 극도의 고통을 직면할 때나 적국에 포로로 잡혀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있을 때 등에 대해서는 자살이 더 이상 자연에 따른 삶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으로 보았다. 하지만 교회는 성경의 계명을 따라 자살에 대해 강하게 정죄했고 철학적 사고에 대해 비판했다. 중세교회에서는 자살에 대한 주요한 결정을 세차례 내렸다. 첫째는 533년 오르레앙에서 열린 2차 오르레앙(Orleans) 공의회의 결정이다. 이 공의회에서는 사제는 자살한 자에 대해 미사나 기도를 드려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둘째는 561년 1차 브라가(Council of Braga) 공의회의 결정이다. 이 공의회에서는 교회는 미사 때 자살자에 대한 어떠한 추념 같은 순서를 금지했고 성시교독과 성가를 부르는 장례가 허락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셋째는 693년 톨레도(Toledo) 공의회의 결정이다. 이 공의회에서는 자살 미수자들이라도 그 죄를 물어 2개월 동안 성도의 교제에서 단절시키고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그 이후에 교회는 자살자에 대해서는 교회가 베푸는 장례의식과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경내 묘지에 장사하는 것까지 금했다. 교회가 교회법적으로 명시한 이후 그 흐름은 자살자에 대해 교회장을 허락하지 않는 관습이 전통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런 전통은 자연히 자살자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2. 교회역사에서의 신학자들의 주장


① 어거스틴


   로마시대의 지식인들은 자살 자체보다는 자살의 방식을 중요시하므로 영웅적인 자살에 대해 두둔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그들의 경향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성경에 족장, 선지자, 사도들은 적들에게 사로잡혀가기도 하고 구금당하기도 하고 능욕강하기도 하는 등 견딜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당했지만 그 누구도 그 수욕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는 없었다고 했다. 동기와 목적이 어떠하든 자살은 정당화될 수 없고 그런 경우라 해도 명백히 살인하는 중대한 죄로 보았다. 강간을 당한 여인이 목숨을 끊는 예를 들면서 그 여인들이 비록 명예는 지켰을지 모르나 신학적으로는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했다. 악을 피하기 위해 더 큰 악을 행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경우들이라도 6계명을 어긴 것으로 보았다.

②아퀴나스
아퀴나스(Aquinas)는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 1권 20장에 언급된 것을 비반으로 자살은 자기살인에 해당하는 것임을 재확인하고 세가지 이유로 자기를 죽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살인죄라고 규정했다. 첫째,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 원리에 역행하는 대죄라고 했다. 둘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에 상처를 가하는 잘못이다. 셋째,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고 했다. 아퀴나스는 자살이 본인, 공동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저버린 치명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의 신학은 중세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③루터
루터(Luther)는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만큼 자살에 대해 깊은 분석을 내놓지 않았다. 루터는 자살이 개인적인 의지보다는 사탄의 힘에 장악되어 저지르는 죄로 보았다. 사탄은 신자에게 예정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염려나 두려움을 일으켜 우울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는데 그것이 때론 자살로 이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살이 외부의 힘 곧 사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당시 분위기와는 달리 자살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로 단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는 자살한 사람들은 확실히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살한 것은 죽기를 강력히 바랬기 때문이 아니라 마귀의 힘에 장악되어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숲이 우거진 으슥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살해 당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Luther's Works, vol 54).

④칼빈
칼빈(Calvin)은 그의 방대한 저작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에 대해 주요 주제로 삼지 않았다. 오직 성경강해를 해 가는 가운데 사울의 죽음과 아히도벨의 자살에 관한 부분을 설교하면서 취급했을 뿐이다. 그는 어거스틴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인간이 죽음을 생가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이생을 떠나야 할 때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거스틴 자살을 자기살인으로 보면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자살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곳을 이탈하는 교만에서 나온 죄악으로 보았다. 심지어 어거스틴처럼 영웅적인 죽음 조차 합리화 할 수 없다고 보았고 또 다른 죄를 첨가하는 것으로 보았다.

⑤웨슬리
웨슬리(Wesley)는 자살을 사뢰 기강과 관련해서는 다루었지만 이것을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사유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살을 자기살해 죄로 확고히 간주하면서 그것에 대해 교회가 더 엄격하게 제제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강시 영국이 자살이 많은 것에 대해 영국인들에 비해 경건함과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아울러 영국법이 그레고리왕조 때부터 우울증 등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자살한 자에 대해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고대 스파르타시대에 자살자들의 시체를 벌겨 벗겨 거리에 매달자 자살이 줄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자살자를 사슬에 묶어 거리에 매달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물론 교회도 사회 기강을 무너뜨린 자살에 대해 엄격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Ⅲ. 자살에 대한 교회의 교리

1. 자살을 용서받지 못할 죄로 인식하는 흐름.

교회사를 통해 살펴본 결과 자살이 구원받지 못하는 죄라는 통설은 중세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제정한 교회법과 교리에 기원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561년 브라가 공의회에서 교회는 자살한 자에 대해 기도해 주는 것을 금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그 기도가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즉 지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866년 교황 니콜라스1세가 자살자의 장례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보내는 가운데 자살은 사탄의 사주로 말미암은 것임을 명시했는데 그것은 자살자의 영혼은 당연히 사탄이 취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s). 중세교회의 영향을 받은 대문호 단테의 문학작품 신곡이 자살자의 상태를 묘사한 것도 이런 인식을 심화하게 했다. 단테에 따르면 자살자들은 9개층으로 구성된 지옥에서 마귀가 있는 9번째 층에 가장 가까운 7번째 층에서 비참한 형벌을 받는다. 그들은 육신이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로 영혼이 던져져 있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육체를 내던졌기 때무에 최후의 심판날을 맞아도 육체를 입을 수 없고 결국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운명인 채로, 그곳에서 숲이 되어 통곡하며 지낸다 (Dante Ahligieri, La Commedia). 단테는 살인자보다 자살자를 사탄에 더 가까운 곳에 배치해 둠으로 자살이 더 중한 죄라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12세기 교회의 대학자인 아퀴나스가 자살을 대죄(mortal sin)로 가르쳤던 것은 그런 인식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일련의 결정들과 교리들을 통해 자살하면 지옥가게 된다는 인식이 굳게 자리잡고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루 개신교는 그와 달리 교회법이나 교리문답을 통해 자살에 대한 공적 입장을 가르침 적이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에 대해 그의 편지와 대화 편에서 언급한바 있는데 자살자들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사탄의 힘에 사로잡혀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살이 영원한 저주에 이르게 하는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생각을 계승했기에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지만 그도 이것을 영원한 저주와 연관시켜 말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하여 다루면서 피조물이 교만하고 월권적인 죄로 취급해 왔다. 이처럼 개신교회에서는 이 둘의 관계에 공적 결정이나 교리를 제정하지 않았지만 개신교회 안에도 중세 이후로 교회에 계속 내려오던 이 통설이 계속 자리잡고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2. 대죄 교리와 자살

자살에 관한 통설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죄의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죄를 대죄(mortal sin)와 소죄(venial sin)로 구분하여 이해해 왔는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살을 대죄로 분류한 것이 이 통설을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대죄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임을 알고도 의지적으로 범하는 죄이다. 심각한 문제는 십계명을 통해 이미 구분되어 있으며 행동의 죄된 성격과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범하면 그것이 대죄가 되는 것이다. 소죄는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데 자기가 범하는 그 죄의 성격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고의가 없이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 대죄를 범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그들의 심려에서 파괴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를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관계가 단절된다. 그렇기에 대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고해성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고해성사는 대죄를 지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새로 역사하게 하고 성화시키는 은혜를 회복하게 한다. 만약 고해성사를 통해 회개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나라로부터 배제되고 '지옥의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다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Second Edition). 이런 로마 교회의 대죄교리의 치에서 본다면 대죄로 취급되는 자살은 마땅히 고해성사를 통한 화목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실적으로 자살자는 그 순간을 놓쳐 버리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할 수 없고 결국 자살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교회 내에서 내려오는 통설은 로마교회의 자살 이해와 밀접한 연관 하에 생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Ⅳ. 자살과 구원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

자살과 구원문제에 대한 신학은 개혁주의 입장 특히 칼빈주의 입장에서 볼 것이다.

1. 성령훼방죄와 자살과의 관계

성경에는 유일하게 사함받지 못할 죄라고 한 것은 '성령을 훼방한 죄'밖에 없다 (마12:31, 막3:28-29, 눅12:10). 많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행하는 일과 능력을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 것으로 간주한 것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명백한 현장을 목도하면서도 예수님의 사역을 사탄의 대리자의 사역으로 돌리는 것으로서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거부하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해석했다 (Berkouwer, Bavinck).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계속적으로 한 말로서 그것을 계속적으로 거부하고 모독한 것으로 강조하였다 (Hoekema). 이 죄에 대해 신약학자 카슨(Carson)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진리를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대속의 죽음을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히6:4-6, 10:26,29, D.A.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이 죄의 핵심은 성령의 내적 조명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 성격에 비추어 보면 현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자살은 그 죄와 거리가 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는 믿음을 부인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나 내세나 구원 등이 없다고 주장하며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이기 때문에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는 차원에서 자살을 택한다면 그 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에서 일어나는 자살은 대부분 극심한 생활고나 참을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나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의 분노나 다툼으로 일어난 극단적인 행동이다. 그렇다면 자살을 성령 휘방죄라 할 수 있는가? 삶의 나약함이나 절망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성령 훼방죄로 간주하기 위한 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2. 회개와 구원의 관계

자살은 다른 살인행위와 다른 점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채 죽은 죄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단초를 제공한 자는 어거스틴이다. 그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죄를 속죄하기 위해 자살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파괴적 가책이 발동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기회'를 남기지 않으므로 죄를 추가했다고 했다. 또한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위한 기회를 남겨 놓지 않는 악한 행위를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라고 했다 (Augustine, The City of God). 이런 인식은 중세교회 뿐 아니라 현대교회의 신자들 그것도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만만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제를 통해'라는 구절만 없어졌을 뿐 자살자는 회개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기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신학적으로 타당한가? 회개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회개에 한하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중대한 죄를 짓고 비록 회개하지 못했더라도 그가 하나님이 택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그 아들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만일 모든 죄에 대해 회개해야만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칫 행위구원과 공로사상으로 미끌어질 위험을 안게 된다. 사람은 누구도 지은 죄를 낱낱이 회개할 수 없다. 구원은 특정한 죄의 회개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에 달려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가 효과를 이루는 것이다.

3. 구원의 조건과 행위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구원에 대해서는 인간의 어떤 행위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인간이 스스로 가지는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가진다'고 하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교리는 사도바울과 교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칼빈이 세운 진리이다. 이신득구의 사상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와 빌립보서의 핵심 주제이다. 만일 자살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면 인간의 행위(선행)가 구원의 조건이 되거나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되고 만다.

4. 하나님의 주권 교리

개혁주의 가운데 칼빈주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믿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전적 타락(全的墮落, Total Dopravity), 무조건적 선택(無條件的 選擇,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制限的 贖罪, Limited Al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不可抗力的 恩寵, 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聖徒 堅忍, Preseverance of the Saint)이다. 성도의 견인은 궁극적 구원이라고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면, 전적 타락은 인간이 범죄하므로 전적으로 부패하여 스스로는 구원 얻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고, 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이 구원얻을 자를 조건없이 선택했다는 것이고, 제한적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얻기로 예정한 자의 죄를 위해서만 대속했다는 것이고, 불가항력적 은총은 성령이 구원얻을 자에게 거절할 수 없는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는 것이고,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이 구원얻을 자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도의 견인은 그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에서 비롯된다 (롬8:29-30).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성령에 의해 거듭나게 하고 한 번 거듭난 자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제외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진실로 구원얻은 성도는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장 1-2절에 수록되어 있는 이 교리는, 참된 신자는 전적으로 종국적으로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고, 그들은 확실히 끝까지 견디게 되고, 이 확실성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가르친다.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결코 타락될 수 없고 구원받는다. 만일 자살죄를 지은 사람이 지옥을 간다면 하나님이 선택한 목적이 허사로 돌아가므로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유한하다는 말이 되고 만다.

그리고 믿는 자의 모든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해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원죄(정죄,유전죄)와 본죄(자범죄,요구죄)를 사(赦)함받아 거듭나게 된다 (물론 시간적 순서가 아닌 논리적 순서임). 과거의 지은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받는다.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 눈같이 씻음 받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을 자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값을 십자가 죽음으로서 다 치렀기 때문이다. 그 구원의 방편은 하나님이 구약시대 때부터 제시한 하나님의 방법으로서 히브리서의 핵심 사상이다. 본인이 지은 본죄 중 자범죄는 우상숭배, 간음, 도둑질 등이 있다. 그 모든 죄들이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만일 살인죄를 지었다고 해서 지옥에 가야한다면 다른 죄들을 지은 자도 지옥에 가야한다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자살죄도 타살죄와 동일한 죄이다. 다만 자살죄를 타살죄보다 더 큰 죄라고 말하는 것은 자살죄는 타살죄와 달리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자범죄에 있어서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만일 자살죄를 지은 자가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효과를 무효로 돌리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자살행위가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을 무효화시킬 힘이나 공력이 없는 것이다.

이 교리에 비추어 보면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구원의 변수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자살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난이나 위험이나 칼과 마찬가지로 결코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하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자유 의지적으로 자살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도를 견인하는 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자살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선택의 작정을 변경할 수 없다. 작정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자살과 하나님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구원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5. 택자의 자살 가능성 문제

사람들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택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살할 수없고 또 하나님이 그를 자살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일반 신자들이나 목회자들로부터 간혹 들을 수 있는 유추적 주장이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백성이라도 율법을 어기므로 언약을 깨뜨렸다. 다윗도 살인죄를 지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장 3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의 세력과 자신들을 견인하게 하는 방편을 소홀히 함으로서 죄에 빠지며 한동안 그 죄에 머물기도 한다...'고 했다. 청교도신학자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도 행위로 볼 때 불택자도 택자처럼 경건하게 살 수 있고 택자도 불택자처럼 살 수도 있다고 했다. 성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언제나 의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신자들도 언제든지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약함 때문에 때로는 심각한 죄들을 범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내주하는 은총이 무효화되거나 궁극적으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자살죄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중죄인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죄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죄도 구원과 관계해서는 여타 죄와 다를 바 없다.

<결언>
자살은 중죄임에는 틀림없지만 행위의 죄가 구원을 상실케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이 내주하는 자라면 자살해도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자살은 6계명을 어긴 죄이다.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성화와 사명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큰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자살을 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사탄의 미혹과 인간의 본질적인 부패한 죄성에 의해 자살할 수도 있고, 믿음의 부족으로 극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할 수도 있다. 상담학적으로 보면 우울증과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죄의 인식 없이 쉽게 자살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힘든 상황에 있는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거나 삶에 의욕을 상실하고 있거나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관심있게 봐야 하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가 자살했을 때 가족들에게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인식을 주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위로해야 한다. 기독교 자살자에 대해 장례를 집례를 하는 자는 개혁주의적인 구원론에 입각하여 자살자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서 유족을 위로해야 하며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