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식탐 거부와 절제의 신학

by reformanda posted Oct 3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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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 최후의 만찬.jpg

 

운보 김기창 작, 최후의 만찬

 

예수의 식탐 거부와 절제의 신학

식탐 

 

예수 그리스도는 식탐(食貪, gluttony)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 말씀, 활동은 빵 냄새 가득한 현실 속에서 주어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강론, 비유, 식탁 대화, 금식의 교훈에는 식탐을 경계하고 절제를 가르치는 영적 메시지가 곳곳에 담겨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음식에 대한 단순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먹음의 신학(the theology of eating)을 세우는 메시지였다. 그의 여러 가지 비유들은 밭, 포도원, 식탁에서 피어났다. 예수의 손에는 항상 빵이 있었고, 그의 눈길은 배고픈 자를 향하였다.

 

예수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먹지 말아야 할지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먹어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다워지는가를 말해주셨다. 금식의 침묵 속에서도, 잔치의 환호 속에서도, 그는 배가 아니라 마음이 배부른 자가 복이 있다는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의 음식에 대한 가르침은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먹음의 신학이었다. 그에게 식사는 생존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예식이었고, 포만은 단순한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감사였다.

 

1. 빵과 생명

 

예수께서는 광야의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 그때 예수는 대답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4, 8:3 인용).

 

이 장면의 초점은 단순한 금식의 모범이 아니다. 식탐을 거부한 영적 선언에 있다. 예수는 인간의 배를 채우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세운다. 하나님 없이 배부르려는 모든 시도가 식탐의 근원임을 폭로한다.

 

예수에게 식탐은 음식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배를 채우는 일에 집착하는 신앙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믿는 불신앙이다. 예수의 금식은 욕망을 부정하려는 금욕이 아니라, 욕망의 중심을 하나님께 되돌려놓는 질서의 회복이었다. 예수는 광야에서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인간의 죄(3:19)를 이기셨디.

 

2.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식탐의 내면적 형태인 염려의 중독을 다루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6:25)

 

여기서 염려는 단순한 걱정이 아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생존을 보장하려는 마음의 탐욕이다. 예수는 새와 백합화를 들어 말씀한다.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는데, 인간은 끊임없이 더 먹고, 더 입으려고 애쓴다.

 

이 염려의 구조는 식탐의 뿌리다. 탐식은 과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 곧 영적 불안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고 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단순한 우선순위의 교훈이 아니다. 탐식의 구조를 뒤집는 복음적 명령이다. 예수에게 탐식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다. ‘탐식의 반대말은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3. 낙타와 바늘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19:24).

 

예수는 탐식과 탐심을 분리하지 않으셨다. 탐식은 소유와 권력의 탐욕으로 확장되는 마음의 구조이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19:1624)에서 청년은 율법을 잘 지켰지만, 재물을 버리지 못했다. 그에게 재물은 음식처럼 작동했다. 빵은 하나님 없는 배부름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예수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재물의 도덕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탐식의 구조, 곧 채우지 않으면 느끼는 불안을 폭로한다.


예수를 찾아온 청년은 하나님보다 배부름을 택했다. 결국 근심하며 돌아갔다”(19:22). 예수에게 탐식은 삶의 만족을 하나님 아닌 것에서 찾으려는 내적 우상숭배였다.

 

4. 부자와 나사로

 

예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는 탐식의 사회적 차원을 드러낸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하며 먹고 마셨다. 그의 문 앞에는 상처투성이 거지 나사로가 굶주리고 있었다.

 

예수의 나사로 비유는 그의 식탁 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조차 먹지 못한 자를 부각시켜 탐식이 개인의 죄만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드는 영적 무감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부자는 지옥에서 탄식한다. 혀가 불탄다. 생전에 기름진 음식으로 채우던 그 입이 갈증의 형벌을 받는다. 이것은 사후의 심판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는 풍요 속에서 무감각해진 영혼의 현세적 지옥을 보여준다. 이 비유에서 식탐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적 죄로 확장된다.

 

5. 오병이어 기적 후의 말씀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예수는 그를 다시 찾는 무리의 의도를 꿰뚫어 말씀하신다. 메시아를 찾은 것이 아니라 배를 채워주는 공급자를 찾는 것을 간파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6-27). 이 말씀은 탐식의 신학적 본질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예수가 빵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빵은 생명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생명의 목적이 아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6:35), 이 선언에서, 예수는 인간의 식탐, 끝없는 결핍의 순환을 자신 안에서 완전한 만족으로 변형시키신다. 예수는 식탐을 영적으로 치유하시는 참 양식,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영생을 주는 음식이 되셨다.

 

6. 예수의 식탁 나눔의 복음

 

예수는 먹는 일을 복음의 장으로 삼으셨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고, 비난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하셨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노라”(19:10).

 

예수의 식탁은 금욕 마당이 아니라 자비의 연습장이었다. 그는 식탁을 소재삼아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셨다. 배부른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을 받는 나라(6:21)를 말씀하셨다.

 

예수의 식탁은 항상 열린 자리였다. 그곳의 중심은 더 가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함께 나누려는 은혜였다. 그의 식사는 세상의 탐식 구조를 전복시키는 감사와 나눔의 예식이었다.


7. 광야의 시험

 

예수의 가르침은 빵이 아닌 돌, 평지가 아닌 산등성이, 포도주의 향기가 아닌 광야의 바람과 더불어 선언되었다. 사십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는 굶주림의 끝에서 사탄의 속삭임을 들으셨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

사탄의 제안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었다. 인간의 모든 탐식의 근원, 하나님 없이 배부르려는 욕망에 대한 첫 목소리였다.

 

예수는 그곳에서 하늘의 질서로 땅의 허기를 이기셨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세상의 모든 식욕보다 더 강한 빵이 되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4:4).

 

그 순간, 예수의 배는 비어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 그의 금식은 식욕을 부정하는 금욕이 아니라, 욕망의 자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운 복음적 사건이었다

 

광야의 침묵 속에서 예수는 인간의 식탐을 대신하여 굶주리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기를 채웠다. 자신의 굶주림으로 세상의 포만자들까지도 구원하셨다.

 

광야는 침묵의 학교였다. 사십 일을 굶주린 예수의 몸은 쇠약했으나, 그분의 눈빛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이때 사탄이 다가왔다. 그는 돌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속삭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떡이 되게 하라.”

사탄 유혹의 핵심은 굶주림 해결이 아니었다. 그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스스로 배부르려는 시도, 곧 식탐의 신학적 원형이었다.

 

에덴의 뱀이 하와에게 열매를 내밀며 말했듯이, 사탄은 다시 돌을 내밀었다. “먹어라, 네가 신처럼 될 것이다.” 광야는 곧 에덴의 재현이었다.

 

예수는 배로 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수하였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예수는 배고픔보다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의 진실을 더 신뢰하였다. 사탄이 제시한 것은 생존의 떡이었고, 예수께서 택하신 것은 존재의 빵이었다.

 

9.  빵의 신학: 생존의 본능과 은혜의 질서

 

예수께서 사탄의 시험을 받아 그것을 단호히 이겨내는 장면은 단순한 개인의 절제의 모범이 아니다. 사탄의 제안에 대한 그의 단호한 거절이었다. 인간 존재의 중심을 뒤집는 사건이었다.

 

인간은 태초부터 먹음으로 타락했다. 하와는 먹음으로 하나님을 잊었고,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으면서도 불평했다.

예수는 굶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다. 그분의 굶주림은 단식이 아니라, 순종의 예배였다.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은 물질의 거부가 아니라 의존이 무엇인가를 정의한다. 빵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배고픔의 한복판에서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계산법에 따른 선택은 다름 아닌 은혜의 질서이며,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이다. 예수는 먹음의 질서를 바로 세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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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광야의 신학: 욕망의 구조를 해체한 승리

 

사탄은 돌을 빵으로 바꾸라고 했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택하셨다. 인간의 탐식은 내가 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자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절제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신에 대한 신뢰 위에 서 있다.

 

예수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욕망을 거부하셨다. 탐식의 뿌리를 뽑으셨다. 그의 배고픔은 실패의 징표가 아니라, 복음의 첫 승리였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먹었고, 광야의 예수는 사탄이 먹으라고 하는 것을 먹지 않으셨다. 그 차이는 타락과 구원의 갈림길이었다.

 

11. 오병이어 하나님의 경제학

 

갈릴리 언덕에 굶주린 오천 명의 군중이 모였다. 제자들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6:9).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셨다. 그날 일어난 기적은 빵의 증식이 아니라 감사의 증식이었다. 하늘을 향한 감사는 인간의 결핍을 충만으로 바꾸었다. 감사는 하늘과 땅을 잇는 가장 짧은 기도이다.

 

그 순간 제자들은 깨달았다. 배부름이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사안이다. 예수의 손에 들린 떡은 하늘 경제학의 능력을 증언했다. 나눔이 일어나자 부족과 결핍이 사라지고, 감사가 피어났다.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였다.

 

12. 최후의 만찬

 

예수는 어두운 밤, 등불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을 베푸셨다. 그의 손에는 빵과 잔이 있었고, 그의 눈에는 고요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떡을 떼며 말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22:19).

 

예수와 제자들의 식탁은 제단이었다. 그의 몸이 떡이 되었고, 그의 피가 포도주가 되었다. 사람들이 예수를 먹음으로써,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을 경험한다. 최후의 만찬은 식탐의 종말이었다.

 

예수의 광야는 절제의 복음이었고, 예수의 식탁은 나눔의 복음이었다.
금식과 만찬, 굶주림과 포만, 이 두 세계의 긴장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였다. 그리스도는 굶주림으로 우리의 식탐을 대속하셨고, 나눔으로 우리의 결핍을 채우셨다. 그의 금식은 자기 비움이었고, 그의 만찬은 하나님으로 충만함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더 이상 배를 신으로 섬기지 않았다.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듯이 예수를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하늘의 식탁은 여전히 열려 있다. 거기서 들리는 음성은 언제나 같다. “오라,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최후의 만찬은 식탁의 절정이며, 십자가의 전주곡이었다.

 

결론: 예수의 식탁에서 배운 절제의 영성

 

예수의 식탐에 대한 교훈의 초점은 금욕의 윤리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을 하나님께 돌려놓는 영적 회복이다. 빵이 아니라 빵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탐식과 관련하여 예수의 가르침은 세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첫째, 탐식의 본질을 드러낸다. 탐식은 하나님 없이 배부르려는 불신앙의 결과이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체계다. 탐식은 욕망의 신학이다. 그 신학의 교리는 더 많이 먹어야 산다는 것이다. 그 신전의 제단은 배이며 그곳의 예배 형식은 소비다.

 

에덴 동산의 첫 범죄가 먹음으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와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만족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었다. 그 한 입이 불신앙의 식사였다.

이후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 없이 배부르려는 시도의 연속이다. 탐식은 허기에서가 아니라 공허에서 태어난다. 영혼이 하나님을 잃었을 때, 몸은 더 많은 것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한다.

탐식의 뿌리는 불안이다. 탐식은 끝없는 허기를 낳고, 그 허기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굽히게 한다. 그래서 예수는 광야에서 그 욕망의 구조를 해체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이 한 마디는 모든 탐식의 신학을 무너뜨리는 복음의 선언이었다.

 

둘째, 절제의 본질, 곧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신앙을 드러낸다. 절제는 결핍을 참는 기술이 아니라, 충만을 재정의하는 믿음이다. 절제는 하나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 만족할 줄 아는 자유이다. “하나님으로 족하다는 영혼의 고백이다.

 

예수는 금식과 배고픔은 단순한 육체의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배부른 사람이 되는 길이다. 그의 절제는 거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기초이다. 그분은 떡을 거절함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셨다.

 

성경은 절제를 단순한 자기 통제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질서 회복으로 본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6:12)라고 말한다. 은혜의 자유 안에서 욕망의 경계를 세운다.

절제란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문법, 더 가질 수 있지만 가지지 않기로 하는 결단이다. 절제하는 사람은 비어 있으나 결핍되지 않는다. 그의 손은 가볍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하다. 절제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리듬, 곧 멈춤, , 기다림을 회복시키는 영적 호흡이다.

 

셋째, 식탁의 본질이 나눔과 감사의 예배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탐식이 자기만의 배를 위한 예배라면, 성만찬의 식탁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며,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교제이다. 그리스도의 식탁 위에서는 의 허기가 우리의 감사로 변한다.

감사절제나눔, 이 세 단어는 하나님 나라의 식사의 구성요소를 보여준다. 그 식탁에서 사람들은 소유가 아니라 은혜를 먹었다. 빵은 더 이상 물질이 아니라 은총의 매개체이고, 포도주는 쾌락이 아니라 언약의 피이다.

예수는 먹음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셨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의 식탁에서 먹음은 생존이 아니라 예배이다. 감사는 탐식을 녹이고, 나눔은 부족함을 몰아낸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식사는 세상의 포만을 넘어 영혼의 안식을 주는 성찬이다.

 

예수의 모든 식사 장면은 복음의 은유이다. 그는 배를 채우는 빵이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생명의 빵이다. 그의 손에서 빵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은혜의 형상이다. 그의 식탁 앞에서 식탐은 사라지고, 감사는 하나님 나라의 첫 맛, 곧 영혼의 참된 포만이다.

 

광야의 절제는 탐식을 정화했고, 식탁의 나눔은 인간의 결핍을 구속(救贖)했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구원했다. 오늘날의 교회의 성만찬은 그 두 사건의 기억과 의미를 매번 새롭게 한다.

 

예수의 식탁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 자리에 앉는 자마다 깨닫는다. 참된 배부름이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영혼의 상태이며, 참된 식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감사의 예배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6:35). 희망, 진리, 복음, 구원의 메시지를 환히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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