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무너짐은 사법부에 달려 있다
한 국가의 쇠락과 망국은 그 나라의 사법부에 달렸다. 사법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나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급속히 무너진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내란이 일어나거나 경제가 무너진다. 우리 나라 돈의 가치 폭락은 국가 통치자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동에 달려 있다. 국가 통치자의 국제적 신뢰도가 저하되면 먼저 기축 통화의 환율이 크게 요동친다.
1. 통치자의 국제 신뢰도와 환율 변동
아프리카 짐바브웨는 1980년에 미화 1달러와 0.68 짐바브웨 달러라는 환율을 유지했다. 이 나라는 2000년대 후반에 정치지도자의 신뢰도 추락으로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다. 2008년 7월에 미화 1달러가 약 6,880억 짐바브웨 달러에 이르렀고,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2009년에는 1정부가 무려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를 발행했다. 자국의 돈의 가치가 쓰레기보다 가치가 없어지자 국가는 화폐 발행을 포기했다.
남미의 베네수엘라는 공식환율과 시장환율 사이에 한때 약 30배 차이가 벌어지고 이후에는 그보다 훨씬 심각한 화폐가치 붕괴를 경험했다. 현재 튀르키예의 돈이 가치가 폭락하여 시민들의 불만이 매우 크다. 2018년에 미화 1달러가 약 4, 또는 5리라였다. 2026년 8월 25일 현재는 48리라다. 튀르키예의 돈의 가치가 10배로 떨어졌다.
화폐가 쓰레기만큼의 가치가 없어지는 일은 헌재 튀르키예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이 나라는 심각한 고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고, 통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저하되고 있다. 2018년에 미화 1달러가 튀르키예 돈 약 4-5리라였다. 8년 뒤인 현재는 미화 1달러에 대한 튀르키예 화폐의 비율은 약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화 1달러에 약 48리라다. 튀르키예의 사태도 통치자의 경제정책과 제도적 신뢰 추락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환율에 대한 국민의 걱정이 태산 같다. 우리나라 돈이 쓰레기보다 가치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
사법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나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유는 언제나 거대한 함성 속에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 자유는 아주 작은 침묵 속에서 무너진다. 말해야 할 사람이 말하지 않을 때, 막아야 할 사람이 고개를 돌릴 때, 그리고 양심으로 알고 있는 것과 입으로 말하는 것이 서로 달라질 때, 우리가 오랫동안 세워 온 공동체의 기둥에는 작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은 거창한 정치학 교과서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너무 믿지 않아야 한다는 오래된 지혜에서 태어난 제도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진리를 발견한 칼빈주의 교리를 정치에 적용한 결과다.
대통령도 잘못할 수 있고, 국회도 잘못할 수 있으며, 정부도 법원도 잘못할 수 있다. 그래서 자유로운 나라는 어느 한 사람에게 마지막 말을 맡기지 않는다. 권력을 권력으로 견제하고, 그 모든 권력 위에 법을 세운다.
법은 대통령보다 높아야 하고, 정부보다 높아야 하며, 의회와 법원보다도 높아야 한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권력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가?
태풍이 오기도 전에 들판의 풀들이 먼저 한쪽으로 눕듯이, 사법이 권력의 방향을 살피기 시작하면 법은 더 이상 법으로 서 있기 어렵다. 대통령과 관련된 여러 재판이 중단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한 사람의 재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에 ‘견제와 균형’이라는 오래된 약속이 여전히 살아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사법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나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2. 마이크가 켜져 있었다
최근 법무부 장관 정성호 씨의 사적인 대화가 마이크를 거쳐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마이크가 켜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대한민국 사법 체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걱정했다. 절차법 개정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훼손될 수 있으며, 제도가 시행되면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 결국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이상한 슬픔을 느낀다. 그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사안은 오히려 단순했을지 모른다. 무지했다면 무지를 지적하면 된다. 잘못 판단했다면 판단을 바로잡으면 된다. 그러나 법부부 장관은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위험한지 알고 있었고,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 어떤 혼란이 찾아올지도 염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무거운 질문이 남는다. 왜 그 말은 마이크가 꺼졌다고 생각했을 때에야 나왔는가?
3. 인간은 왜 권력 앞에서 침묵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비겁함을 쉽게 비난한다. 그러나 권력 앞에 선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아주 오래된 두려움이 숨어 있다. 자리를 잃을까 두렵고, 사람을 잃을까 두렵고, 권력자의 신임을 잃을까 두렵고, 혼자 남게 될까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 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침묵하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걱정한다. 권력자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권력자가 떠난 뒤에는 한숨을 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언제나 우리를 무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우리의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든다.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의 뜻을 단순히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국가 형사사법 체계를 지키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자신이 보기에 법치주의가 흔들리고 사법 제도가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대통령 앞에서도 말해야 한다. 국무회의에서도 말해야 하고, 국회에서도 말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고독이다. 높은 자리는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더 무거운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4. 가장 위험한 사람은 악한 사람만이 아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반드시 악의를 품은 사람만은 아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침묵한 사람, 위험을 보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먼저 생각한 사람, 마음속으로는 반대하면서 손으로는 그 일을 집행한 사람도 결과적으로 불의가 지나가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다. 우리는 악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악에 협력할 수 있다. 거짓을 믿지 않으면서도 거짓 앞에서 침묵할 수 있다. 잘못을 걱정하면서도 그 잘못을 실행하는 조직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양심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옳고 그름을 아는 능력이 아니다. 양심은 알고 있는 진실을 위해 값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묻는다.
마
이크가 꺼졌다고 생각했을 때 하는 말보다 마이크가 켜져 있을 때 하는 말이 중요하다. 친구들 사이에서 하는 걱정보다 대통령 앞에서 하는 직언이 중요하다. 자리를 떠난 뒤의 탄식보다 자리에 있을 때 감당한 책임이 중요하다.
5. 사직서가 지워 주지 못하는 것
사람은 자리를 떠날 수 있다. 그러나 자리를 떠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했던 일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장관직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장관으로 있을 때의 결정과 침묵과 책임까지 함께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직서는 직책을 끝낼 수 있지만 역사를 지울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매우 단순하면서도 무서운 말을 들려준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저주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향해 먼저 읽어야 할 말씀이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심으며 살아간다. 권력자는 결정으로 심고, 공직자는 책임으로 심으며, 법관은 판결로 심고, 지식인은 말과 침묵으로 심는다. 그리고 때로는 하지 않은 말도 하나의 씨앗이 된다.
말해야 할 때 하지 않은 말, 막아야 할 때 막지 않은 일,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간 순간들이 어느 날 한 사회가 거두어야 할 열매가 되어 돌아온다.
6. 법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양심이다
우리는 좋은 헌법을 만들 수 있다. 훌륭한 법률을 만들 수도 있다. 삼권분립이라는 정교한 장치를 세우고 견제와 균형이라는 아름다운 원리를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 제도를 지키는 것은 사람이다.
판사가 권력보다 법을 두려워하는가? 장관이 대통령의 눈빛보다 자신의 양심을 두려워하는가? 국회의원이 당의 명령보다 헌법의 명령을 무겁게 여기는가?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마지막 방어선은 제도만이 아니라 그 제도를 맡은 사람의 양심이다.
그래서 나는 마이크가 켜져 있었던 그 장면을 단순한 정치적 실수로만 보지 않는다. 그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나는 언제 말하는 사람인가?사람들이 듣고 있을 때 진실을 말하는가, 아니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에만 진실을 말하는가? 권력자가 내 앞에 있을 때 말하는가, 아니면 그가 떠난 뒤에야 말하는가? 내가 잃을 것이 없을 때 말하는가, 아니면 무엇인가를 잃더라도 말해야 할 때 말하는가?
자유로운 나라는 영웅 몇 사람이 지키는 나라가 아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판사,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는 장관, 권력보다 법을 높이는 공직자, 그리고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법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시민들이 함께 지키는 나라다.
들판의 풀은 바람이 불면 눕는다. 풀에게 그것은 죄가 아니다. 풀은 바람을 거스를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다. 그리고 국가의 법과 정의를 맡은 사람에게는 그 양심을 지키라고 맡겨진 책임이 있다.
그래서 권력 앞에서 서 있어야 할 사람이 먼저 눕기 시작할 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용기만이 아니다. 그때부터 법이 눕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권력 앞에 누운 나라에서는 마침내 시민의 자유도 함께 눕는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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