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교분리 원칙과 이슬람 딤미(Dhimmi) 제도
최근 대한민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검찰과 법원의 해석은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개인의 권리로 폭넓게 보호하기보다는, 국가가 일정한 기준을 정하고 그 틀 안에서만 종교 활동을 허용하려는 방향으로 점차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신앙을 통제하고 활동을 제한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현재, 이러한 흐름은 종교를 자유의 주체로 보기보다는 관리와 감독의 대상으로 보는 이슬람 국가의 시각에 가깝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이슬람 역사 속의 딤미(Dhimmi) 제도를 떠올린다. 국가가 종교를 관리하거나 보호하거나 신앙과 활동을 제한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국가가 종교를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 신앙의 자유, 종교의 자유, 설교의 자유는 여러 단계 뒤로 물러나게 된다.
딤미 제도는 이슬람 국가 안에 살던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적용된 법적 지위이다. 딤미라는 말은 ‘보호받는 피지배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슬람 국가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해 제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동등 시민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일정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는 방식의 제도를 운영한다. 딤미 제도는 평등한 공존이 아니라 이등 국민에 대한 조건부 허용 체계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완전히 낯선 종교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이슬람과 같은 뿌리를 가진 ‘성경의 백성’으로 인정한다. 이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전면적으로 박해하거나 강제로 개종시키는 방식 대신, 이등 시민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딤미 제도는 바로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 제도이다. 즉, 완전한 배제도 아니고 완전한 수용도 아닌, 차별적이고 제한된 공존의 방식이다.
딤미의 핵심 의무는 ‘지즈야’라는 세금을 내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는 종교적 의무로 군 복무나 자카트라는 종교세를 부담하지만,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군 복무 대신 인두세 성격의 지즈야를 납부한다. 그 대가로 군대에 끌려가지 않았고, 외부 침략이나 내부 폭력으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종교 공동체 내부의 결혼, 상속, 예배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종교법과 관습에 따라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제한적 자치권도 허용된다.
겉으로 보면 이 제도는 어느 정도 관용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딤미 제도에는 분명하고 구조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딤미에 해당하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이슬람교도보다 법적·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놓였다. 이들은 명백한 이등 국민이다. 이슬람교를 비판하는 발언은 엄격히 금지되고, 다른 종교로의 포교는 범죄로 취급된다. 교회나 회당을 새로 짓는 데에도 제한이 있고, 외형이 이슬람 사원보다 눈에 띄지 않도록 규제를 받는다. 공직에 오르는 길도 사실상 막혀 있었으며, 법정 증언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딤미 제도는 종교 간 평등을 전제로 한 공존이 아니다. 차별을 제도화한 상태에서의 공존이다. 이 제도 아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살아갈 수는 있었지만, 동등한 시민으로 존중받지는 못한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딤미 제도 아래에서도 실제 운영 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가 무어인이 지배했던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이다.
무어 스페인의 알 안달루스 지역은 흔히 ‘콘비벤시아’, 즉 공존의 시대로 불린다. 이 시기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단순히 보호 대상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들은 국가 운영과 문화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외교관, 재무관, 의사, 학자 등으로 활동하며 이슬람 엘리트들과 지적 교류를 나누었다. 아랍어는 종교를 넘어 지식인 사회의 공용어가 되었고, 철학과 과학, 의학과 수학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가 나타났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섞이며 찬란한 문명이 형성된 시기였다.
그러나 이 공존은 언제나 불안정했다. 북아프리카에서 들어온 강경한 이슬람 왕조가 집권하면서, 이전의 관용은 사라지고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기도 했다. 즉, 무어 스페인의 공존은 제도의 안정성보다는 통치자의 성향과 시대적 상황에 크게 의존했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보다 체계적이고 행정적인 방식으로 딤미 제도를 운영했다. 오스만은 ‘밀레트 제도’를 거쳐 종교 공동체를 독립된 행정 단위로 조직했다. 유대인 공동체, 정교회 공동체 등은 각자의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내부 문제를 자율적으로 처리했고, 국가는 이 지도자들을 통해 세금과 질서를 관리했다. 이 방식은 국가 입장에서는 효율적이었고, 소수 종교 집단 입장에서는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역시 폭력적인 제도를 함께 운영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해 이슬람 군인으로 키운 ‘데브시르메’ 제도였다. 이 제도를 통해 길러진 군대가 예니체리였다. 예니체리는 초기에는 강력한 정예군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기득권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가톨릭 왕정이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뒤 유대인들을 추방했을 때, 이들을 받아들인 나라가 오스만 제국이었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는 역사적 사례다. 오스만 술탄은 유대인들을 쫓아낸 스페인 왕을 어리석다고 평가하며, 상공업과 금융, 기술에 능한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제국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경제와 기술 발전에서 실질적인 이익을 얻었다.
이 사례는 딤미 제도가 단순한 박해 체계로만 작동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어떤 시대와 장소에서는 억압의 장치였고, 다른 경우에는 박해를 피해 도망친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딤미 제도가 결코 종교의 자유나 시민적 평등을 전제로 한 제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지즈야의 액수는 시대와 지역,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달랐으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감면되거나 면제되기도 했다. 이런 세부적 조정에도 불구하고, 딤미 제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근대 제국이 다종교 사회를 관리하기 위해 선택한 현실적이고 제한적인 타협이었다. 이 제도는 언제나 권력, 종교, 정치적 이해관계가 긴장 속에서 맞물리며 작동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종교의 자유를 논할 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종교를 국가가 허용하고 관리하는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국가 권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근본적 자유로 볼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역사는 분명히 말해 준다. 종교가 국가의 ‘보호받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자유는 이미 여러 단계 뒤로 물러난 상태라는 사실을 말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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