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트비히 뮐러(Ludwig Müller, 1883-1945) 주교,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나치주의 이념에 맞춰 통합하려 한 '독일 기독교 운동'(Deutsche Christen)'의 지도자, 나치 정권에 협력한 어용 단체인 독일 복음주의 교회-국가교회(Reichskirche)의 제국 주교(Reichsbischof)였다. 1934.09 사진.
교회의 침묵은 이미 정치적이다
광장에 서지 않는 신학은 배신이다. 교회가 침묵할 때, 그 침묵은 이미 정치적이다. 신앙고백은 침묵하지 않는다. 침묵은 실제로는 강자의 편이며, 중립은 실제로 폭력의 연장이다.
독일 나치 정권 아래에서 일부 프로테스탄트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권력 앞에서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아니오”(Nein)라고 말했다.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 중심으로 형성된 이 흐름은 ‘고백교회’라 불렸다. 그들의 저항은 충동이나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치밀한 신학적 성찰과 교리적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맞섰던 것은 특정 정당이나 정책이 아니라, 국가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상황 그 자체였다.
고백교회의 문제의식은 교회가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결코 중립이 아니라 이미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폭력과 차별이 제도화되고, 거짓이 공적 언어로 승인되며, 약자의 고통이 ‘국가의 필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상황에서, 말하지 않겠다는 선택은 가치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힘의 구도 속에서 언제나 강자의 편으로 기운다. 중립은 실제로는 강자의 편이며, 침묵은 실제로는 폭력의 연장이다. 교회가 말하지 않으면, 그 공백을 정치권력과 국가는 즉시 채운다. 본회퍼와 바르트는 바로 이 점을 신학적으로 꿰뚫어 보았다.
나치 국가는 민족, 혈통, 지도자(Führer), 역사적 운명을 절대화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정치적 상징이 아니라, 신앙적 충성을 요구하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국가가 스스로를 ‘운명’과 ‘계시’의 언어로 포장하는 순간, 신앙의 영역은 잠식되기 시작했다. 고백교회는 이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고백이다. 국가와 민족, 지도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으며, 그 어떤 역사적 사명도 계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 확신은 1934년 “바르멘 신학 선언”으로 공식화되었다. 바르멘 선언은 교회의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교회의 신앙 고백이었다.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임을 천명하며, 교회가 다른 어떤 권위—국가, 민족, 이념, 지도자—를 계시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는 나치 국가가 요구한 종교적 충성에 대한 신학적 거부였고, 교회가 더 이상 국가의 종교 부속물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바르멘 신학 선언"의 또 다른 핵심은 국가 권력의 한계를 분명히 규정했다는 점이다. 고백교회는 국가를 무정부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국가는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한 상대적 제도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상대성은 곧 한계를 뜻한다. 국가는 교회의 설교를 통제할 권한이 없고, 인종 이데올로기를 신앙으로 강요할 권리도 없으며, 폭력을 ‘질서’로 포장해 정당화할 수 없다. 국가가 이 선을 넘을 때, 교회는 순종을 멈추고 저항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고백교회는 이 저항을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신앙의 순종으로 이해했다.
본회퍼의 사상은 이 지점에서 더욱 급진적이다. 그는 복음을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로 구분했다. 값싼 은혜는 고백은 있으되 순종이 없는 은혜, 십자가는 말하지만 따름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다. 정치적 폭력과 제도적 차별 앞에서 교회가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침묵할 때, 복음은 값싼 은혜로 전락한다. 그것은 개인의 경건을 보호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이웃의 고통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반대로 값비싼 은혜는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로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을 요구한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서야 할 자리에 서는 용기를 요구한다. 본회퍼는 이 통찰을 더 깊이 파고든다. 감옥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그는 신학자의 언어가 얼마나 쉽게 자기보존의 장치로 변질되는지를 고백한다.
교회와 신학교, 강단과 학문은 때로 진리를 선포하는 공간이 아니라, 진리를 유예하는 공간이 된다. “중립을 지켜야 한다”, “교회는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은 신중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력이 계속 작동하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본회퍼는 이런 침묵이 결코 무해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그래서 “교회가 침묵할 때, 그 침묵은 이미 정치적이다”라는 명제가 나온다. 이는 과장된 수사가 아니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기능을 가진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교회는 폭력을 비판할 자리를 비워주고, 국가는 그 자리를 차지해 자신의 언어를 정상으로 만든다. 중립을 선언하는 순간, 교회는 실제로는 힘의 우위에 있는 쪽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점에서 본회퍼는 중립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한다. 중립은 선택이며, 그 선택은 언제나 결과를 낳는다.
고백교회의 저항은 정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심과 무관했다. 그들은 국가를 교회 아래 두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서기를 원했다. 교회는 민족 공동체의 이념을 축복하는 기관도, 국가 정책을 합리화하는 도구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다. 국가가 교회의 입을 막고, 설교자의 비판과 충고를 금지할 때, 교회는 침묵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침묵은 그 순간 교회의 자기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고백교회의 “아니오”는 정치적 전략이 아니라 신앙 고백이었다. 그것은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계산이 아니라, 복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분열과 박해, 감옥과 죽음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대가는 교회의 존엄을 지켰다. 본회퍼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복음이 여전히 현실을 향해 말할 수 있음을 증언한 사건이었다.
이 유산은 오늘에도 여전히 현재형 질문으로 남아 있다. 정치 권력이 폭력을 행사하고, 비판의 언어를 봉쇄하며, 설교자와 신학자의 입을 막으려 할 때, 교회는 어디까지 순종할 수 있으며, 어디서 반드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가? 독일 고백교회는 그 질문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하지 않음이, 그들의 신앙을 오늘까지 살아 있게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 특히 1938년 전후로 한국교회가 맞닥뜨린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도 결정적인 시험이었다. 일본 제국은 이미 신도(神道)를 사실상의 국교로 삼은 종교국가였고, 천황을 신적 존재로 이해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제국 전역에 강요했다. 신사참배는 단순한 국가의식이나 시민적 예절이 아니라, 천황과 신들을 향한 종교 행위였으며, 기독교 신앙의 기준에서 볼 때 명백한 우상숭배였다.
이 점은 당시 일본교회,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에 파송된 미국·호주·캐나다 선교사들 모두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일제의 주장은 신학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의 폭력적 통치와 전쟁 동원 체제 속에서 한국교회는 결국 그 명령에 집단적으로 순복하고 말았다.
한국교회의 대표자들은 오히려 솔선수범하여 일본 도쿄와 나라 지역의 신사를 찾아가 참배했다. 교회당의 종과 철문을 뜯어내어 일제의 전쟁 무기 제작을 위한 철물로 바쳤고, 강단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선포되지 않았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침묵했고, 그 침묵은 곧 우상숭배에 대한 동조로 굳어졌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보호하려다, 신앙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두가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극히 소수였지만, 이 불의한 권력 앞에서 분명히 “아니오”, “절대 불가하오”라고 말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이다. 그들은 신사참배를 단순한 정치 문제나 문화적 적응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라는 요구였고, 신앙의 근간을 부정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 권력에 순종하지 않았다.
이들의 선택은 곧바로 혹독한 대가로 이어졌다. 체포와 고문, 장기 투옥이 뒤따랐고, 많은 이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해방의 날인 1945년까지 약 5년 이상 동안 감옥에서 신앙을 지킨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 저항가가 아니라, 신앙의 증인이었다. 국가 권력이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넘보는 순간, 교회는 침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흔히 간과되어 왔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판 ‘고백교회’의 역사이다. 독일 나치 정권 아래에서 “바르멘 신학 선언”으로 국가 권력의 신앙 침범에 “아니오”라고 응답한 고백교회가 있었듯이, 한국에는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 이를 거부하며 신앙의 선을 지킨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존재했다. 두 사건은 역사적·문화적 맥락은 달랐지만, 국가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볼 때 교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라는 동일한 신학적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의 경우 저항이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공식적 선언문의 형태로 집단화되었고, 한국의 경우 저항이 순교와 장기 투옥이라는 실존적 증언의 형태로 남았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신학적 언어로 정제된 선언이 남았고, 한국에서는 제도적 보호 없이 신앙 양심을 지킨 소수의 생애가 기록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 둘은 무게와 가치에서 결코 경중을 달리할 수 없다. 선언으로 표현된 고백과 삶으로 치러진 고백은 서로 다른 방식일 뿐, 동일한 신앙적 결단에 속한다.
이 역사는 오늘의 교회에 매우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교회가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결코 중립이 아니라 이미 정치적 선택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다수 한국교회의 침묵은 교회 조직을 당장 해체시키지는 않았지만, 신앙의 중심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교회 조직은 존속했으나, 예배의 대상에 대한 고백은 무너졌다. 결과적으로 집단적 배교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반면, 극소수의 “아니오”는 교회 조직을 보호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복음의 존엄과 하나님의 주권을 보존했다.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은 교회가 언제 반드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그것은 정치 체제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특정 이념에 대한 지지나 반대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신앙 고백 자체가 위협받을 때, 교회는 침묵할 수 없다는 원칙의 문제다. 이 원칙은 시대를 초월하며, 오늘의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독일의 고백교회와 한국의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았고, 중립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신앙의 이름으로 “아니오”라고 말했다.
“침묵은 중립”이라는 통념은 신학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침묵은 언제나 기능하며, 그 기능은 대개 강자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설교자의 침묵은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 중립은 종종 책임 회피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역사적·신학적 성찰은 오늘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도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국가 권력이 신앙의 영역에 개입하고, 선지자적 비판과 충고의 기능을 법과 제도로 제한하려 할 때, 교회는 다시 한번 동일한 질문 앞에 선다. 선지자의 입이 막히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영적·도덕적 붕괴로 나아간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에 이 사실을 경고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필자가 집필한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 신학 선언』(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은 독일 고백교회와 한국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비교 연구한 것이다. 신학 박사인 칼 바르트가 초안을 작성한 “바르멘 신학 선언”(1932)과,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만주 지역 한국교회 전도사들이 금식과 성경 연구를 거쳐 작성한 “장로교인 언약”(1940) 문서가 신학적 무게와 신앙적 가치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함을 규명한다. 이는 신학의 권위가 학위나 제도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서는 고백의 진실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한다.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침묵하지 않음은 과거의 영웅담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교회가 다시 배워야 할 신앙의 기준이며, 교회가 역사와 사회 앞에 설 때 붙들어야 할 양심이다. 교회는 언제나 질문받는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침묵은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침묵은 과연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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