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좌파가 될 수 없는가?
최근 “기독교인은 좌파가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어떤 목사님께서 그 분의 페이스북에 쓰셨다. 나는 그 문제 제기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논의의 전제가 되는 언어 사용과 신학적 기준이 충분히 성찰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그 글이 의도하는 ‘포용’과 ‘균형’의 언어가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흐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글에 대한 반론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쓰는 이 글은 좌파와 우파를 감정적으로 낙인찍기 위한 글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신앙이 좌파 사상과 맺는 관계를 지나치게 부드러운 언어로 약화시키는 글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이런 논쟁이 반복적으로 엇갈리는 이유는, 단순한 정치 입장 차이라기보다 언어가 작동하는 구조의 차이도 한 몫 한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의 의미는 단어 자체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소쉬르에 의하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언어 체계인 랑그(langue) 안에서, 개인이 실제로 발화하는 빠롤(parole)이 의미를 형성한다. 따라서 같은 단어라도, 그것이 놓여 있는 문화적, 사상적 구조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 작용을 할 수 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글자는 기호인데, 같은 글자라도 말하는 사람의 배경이나 경험, 문화 등의 구조(streucture)에 의해서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식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한국 사람은 밥과 반찬을 떠올리지만, 미국 사람은 빵과 우유를 떠올리게 된다. 김치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도, 어떤 사람은 잘 익은 묵은 김치를 생각하면서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막 담은 햇김치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의 차이는 개인의 배경이나 경험, 문화 등의 구조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주의(structuralism) 철학은 소쉬르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 목사님이 말하는 ‘좌파’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을 제거한 개념이다. 그것은 복지, 평등, 사회정의라는 시민윤리적 관점으로 재구성된 좌파다. 반면,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문제 삼는 ‘좌파’는 정책 스펙트럼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 곧 인간, 역사, 구원에 대한 총체적 이해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논쟁은 필연적으로 평행선을 그린다.
그러나 좌파 사상은 단지 ‘다양한 좌파가 있다’는 말로 무마될 수 있는 느슨한 범주가 아니다. 좌파 사상의 형이상학적 뿌리는 분명히 유물론이며, 그 사상적 정점에는 카를 마르크스가 있다. 착한 사탄은 있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그저 생산관계의 산물일 뿐이다.
죄는 덕적·영적 문제가 아니다. 죄란 구조적 모순일 뿐이다. 구원은 초월적 은혜가 아니다. 구원은 역사 내부의 해방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며, 예수님은 인간 소외의 투사로 해석된다.
이 유물론적 토대 위에서 발전한 좌파 사상은, 급진적 공산주의든 온건한 사회민주주의든 형이상학적 긴장을 공유한다. 정책의 강도는 달라질 수 있으나, 인간 문제의 근본 진단과 구원의 방향은 동일한 궤도 위에 있다.
미셸 푸코의 담론 분석은 이 문제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은 중립적 언어가 아니라, 무엇을 문제로 규정하고 무엇을 해결책으로 제시할지를 결정하는 권력의 구조다.
‘사회정의’, ‘평등’, ‘해방’이라는 언어는 그 자체로 선해 보이지만, 그 담론이 전제하는 인간 이해와 구원 서사는 거의 질문되지 않는다. 이 담론 속에서 문제는 죄가 아니라 구조가 되고, 해결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국가와 제도가 된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담론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자원으로만 사용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프란시스 쉐퍼 목사님의 경고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쉐퍼는 정치 체제 자체보다, 그 체제가 서 있는 세계관의 토대를 문제 삼았다. 인간의 이성과 제도를 궁극적 해결책으로 삼는 사상은, 그것이 아무리 인도적이고 온건한 형태를 띠더라도, 성경적 세계관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쉐퍼에게 문제는 좌파의 급진성이나 폭력성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구원 서사였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 역사가 스스로 완성될 수 있다는 기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쉐퍼목사님에게 보수와 진보의 문제는 단순한 정치 성향이 아니라, 무엇을 최종 기준으로 삼느냐의 문제였다. 인간의 이성과 제도를 궁극적 해결책으로 삼는 사상은, 그것이 아무리 온건한 형태를 취하더라도, 성경적 세계관과 긴장 혹은 대립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존 칼빈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훨씬 이전에 꿰뚫어 보았다.
칼빈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며, 시장뿐 아니라 국가 권력 역시 타락한 인간의 손에 맡겨진 한계를 지닌 제도임을 분명히 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지상의 도성을 어떤 정치 체제도 궁극적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영역으로 규정했다.
이 전통 속에서 보면, 기독교 신앙은 자본주의의 탐욕만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제도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구원 서사’ 자체를 경계한다. 정의를 위한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우상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좌파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다시 질문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죄를 구조로 환원하고, 구원을 역사 내부로 끌어내리는 유물론적 세계관과 양립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 신앙은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해 왔다.
이것은 정치적 배타성이 아니라, 신학적 정직성의 문제다. 교회는 좌파와 우파라는 진영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이념도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질문하지 않는 공동체로 존재할 수도 없다.
사람은 포용해야 하지만, 포용이라는 명목으로 세계관의 경계선을 지우는 것은 기독교 신앙으로서는 절대불가이다. 그것은 배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모든 사상과 이념을 향해 묻는다.
“너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너는 구원을 어디에 두는가?”
이 질문 앞에서, 좌파 사상은 더 이상 중립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분별의 대상이 된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배척할 때가 아니라,
‘포용' 이라는 명목으로 경계선을 지울 때이다.
-맑은샘내과 이완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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