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신학 교수회 입장, 과연 성경적인가?

by reformanda posted Aug 2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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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는 침묵하고 설교자를 정죄하는 고려신학 교수회 입장, 과연 성경적인가?

 

 김한식 목사 (페이스북 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손현보 목사 설교에 관한 발표문을 읽고 참으로 깊은 유감을 느낍니다. 한 사람의 목사가 선포한 설교 네 편을 신학대학원 교수회가 집단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여 공개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고신의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론의 무게만큼이나 논증은 치밀해야 하고, 판단은 신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설교가 선포된 역사적·사회적·목회적 현장을 충분히 살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수회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교수님들은 과연 그 설교가 선포된 현장을 보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설교는 연구실에서 만들어지는 신학 논문이 아닙니다. 설교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인간의 현실을 향하여 선포되는 사건입니다. 물론 설교는 본문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을 자의적으로 왜곡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수회가 이러한 당연한 원칙을 앞세워 설교를 지나치게 본문 해석적용이라는 도식 안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설교했습니까? 아모스가 불의한 권력과 부패한 사회를 향하여 외칠 때마다 먼저 장문의 주석을 제시했습니까? 나단이 다윗 앞에 섰을 때 학문적 주해를 늘어놓았습니까? 세례 요한이 헤롯을 책망하면서 정치적 발언과 복음적 설교의 경계를 먼저 설명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그 여자와 결혼한 것은 옳지 않다고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적 설교였습니다.

설교에는 본문이 있고 동시에 현장이 있습니다. Text가 있다면 Context가 있습니다. 같은 본문이라도 일제강점기의 강단에서 선포될 때와 평화로운 시대에 선포될 때 그 적용이 같을 수 없습니다. 독재와 폭정 아래에서 읽는 말씀과 안정된 민주사회에서 읽는 말씀의 절박성이 같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수회의 발표문에는 오늘 이 나라와 교회가 처한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교수님들께 묻겠습니다. 교회의 자유가 침해받을 때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성경적 가치가 공공 영역에서 조롱받고 무너질 때 강단은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생명과 가정과 결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정면으로 도전받을 때 목사는 침묵해야 합니까? 국가권력이 정의와 법질서를 훼손한다고 판단될 때 교회는 로마서 13장만 읽으며 무조건 복종하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아니면 아모스처럼 외쳐야 합니까?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4 이 한 절이면 충분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한복판에 던져 놓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 역시 설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본문 주해가 충분하지 않다거나 본문에서 정치적 적용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설교 자체를 문제 삼는다면, 그것은 설교를 지나치게 신학교 강의실의 방법론으로 재단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교수회가 설교자의 정치적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정작 교수회의 정치적·사회적 판단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성찰했습니까?

 

설교자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기준을 교수회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교수회가 손현보 목사의 설교를 평가할 수 있다면, 교회 역시 교수회의 신학적 판단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교수회는 무오하지 않습니다. 신학교 교수라는 직함이 특정한 시대 판단을 자동적으로 성경적 판단으로 만들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수회에 요청합니다. 다시 읽어 보십시오. 손현보 목사의 설교만 다시 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수회 자신이 작성한 발표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물어 보십시오.

 

그 글 속에 이 시대의 고통받는 성도들의 현실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그리고 국가권력의 불의 가능성에 대한 개혁주의적 경계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교회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또 불의한 권력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선지자들의 뜨거움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를 말입니다.

 

신학은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신학교는 강단을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강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선포하도록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본문 없는 설교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현장 없는 신학 역시 위험합니다. 본문만 있고 시대가 없다면 설교는 주석 강의가 되기 쉽고, 신학만 있고 고통받는 백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신학은 차가운 관념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들께 다시 묻습니다. 불의한 권력이 하나님의 질서를 짓밟는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도 목사가 침묵해야 한다면, 도대체 언제 말해야 합니까? 교회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도, 생명의 가치가 무너질 때도, 가정과 결혼의 질서가 흔들릴 때도, 법과 정의가 훼손될 때도 강단이 침묵해야 한다면, 목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강단에 서야하는 것입니까? 구원을 말해야 한다고요? 복음을 말해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당연히 구원과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수님들께 다시 묻겠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죄인을 천국 보내는 개인적 위안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이심을 선포하는 복음은 인간의 전 존재와 삶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를 제대로 논의해 봅시다. 누가 정치적인가를 따지기 전에,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를 따지기 전에, 과연 누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 철저하게 서 있는지를 물어봅시다.

 

그리고 교수회가 목회자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심판대에 올렸다면, 교수회의 발표문 역시 한국교회와 고신 공동체의 공개적인 신학적 검증 앞에 서야 합니다.

강단을 향해 칼을 들었다면, 그 칼이 먼저 교수회의 논리에도 견딜 수 있는 칼인지 검증받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 묻겠습니다. 교수회의 보고서가 얼마나 편향적이고 오만한지를 모든 고신교회 앞에 낱낱이 밝히겠습니다.

 

김한식 목사의 글

 

아래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손현보 목사 설교는 고신 정신에 배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지난해 있었던 제75(2025) 고신총회는 손현보 목사의 설교에 대해 총회가 어떤 입장을 갖는지가 교계의 이슈였다. 손현보 목사가 설교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등의 정치적인 설교를 한데 대한 것이다.

 

고신 총회에 속한 3개 노회는손현보 목사의 설교가 교회 헌법과 고신총회 정신에 적절한가에 대한 질의’, ‘손현보 목사의 설교 및 정치 활동에 대한 교단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질의’, ‘설교의 정치 도구화와 교회의 정치 참여에 관한 총회 입장 정리 청원등의 안건을 상정했다. 이에 대해 제75회 고신총회는 총회신학부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 맡겨 1년간 연구케 했다.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는 제76회 총회에 아래와 같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는 고신 총회가 채택한 신앙고백 문서의 설교 이해와 구조적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는 성경이 설교의 중심이 되지 않고 정치적 판단을 보조하는 수단 정도로 사용되었고,설교의 목적이 회심과 성화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함이 아니라 정치적 각성과 행동 촉구에 놓여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설교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보고서에 담았다.

 

아래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이번 총회(2026)에 보고한 내용이다.

 

손현보 목사 설교 네 편,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2026)

 

2025927일 고신총회는, 서울중부노회, 전라노회, 그리고 충청서부노회가 각각 청원한 손현보 목사의 정치 관련 설교(202515, 12, 19, 26일 주일 설교)와 목사의 정치활동 및 교회의 정치 참여 문제를 신학부와 고려신학대학 교수회에 위임하여 연구하게 하였다.

 

세 노회의 청원은 구체적인 근거와 강조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 설교의 정치 도구화와 교회의 정치 참여라는 핵심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서울중부노회는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가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59문과 교회 헌법 예배항목 제19조 및 정치항목 제39조가 규정하는 설교의 정신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전라노회는 정치적 설교로 인해 예배와 설교, 그리고 기도회가 특정 정치적 주장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우려하며, 이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 정립을 촉구한다. 그 신학적 근거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14항을 제시한다. 충청서부노회는 손현보 목사의 정치활동과 설교가 교단과 교회 안에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고 있음을 우려하며, 설교의 정치 도구화와 교회의 정치 참여에 관한 성경적, 신학적 입장을 총회 차원에서 정리해 줄 것을 청원한다.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가 고신 총회 정신에 부합하는가 라는 질문은, 설교에 관한 우리 총회의 신학적, 신앙고백적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과 다름없다.

 

따라서 본 논의에 앞서, 고신 총회가 신조로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 그리고 소교리문답이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고신 총회의 모든 목사는 임직 시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성실히 믿고 따르겠다고 서약한다(시행세칙2.2.1). 이 서약은 해당 신앙고백문서가 단순한 참고 문헌이 아니라, 목사의 사역 전반을 규율하는 신앙고백적 기준임을 확인해 준다.

 

한편,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장과 제314항에 원칙이 명시되어 있으며, 75회 총회에서 채택된 보고서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원칙에 이미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본 보고서는 그 논의를 반복하지 않고,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 관해 집중하여 다루기로 한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와 대교리문답(LC) 및 소교리문답(SC)이 전제하는 설교의 정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그리고 소교리문답은 설교를 하나의 독립된 항목으로 체계적으로 정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문서 전반에 걸쳐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세 문서에 흩어져 있는 설교 관련 진술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신앙고백 문서들이 전제하는 설교 이해를 다음 여덟 가지 항목에 따라 정리한다. (1) 설교의 궁극적 주체, (2) 설교의 도구, (3) 설교의 자리, (4) 설교의 내용, (5) 설교의 방식, (6) 설교의 효력, (7) 설교의 목적, (8) 설교와 교회.

 

1) 설교의 궁극적 주체: 삼위 하나님

 

설교는 성부 하나님께서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구속 사역을 실현하는 사역이다.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택하신 자들을 효력 있게 설득하시어 믿고 순종하게 하시며,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을 다스리신다(WCF 8.8).믿음을 일으키시는 분도 성령이시다(WCF 14.1). 설교의 효력은 설교자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으며,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실 때 설교를 통상적 수단으로 사용하신다(LC 155; SC 89).

 

따라서 설교자는 말씀을 창출하거나 소유하는 주체가 아니라,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위임받아 직무를 수행하는 자이다(LC 158). 설교는 본질적으로 예배의 순서로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사역이다(WCF 21.5).

 

2) 설교의 도구: 위임된 설교자

 

하나님은 교회로부터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를 통하여 설교 사역을 수행하신다(LC 158). 설교의 권한은 설교자 개인에게 본래적으로 속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질서 안에서 직무로서 위임된 권한이다(LC 158).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위임된 도구이다.

 

3) 설교의 자리:공적 예배

 

설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에 따라 드려지는 공적 예배 안에서 수행된다(WCF 2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설교를 공적 예배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로 규정한다(WCF 21.5). 따라서 설교는 단순한 종교적 강연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4) 설교의 내용: 성경, 교리, 은혜 언약

 

설교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신 말씀이다(WCF 1.6). 설교는 새로운 계시를 생산하거나 인간의 전통을 추가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경에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역이다(WCF 1.6). 이 하나님의 뜻은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교리로 이해된다(LC 159).

 

성경의 교리는 은혜 언약을 그 중심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은혜 언약은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복음 시대로 구분되나,이 둘은 실체가 다른 두 언약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베풀어진 하나의 언약이다(WCF 7.6).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으나, 사람이 타락한 후에는 그 언약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을 세우셨다(WCF 7.23).

 

따라서 설교는 본질적으로 말씀의 선포로 정의된다(WCF 21.5; LC 155; SC 89).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설교는 성경에서 벗어날 경우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이 청중에게 설교를 성경에 근거하여 분별하고 점검할 책임이 주어지는 이유이다(LC 160).

 

5) 설교의 방식: 말씀의 올바른 해석과 적용

 

설교의 내용은 성경이지만, 성경 구절을 단순히 반복하거나 인용한다고 해서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되어야 하며(LC 159), 그 말씀이 성도의 삶 속에서 순종과 실천의 열매로 나타나도록 적용되어야 한다(LC 159, 160).

 

해석과 적용은 순서상 구분되지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통합적 사역이다. 설교는 먼저 말씀의 올바른 해석이 이루어지고, 그 해석에 근거하여 적용이 제시되는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이단과 사이비의 존재는, 성경이 잘못 해석될 때 교회와 성도가 얼마나 쉽게 왜곡된 가르침에 빠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개혁교회 전통은 성경 해석이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과 일치하는지를 검증하는 과정을 중시해 왔다. 신앙에 관한 모든 논쟁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성경임은 분명하나(WCF 1.10), 교회는 역사 속에서 신앙고백을 통해 성경의 핵심 교리를 정리하고 보존해 왔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의 해석이 교회가 고백해 온 성경 교리와 일치하는지를 신앙고백 문서를 통해 점검해야 한다.

 

6) 설교의 효력: 성령의 역사

 

설교의 효력은 설교 자체나 설교자의 능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설교의 참된 효력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WCF 14.1; LC 155; SC 89).그러나 성령께서는 자의적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말씀을 수단으로 삼아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신다(WCF 1.5).

 

7) 설교의 목적: 회심,구원,그리고 성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은 아직 믿지 않는 자에게 믿음을 일으키시고(WCF 14.1), 그리스도는 구속의 은덕을 자신의 백성에게 전달하신다(LC 154; SC 88). 설교는 또한 이미 믿는 자를 믿음 안에서 자라게 하여 경건한 삶과 순종의 열매로 세운다(LC 155; SC 89). 이처럼 설교는 죄인을 회심과 구원으로 이끄는 동시에 성도를 성화의 길로 인도하는,구원의 전 과정에 봉사하는 사역이다.

 

8) 설교와 교회, 그리고 치리

 

그리스도께서는 보편적 유형교회에 말씀의 설교를 주셔서 성도들을 모으고 보호하신다(WCF 25.3). 이 교회를 떠나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으며(WCF 25.2), 개체교회의 순수함은 복음 진리를 가르치고 수용하며 공예배를 드리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WCF 25.4). 말씀의 설교는 개체교회의 순수함을 가늠하는 핵심 기준이다.

 

설교는 교회에 맡겨진 천국 열쇠의 사역이다. 교회는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말씀과 권징으로 천국을 닫고, 회개한 죄인에게는 복음의 사역과 권징의 해벌로 천국을 열어 주는 권한을 위임받았다(WCF 30.2).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치리하신다. 천국의 열쇠, 곧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은 교회는 복음을 순수하게 전파함으로써 이 치리를 신실하게 시행해야 한다. 말씀의 설교가 신실하게 시행되지 않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치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성도들은 이 치리 안에 머물도록 권면 받아야 한다. 말씀의 설교와 권징은 그리스도의 치리를 이루는 두 축이기 때문이다.

 

2. 신앙고백 문서의 설교 정의에 근거한 손현보 목사 설교 평가

 

앞서 정리한 신앙고백 문서의 설교 이해에 근거하여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를 검토하되, 8가지 항목 전체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비교적 명백한 판단이 가능한 세 항목, 곧 설교의 내용, 설교의 방식, 설교의 목적에 한정하여 분석한다. 이는 설교 평가가 인상비평이나 사후적 신학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공정하고 검증 가능한 기준과 절차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방법론적 선택이다.

 

1) 설교의 내용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를 검토하면, 내용의 중심은 성경 본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적 위기 진단과 특정 정치인에 대한 평가이다. 설교는 대한민국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을 반복하며, 특정 정치인을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와 연결 짓는 논지로 전개된다.

 

예를 들어,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라는 제목의 설교에서는 아모스 5:24로 추정되는 본문이 언급되지만, 본문에 대한 해석과 설명 없이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공의와 정의라는 표현이 특정 정치인의 제거와 동일시 된다. 이 경우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중심 텍스트가 아니라,이미 형성된 정치적 판단을 정당화하는 상징적 언어로 기능한다.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서는 오늘의 정치 상황이 먼저 설정되고 본문은 현 상황을 뒷받침하는 예시로 언급될 뿐, 본문은 자기 맥락 안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열왕기상1718, 엘리야와 아합 관련 설교에서는 아합이 현대 정치 지도자와 직접 대응되고, 선지자의 심판 선언이 오늘날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규탄과 연결된다. 또한 사사기 4장과 출애굽기 17장 설교 역시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전쟁과 기도의 사건을 현재의 정치 상황과 구조적으로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본문 사용 방식에 대하여 그것이 구약 선지자 전통에 따른 설교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왕과 권력자들을 향해 사회적, 정치적 악을 공개적으로 고발하였으므로, 오늘의 설교자 역시 정치권력을 향해 분명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구약 선지자와 신약 교회의 설교자를 동일한 지위에 놓는 범주 혼동을 내포한다.

 

첫째, 권위의 근거가 다르다. 선지자의 권위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라는 직접 계시 사건에 근거하지만, 설교자는 새로운 계시를 선포하는 자가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직무를 맡은 자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선지자의 선포와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의 해석을 계시적 권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된다.

 

 

둘째, 메시지의 일차적 대상이 다르다. 구약 이스라엘은 언약 아래 구성된 신정 공동체, 곧 구약 형태의 교회였으며(7:38), 선지자들이 고발한 왕은 세속 정치인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의 직분자였다. 이 구조를 오늘에 적용한다면 선지자적 메시지의 일차적 대상은 세속 정치권력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이어야 한다. 그 방향을 건너뛰고 곧바로 외부 정치 권력에 대한 규탄으로 나아가는 것은 선지자 전통을 그 신학적 맥락에서 분리하여 선택적으로 차용하는 것이다.

 

셋째, 선지자적 고발의 목적과 방향이 다르다. 선지자들의 고발은 언제나 회개로의 초대와 언약적 회복을 향해 있었다. 심판 선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이끄는 수단이었다. 이 구조 안에서 죄의 진단은 언약 공동체 전체를 향한 자기 성찰로 확장되며, 설교자 자신과 청중을 먼저 포함한다. 그러나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서는 죄의 진단이 성도와 교회를 향한 내적 성찰로 이어지지 않고, 특정 정치 인물과 세력에 대한 규탄으로 집중된다. 이것은 선지자적 고발의 형식은 빌리되 그 신학적 목적과 방향은 버리는 것이다. 선지자 전통의 핵심이 공동체의 회개와 언약적 갱신에 있다면, 그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설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향한 자기 성찰을 담아야 한다.

 

아울러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는 은혜 언약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은혜 언약의 기본 구조는 인류가 당면한 가장 결정적인 문제(죄와 비참, 하나님의 진노와 사망)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유일한 해결책(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과 구원과 축복)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서 나라와 교회가 당면한 가장 긴급한 문제는 특정 정당의 의회 전체주의이며, 그러므로 그 해결책은 그 특정 정당을 몰아내는 것으로 제시된다. 결과적으로,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서 성경은 설교의 내용을 생성하는 원천이라기보다,정치적 결론을 보조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2) 설교의 방식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는 모두 유사한 구조를 반복한다.설교는 대체로 대한민국이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위기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선언으로 시작되며, “나라가 망한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와 같은 표현과 함께 서두에서부터 특정한 정치적 결론이 명확히 제시된다.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선언은 청중의 정치적 정서에 직접 호소하여, 정치적 위기감과 불안, 분노를 고조시킨다.

 

이러한 감정적 긴장이 충분히 조성된 이후에야 성경 본문이 후행적으로 호출된다. 그러나 이때 성경 본문은 설교의 출발점이나 해석의 중심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제시된 정치적 판단과 행동 촉구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동원된다.본문이 설교의 논지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도출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보조적 자료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 결과 설교의 전체 구조는 신앙고백 문서가 전제하는 해석과 적용의 질서와 정반대 방향을 취한다. 신앙고백 문서가 요구하는 핵심은 해석이 적용보다 시간적으로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용이 반드시 해석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손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서는 그 관계가 역전되어, 적용이 먼저 설정되고 해석은 그 적용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정치적 판단이 우선되는 설교 진행 방식은 설교의 자리인 공예배 자체의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손 목사는 예배 중에 회중들에게 특정 정치적 구호를 외치게 했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에서 공예배는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교회를 형성하시는 자리이지,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입장을 중심으로 회중의 결속을 형성하는 집회가 아니다. 정치적 위기일수록 설교가 더욱 예배다워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설교는 누구를 지지해야 하는가를 결정해 주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묻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해석과 적용,그에 따른 순종의 결단이 아닌 정치적 구호가 선행하는 진행 방식은 이러한 예배와 설교의 본래 질서에서 벗어난다.

 

3) 설교의 목적

 

이와 같은 설교의 내용과 방식을 종합할 때, 손현보 목사의 해당 설교들이 실제로 지향하는 목적은 비교적 분명하다.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정치적 위기 인식을 공유하게 하고, 교회가 정치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결단을 촉구하며,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반대 의식을 형성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러한 점에서 손현보 목사 설교의 목적은 죄인을 회심으로 이끌고 성도를 성화의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는 데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정치적 각성과 행동을 조직하는 데 맞추어져 있다고 평가된다.

 

이와 같은 설교의 목적을 공적 신앙의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신앙의 필요성은 신자의 삶 전반에 적용되는 일반 원리로서, 성도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신앙적 책임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이다. 반면 설교의 본질은 공예배 안에서 은혜의 방편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의 직무에 관한 규범적 문제이다. 전자가 신자의 사회적 실천을 다룬다면, 후자는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이 두 범주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나 동일하지 않다. 공적 신앙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설교가 그 실천의 직접적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자동으로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설교가 성도를 복음으로 형성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함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영향은 형성과 분별을 통한 간접적 결과이지 특정 정치적 행동을 직접 명령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설교가 특정 정치적 판단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여 동의를 요구할 경우, 이는 공적 신앙의 실천을 돕는 행위가 아니라 양심을 속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밝히는 바와 같이, 하나님만이 양심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사람이 만든 교리와 계명으로부터 양심이 자유하게 하셨다(WCF 20.2). 설교가 특정 정치적 결론에 대한 동의를 신앙의 충성과 연결하는 순간, 그것은 신자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기보다 제한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아울러 특정 정치적 판단을 설교하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도록 하고,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지닌 그리스도인들과의 대립을 초래하며, 교회 분열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설교는 교회가 특정 정치 세력의 편에 서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도 있다. 교회가 특정 정치 세력과 동일시될 때,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지닌 이들에게 복음은 정치적 메시지로 들릴 수 있으며,이는 복음 전파의 문을 닫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4)결론

 

 

손현보 목사의 네 편 설교는 내용, 방식, 목적 전반에 걸쳐 고신 총회가 채택한 신앙고백 문서의 설교 이해와 구조적으로 충돌한다. 손 목사의 네 편의 설교에서 성경은 설교의 중심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을 보조하는 수단 정도로 사용되고, 성경의 올바른 해석의 기초 가운데 적용이 이루어지지 않으며,설교의 목적은 회심과 성화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함이 아니라 정치적 각성과 행동 촉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서울중부노회, 전라노회, 충청서부노회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과 같이 손현보 목사의 네 편의 설교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고신 교회의 목사들은 강단이 정치적 목적에 종속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교회 헌법과 그 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설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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