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의 정치적 광기
나는 사법부의 판단에 높은 신뢰감을 보내지 않는다. 법률의 권위를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법과 정의의 존엄성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법원은 인간이 세운 제도이며, 판결은 인간이 내리는 판단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정신과 사회적 편견, 정치적 분위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법관도 예외가 아니다. 법복을 입었다고 인간의 연약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법정의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진실을 언제나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와 종교적 신념이 얽힌 사건에서 나는 사법부의 판단을 더욱 신중하게 바라보지만 전적인 신뢰를 하지 않는다. 역사는 법원이 언제나 정의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은 아니라고 증언한다. 때로 법원은 억울한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시대의 편견을 법률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권력의 요구를 정의의 목소리로 착각했고, 군중의 분노를 진실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판결문은 법률의 언어로 작성했지만, 그 문장 뒤에는 시대의 두려움과 증오가 숨어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트 장 칼라스(Jean Calas, 1698–1762) 사건은 이러한 사법적 비극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적 종교적 편향성이 불러일으킨 사법부의 폭력이었다. 칼라스 사건은 사법적 정의의 한계을 증언한다. 법관의 양심이 시대의 정치적 광기에 무릎을 꿇을 때 법정이 어느 정도로 광기 휩싸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1. 한 아버지의 죽음
1761년 가을,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한 가정에 깊은 슬픔이 찾아왔다. 포목상을 운영하던 장 칼라스의 맏아들 마르크 앙투안이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은 자살로 의심할 만한 정황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한 가족의 슬픔은 곧 종교적 증오가 뒤섞인 형사 사건으로 바뀌었다.
장 칼라스는 칼빈주의의 신앙을 따르는 위그노, 곧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였다. 당시 프랑스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사회적·종교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나라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오랫동안 법적 차별과 사회적 불이익을 겪었다. 1685년 낭트 칙령의 폐지 이후 프랑스 칼빈주의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들의 죽음이 알려지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르크 앙투안이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하자 개신교도인 아버지가 이를 막으러고 아들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확실한 증거가 뒷받침하지 않는 주장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소문을 믿기 시작했다.
국가 권력 편에 선 사법부에게 장 칼라스는 더 이상 아들을 잃은 슬픈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칼빈주의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의심 받기에 충분한 신분이었다.
종교적 편견과 정치적 확증편향은 어느 나라에서나 이렇게 작동한다. 사람들은 먼저 한 사람에게 죄인의 얼굴을 그려 놓는다. 그런 다음 그 얼굴에 어울리는 증거를 찾는다. 진실이 편견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편견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한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이러한 군중의 의심을 냉철해야 할 법원이 충분히 걸러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법원은 정치적 편견과 소문과 종교적 적대감이 뒤섞인 사건에서 장 칼라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762년 3월 9일 선고가 내려졌고, 이튿날인 3월 10일 그는 수레바퀴형이라는 잔혹한 형벌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한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도 얻지 못한 채, 아들을 죽인 범죄자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국가는 그를 보호하지 않았고, 법원은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다. 국가는 오히려 법률의 권위로 그의 생명을 빼앗았다.
2. 법정에 들어온 시대의 광기
장 칼라스 사건의 핵심은 한 법관의 잘못된 판단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비극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정치적, 종교적 편견이 사법적 판단에 침투했다는 사실이다.
법원은 진실을 밝히려고 존재한다. 정상적인 법관은 군중이 분노할 때에도 침착해야 하고, 권력이 압력을 가할 때에도 독립성을 지킨다. 사회 전체가 한 사람을 범인이라고 외칠 때에도 법관은 증거가 무엇을 말하는지 살핀다. 그러나 장 칼라스 사건에서 정치적 확증 편향성을 가진 법원은 이러한 사명을 저버렸다.
당시 툴루즈 사회에는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오랜 불신과 적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교적 차이를 단순한 신앙의 차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정치적 적으로 바라보았다.
법관이 내리는 판단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관도 같은 사회에서 자라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두려움과 선입견과 정치적 편향성을 공유한다. 바로 여기에 사법부의 위험이 있다.
사법부의 생명은 시대의 대세를 따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시대의 대세가 진실을 짓밟으려 할 때, 그 앞에 홀로 서는 데 있다. 정치적 권력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법원까지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사법부는 독립된 정의의 기관이라는 이름을 잃는다. 여론이 한 사람을 미워한다고 법원까지 그를 미워한다면, 법정은 군중의 분노를 집행하는 장소로 전락한다.
사법부가 정치적 대세와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는 순간, 법률은 약자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약자를 짓누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장 칼라스의 죽음은 그 위험을 증언한다.
3. 볼테르,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다
장 칼라스의 이야기는 처형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가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면서 판결의 부당함과 종교적 불관용의 위험을 깨달았다.
볼테르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가 아니었다. 칼빈주의 신앙을 옹호하려고 정치적 사건에 뛰어든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한 인간이 정치적 부당성과 종교적 편견과 불공정한 재판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볼태르에게 중요한 것은 장 칼라스가 로마가톨릭교도인가 프로테스탄트인가 하는 사안이 아니었다. 한 인간에게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볼테르는 편지를 쓰고, 자료를 수집하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1763년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을 출판하여 종교적 광신과 불관용을 비판했다.
볼테르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765년 프랑스 왕실의 재심 절차를 거쳐 장 칼라스에 대한 유죄 판결은 뒤집혔고,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법원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빼앗은 생명을 되돌려 줄 수는 없었다. 한 가족의 무너진 삶과 오랜 세월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킬 수도 없었다.
여기에 사법적 판단이 지닌 무거운 책임이 있다. 판결은 종이 위의 문장이 아니다. 그 문장 하나가 한 인간의 자유와 명예를 빼앗고, 때로는 생명까지 빼앗는다.
법관에게 필요한 것은 법률 지식만이 아니다. 자신의 판단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겸손, 권력의 요구를 거절하는 용기, 그리고 법정 앞에 선 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양심이다.
4. 교회는 언제 박해자의 자리에 서는가?
장 칼라스 사건은 교회사에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국가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종교가 아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처벌받았고, 때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국가권력과 긴밀하게 결합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과거에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의 후손이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는 자리에 서기도 했다.
이것은 교회사의 가장 슬픈 역설 가운데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사랑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운 사람들이 때로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증오를 쏟아 냈다. 진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양심의 자유를 억압했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국가의 강제력을 사용했다.
물론 종교적 불관용의 역사를 로마가톨릭교회에만 돌릴 수는 없다. 프로테스탄트 국가와 공동체도 자신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억압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교회사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교파가 더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지 경쟁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교회든 자신의 신앙을 국가권력의 강제력과 결합할 때,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교회가 국가의 칼을 탐하기 시작하면 복음의 설득력을 잃기 쉽다. 국가가 교회의 신앙을 강제하는 순간, 믿음은 자유로운 고백이 아니라 복종의 의무로 변할 수 있다.
장 칼라스의 죽음은 교회에 묻는다.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소유했다는 확신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하는가? 교회는 이 질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5. 나는 사법부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다
장 칼라스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사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생각한다. 법원이 판결했다고 하여 언제나 진실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법률적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일과 역사적·도덕적 진실을 밝히는 일은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판결의 법적 효력을 존중하는 것과 그 판단을 오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니다.
나는 법치주의를 존중한다. 사법부의 독립이 민주사회의 중요한 기둥이라는 사실도 믿는다. 사법부가 권력과 카르텔을 형성하면 그것으로 한 국가는 종말을 고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까닭 때문에 사법부의 판단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자유를 소중하게 여긴다.
특히 정치적 대립과 종교적 갈등이 깊어진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치적 대세는 변한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죄인이 되고, 오늘의 죄인이 내일의 영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정의의 기준을 바꾸지 않아야 한다.
법관의 양심은 권력자의 얼굴을 살피는 눈이 아니다. 진실을 향해 열려 있는 눈이다. 법정은 승리한 정치세력의 환호를 확인하는 장소가 아니다. 패배한 사람에게도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장소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모든 잘못된 판결이 정치적 압력의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법관은 불완전한 증거와 복잡한 법률 사이에서 판단해야 한다. 정당한 법률 해석의 차이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법부를 비판하는 사람 역시 증거와 논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함이 사법부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사법부에 대한 참 존중은 법관이 언제나 옳다고 믿는 데 있지 않다. 법관도 잘못할 수 있기에 그 판단을 검증하고 바로잡을 제도를 지키는 데 있다.
장 칼라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정의가 마침내 승리할 가능성을 보여 준다. 동시에 그가 이미 죽은 뒤에야 판결을 바로잡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정의가 얼마나 늦게 도착할 수 있는지도 보여 준다.
6. 인간의 법정 너머에 있는 정의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모든 제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인간은 선한 제도를 만들 수 있지만,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의 양심까지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성경은 재판에서 공의를 굽게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판단을 달리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재판의 기준은 사람의 지위나 군중의 요구가 아니라 진실과 공의에 있어야 한다.
기독교 역사에는 인간의 법정이 무고한 사람을 정죄한 가장 깊은 기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적대감과 정치권력의 계산, 군중의 요구가 어떻게 얽혔는지 보여 준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십자가형을 허락했다. 그 장면은 법정의 권위가 언제나 정의를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예수는 법정에서 정죄 당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 판결을 정의의 최종 선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와 불의가 얼마나 깊은지 바라본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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