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안의 언어를 떠나 광장으로
나는 오랫동안 ‘목사’라는 직함과 ‘신학자’라는 성채 속에 은거해 왔다. 그 성벽 안에서 나의 세계는 평온했다. 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나의 문장은 신성한 정당성을 획득했고, 거장 신학자들의 이름을 호명할 때마다 무거운 담론들은 마법처럼 명쾌하게 매듭지어졌다. 나를 향해 신뢰 어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진리의 심장 곁에 서 있다는 감미로운 안도감에 젖어 있었다. 그곳에선 어떤 날카로운 질문도 나를 상처 입히지 못했다. 신학적 언어들은 추운 겨울날의 담요처럼 나의 영혼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그러나 근래에 초등학교 동기회, 고등학교 동기회에 참석하면서, 문득 서늘한 자각이 나를 깨웠다.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익숙한 언어들이, 사실은 나를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둔 보이지 않는 창살이었다는 사실이다. 철학, 역사, 신학이라는 화려하고 정밀한 어휘들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으나, 동시에 나의 존재론적 두려움을 은닉하는 은신처였다. 나는 진리를 유창하게 설파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교 강단과 교회 설교단 밖의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정작 진리라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맨발로 숨 쉬며 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교회의 육중한 문을 밀고 광장으로 나서는 순간, 내가 머물던 학문 세계의 빈곤함은 처연할 정도로 선명해진다. 평생을 공들여 연마해 온 나의 언어들은 광장의 소음 속에서 빛을 잃고 바스러진다. 세상은 나의 전문성에 경탄하지 않는다. 내가 정교하게 직조한 교리적 문장들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시장 한복판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층위의 질문을 던지고, 전혀 다른 결의 언어로 생의 고통을 앓고 있다. 그 낯선 침묵과 외면 앞에서 나는 깊은 당혹감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 처절하게 묻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당신의 가장 귀한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의 뒤를 따른다는 나는 왜 세상을 향해 건넬 단 한 시간의 온전한 언어조차 갖지 못한단 말인가.
신학과 복음은 ‘내부 방언’이라는 비좁고 밀폐된 방 안에 너무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우리끼리는 감동하고 전율하며 공명하지만, 담장 밖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울림이 있고, 어떤 실존적 파동을 일으키지만, 그 범위가 넓지는 않다. 시장과 광장은 나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나의 학문은 거룩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도, 절망하는 이의 희망을 흔들어 깨우지도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진다.
만약 내가 성경의 구절이나 신학적 권위라는 지팡이 없이, 오직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갈망, 정의와 희망에 대해 세상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라고 자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슴 저리게 깨닫는다. 기독교의 진리는 교회라는 작은 식탁의 조미료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광대하고 깊은 심연이다. 개인의 내면을 잠재우는 사적인 위안을 넘어, 이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지를 선포하는 엄연한 ‘공적 진리’다. 복음이 진정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예배당의 닫힌 공기를 데우는 온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광장의 차가운 칼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숨결이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교회라는 작은 무대의 조명 아래서 안주해 왔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이들의 박수와 ‘좋아요’라는 가벼운 인정에 취해 있었다. 정작 내 목소리는 교회당과 신학교 강의실 밖의 시장과 광장에서 울림이 없다. 예수는 언제나 우리를 문밖으로, 저 소란스럽고 거친 광장으로, 상처 입은 육신들이 부딪치며 신음하는 삶의 현장으로 밀어내신다.
나는, 이제라도 광장에서 대화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저울의 눈금을 속이지 않는 시장 상인의 정직한 손마디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이웃의 슬픔을 닦아주는 이들의 고요한 헌신 속에서, 화려한 수식보다 무거운 ‘삶의 진실’을 신학으로 읽어내고 싶다. 신학은 설명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며, 복음은 증명되기 전에 관계 속에서 향기로 드러나야 함을 확인하고 싶다.
이 고백은 패배의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권위 있는 언어의 장막 뒤에 감추어져 있던 나의 불안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정직한 방언이다. 나는 여전히 떨리고 나의 문장은 여전히 빈약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에 충실하면서도 세상과 진실하게 소통하는 좁은 길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그 희미한 그러나 확실한 서광을 붙들고 있다. 비록 광장에서 내가 거절당할지라도, 그 길 끝에 예수가 이미 서 계시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걷게 한다.
이제 나는 내부 방언이라는 안전한 감옥의 문을 부수고, 광장의 한복판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세련된 과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나를 보호하던 낡은 갑옷을 벗어 던지는 고통스러운 해방의 과정일 것이다. 오늘, 내가 새롭게 펼쳐 든 새로운 신학의 첫 페이지는 바로 그 거칠고 눈부신 광장에서 시작될 것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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