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imney Rock, NC
아케다와 성탄절 사이에서, 아들을 생각하며
성탄절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기쁨보다 무게를 먼저 느낀다. 거리의 불빛과 캐럴은 밝지만, 내 안에는 쉽게 밝아지지 않는 방 하나가 남아 있다. 그 방에는 오래 묶여 있는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의 이름은 ‘아들’이다. 그리고 성경 속 오래된 단어 하나가 그 기억과 겹쳐진다. ‘아케다’(결박).
아케다는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예루살렘, 모리아 산, 제단, 장작, 칼, 그리고 침묵. 그러나 나에게 아케다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상태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결박된 아들을 떠올리며 성탄절을 맞이한다. 그는 자신이 묶여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확실하다. 나는 그 끈을 풀 지혜를 알지 못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했을 때, 성경은 그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는다. 눈물도, 흔들림도, 밤의 고독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 오히려 나를 더 아프게 한다. 왜냐하면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는 선택들, 말해지지 않은 희생들, 그리고 결과로 남은 거리로 이어진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침묵을 ‘공포와 전율’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윤리로 설명할 수 없는 자리, 타인에게 정당화될 수 없는 결단의 자리였다. 나는 그 철학적 언어를 읽으며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어떤 결단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학문의 길을 걸었다. 부름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오랜 학문의 길 위에서 나는 아들을 충분히 안아주지 못했다. 나는 그를 직접 제단에 올려놓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늘 ‘다음에’, ‘조금만 더 지나서’, ‘이번 학기만 끝나면’이라는 말 아래 묶여 있었다. 하나님의 부름과 삶의 절박한 현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뿐, 할 말이 없다. 아들은 아직도 자신이 풀려나지 않은 듯하다. 나의 느낌은 틀리지 않다.
성탄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보내심’이 아니라, 스스로 결박되기로 하신 선택의 시작이었다. 하늘의 영광이 육신에 묶였고, 무한이 유한에 갇혔으며, 자유가 연약함 안으로 들어왔다. 말구유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신성이 스스로를 제한한 자리였다.
교부들은 모리아와 골고다를 하나의 직선으로 보았다. 나는 이제 거기에 베들레헴을 더한다. 모리아에서는 아들이 풀려났고, 골고다에서는 아들이 풀려나지 않았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는, 그 풀리지 않을 결박을 향해 하나님이 스스로 내려오셨다. 성탄은 해방의 축제이기 이전에, 구속을 위한 결박의 수락이다.
이삭은 칼 아래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차이가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풀어내지 않으셨고, 나는 내 아들이 묶인 채로 살아왔다. 물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고통 앞에서, 그 변명은 충분하지 않다.
성탄절에 나는 기도하지만, 그 기도는 온전하지 않다. 감사와 찬양 사이에 회한이 끼어들고, 희망과 기쁨 사이에 후회가 스민다. 나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주신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내가 내어주지 말았어야 할 것을 내어주었고, 붙들어야 할 것을 놓쳤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들은 아직도 결박된 상태인 듯하다. 풀어줄 수 있는 방법도, 지혜도 지금의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성탄은 나에게 해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서는 자리이다.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결박된 아들의 곁에 계셨다는 사실이다. 말구유의 아기는 결박된 자의 하나님이었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풀려나지 못한 이들의 형제였다. 성탄은 모든 결박을 즉시 푸는 사건이 아니라, 결박당한 자리로 하나님이 오신 사건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성탄을 축하하기보다, 조용히 지킨다. 아브라함처럼 아무 말 없이 산을 오르지는 않지만, 적어도 침묵을 배우려 한다. 아들의 상처를 설명하지 않고, 정당화하지 않고, 그 곁에 머무는 법을 배우려 한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로서 실패한 자리 위에 서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아버지의 자리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성탄은 말없이 증언한다. 그 증언 하나로, 나는 오늘을 견딘다. 아케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탄은, 결박이 마지막 말이 아님을 조용히 속삭인다.
2025년 성탄절에
최덕성, 고백명상 1-3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