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탐 3, 바울
바울의 식탁 신학 — 절제의 복음, 은혜의 맛✝️
로마제국의 거리마다 향신료의 냄새가 흘러나오던 시대,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단순한 빵과 포도주의 식탁(성찬식)을 넘어, 은혜와 절제의 식탁을 가르쳤다. 그의 서신 곳곳에는 음식과 절제, 탐식 거부에 대한 신학적 통찰이 배어 있다. 바울에게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단순히 식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섬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1. 로마의 식탁과 복음의 전복
1세기 로마의 식탁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신분질서와 권력 구조, 가치 체계가 압축된 공간이었다. 부자들은 손님을 초대해 권력의 피라미드를 연출했고, 가난한 자들은 잔치의 부산물로 배를 채웠다.
음식은 종교적 상징이었으며, 신분과 경건의 경계를 표시하는 표식이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정결한 음식만을 먹었고, 이방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거리낌 없이 먹었다.
바울은 이런 시대에 음식 문제를 ‘율법의 정결’이 아니라 ‘복음의 자유’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 그는 이 한 문장으로 기독교의 식탁을 스토아적 금욕과 율법적 규율에서 해방시켰다.
그의 복음은 절제의 가치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회복시켰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 4:4). 이 선언은 스토아 철학의 무감각한 금욕주의를 향한 복음적 반격이었다. 바울에게 음식은 죄의 도구가 아니라, 은혜의 매개체였다.
2. 예루살렘 공의회 — 복음과 음식의 경계
예루살렘, 아침의 먼지 속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였다. 테이블 위에는 두 세계가 놓여 있었다 — 유대인의 율법과 이방인의 자유. 그들의 논의는 단순히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하나가 될 것인가”였다.
이 회의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음식과 신앙의 관계, 곧 탐식의 신학적 경계선을 공적으로 선포한 사건이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 신자들이 오자 식탁을 피했다(갈 2:11–14). 바울은 그를 정면으로 책망했다. “그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음”(갈 2:14) 때문이었다.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실성이 걸린 사안이었다.
공의회의 결론은 명확했다. 이방 신자에게 율법 전체를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하라”(행 15:29)고 했다. 이 네 가지는 단순한 위생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지 말라는 신학적 선언이었다.
바울에게 ‘먹음’은 언제나 영적 행위였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핵심은 ‘무엇을 먹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먹는가’였다.
그는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요”(빌 3:19)라고 말하며, 탐식을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체한 욕망의 신학적 전도(顚倒), 곧 뒤바뀜으로 진단했다. 탐식은 하나님 없이 배부르려는 불신앙의 표지였다.
3. 탐식의 본질 — 자유, 절제, 사랑의 경계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교회는 음식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자유의 오용을 경계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 “형제가 실족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리라”(고전 8:13).
바울에게 자유는 자기 욕망의 해방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절제의 능력이었다. 그는 탐식을 단순한 과식의 문제가 아니라, 탐심의 과잉으로 인한 사랑의 결핍, 곧 공동체의 파괴로 이해했다.
4. 성만찬의 왜곡 — 탐식의 종교화
고린도 교회의 성만찬은 공동체의 거울이었다. 부유한 자들은 먼저 먹고 마시며 취했고, 가난한 자들은 굶주린 채 남았다. 바울은 그 장면을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함”(고전 11:29)이라 질타했다.
그들의 식탁은 예배가 아니라 탐식이었다. 성만찬은 감사의 자리인데, 그들은 그것을 자기 포만의 제사로 바꿔 버렸다.
그는 예수의 식탁을 다시 세웠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감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전 11:23–24). 바울에게 성만찬은 탐식의 종말, 그리고 나눔의 시작이었다.
5. 음식과 자유 — 비움의 능력
바울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고, 음식의 구속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는 자유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그에게 자유란 사랑의 방향으로 한정된 선택의 능력이었다.
탐식은 자유를 “배의 신”(빌 3:19) 아래 굴복시키지만, 절제는 자유를 사랑의 도구로 회복시킨다. 바울은 말했다. “우상의 제물이라도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형제가 실족한다면 나는 다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 8:13)
그에게 진정한 자유는 절제였다. 자유란 배를 채우는 권리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비워지는 은혜의 능력이었다.
6. 음식과 절제 —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신앙
바울은 탐식의 근원을 결핍의 그림자에서 보았다. 그는 고백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빌 4:12)
그의 절제는 체념이 아니라, 훈련된 자유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에게 절제는 단순한 절식이 아니라 은혜로 채워지는 질서의 회복이었다. 탐식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왜곡된 사랑이지만, 절제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포만을 경험하는 회복의 행위였다.
바울의 절제는 금욕이 아니라 감사였다. 그는 스토아 철학의 무감각 대신, 복음의 감각을 회복했다. 절제는 죽음의 침묵이 아니라 생명의 노래였다.
7. 음식과 공동체 — 사랑의 식탁
탐식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고린도 교회의 성만찬처럼, 부유한 자의 과식은 가난한 자의 굶주림을 낳는다. 바울은 말한다.
“만일 누가 먹는 일로 말미암아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형제를 망하게 하지 말라”(롬 14:15).
그에게 진정한 금식은 음식의 중단이 아니라, 사랑 없는 먹음을 멈추는 일이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의 식탁 윤리는 곧 사랑의 신학이었다.
결론 — 먹음의 신학, 사랑의 질서
바울에게 탐식은 배를 중심으로 사는 신앙, 절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신앙이었다. 탐식은 나를 위한 소비의 예배이지만, 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배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 없이 배부르려는 욕망을 멈추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시작하라 권한다.
절제는 결핍을 참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능력이다. “그들의 신은 배요,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라”(빌 3:19).
바울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배에 돌리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는 행위다. 탐식은 과잉 섭취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망각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자는 절제할 수 있고, 절제할 수 있는 자는 이미 하나님으로 배부른 자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것이 바울이 가르친 먹음의 신학, 곧 사랑의 질서(Ordo Amoris)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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