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의 거울로 본 ‘더 많이’의 신학
--탐욕의 본질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5-4)
1. 벌어진 손, 닫힌 심장
한밤에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처럼, 탐욕은 조용히 들어와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손바닥은 벌어지는데, 심장은 닫힌다. 더 가벼워지려는 인간의 소망은 묘하게도 더 많은 짐으로 변하고, 방 한구석에 쌓인 물건들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제단이 된다. 그 위에 올려진 것은 금과 곡식만이 아니라, 불안과 미래, 그리고 자기 자신이다.
성경은 이 보이지 않는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부른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라“(골 3:5). 탐욕의 본질은 사물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방향이다. 무엇이 나를 지키고 구원할 것이라 믿는가 하는 질문에 “하나님” 대신 다른 대답을 올릴 때, 탐욕은 이미 신학이 된다.
2. 이름의 해부—탐욕을 부르는 성경의 단어들
성경은 탐욕을 다양한 각도에서 명명한다. 구약의 하마드(חמד)는 ‘강렬히 탐내다’(출 20:17)에서, 신약의 에피튀미아(ἐπιθυμία)는 ‘치우친 욕망’(약 1:14–15)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ία)는 ‘더 가지려는 마음’, 곧 끝을 모르는 더 많음을 가리킨다(눅 12:15; 엡 5:3).
어근 자체가 말하듯 플레오넥시아는 결핍이 아니라 충족 이후에도 멈추지 않는 초과 욕구다. 그래서 탐욕은 결핍의 반대편에서 자라난다. 배가 불룩한 올챙이처럼, 채워질수록 더 부풀어 오른다.
3. 창세기의 장면—보암직·먹음직·탐스러움
에덴의 이야기에서 탐욕은 식욕의 문제가 아니라 신적 지위에 대한 야심으로 나타난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창 3:6), 그 금지의 열매는 ‘더 많은 지식’을 넘어 ‘하나님과 같이’ 되고픈 욕망을 상징한다.
탐욕의 첫 형상은 소유 확대가 아니라 주권 찬탈이다. 하나님이 정한 경계를 인간이 재편하려는 순간, 욕망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질서 전복이 된다.
4.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행위 이전의 죄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 20:17).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행위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을 겨눈다. 훔치거나 간음하는 손보다 먼저 욕망의 시선을 다룬다. 탐욕은 범죄의 씨앗 창고다. 사도 야고보가 말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약 1:15). 성경의 논리는 일관하다. 탐욕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이고, 순간이 아니라 습성이다.
5. 지혜서의 경고—날개 달린 재물과 공허
지혜서(잠언)은 재물을 독수리에 비유한다. 잠깐 머물다 날개를 펴고 사라진다(잠 23:5). 전도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전 5:10)고 말한다. 지혜문학이 포착한 탐욕의 본질은 불만의 구조다. 더 많은 소유는 더 큰 기쁨이 아니라 더 넓은 공허를 낳는다. 탐욕은 소유의 증가가 아니라 결핍의 심화로 측정된다.
6. 예언자들의 목소리—사회로 번지는 죄
아모스와 미가의 시대에 탐욕은 개인의 결함을 넘어 제도화된 착취로 굳었다(암 2:6–7; 미 2:1–2). 집을 빼앗고, 저울을 속이며, 가난한 자를 값싸게 산다. 예언자들이 ‘공의와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암 5:24)고 외칠 때, 그들이 맞선 우상은 신전의 신이 아니라 시장에 앉은 금 신상이었다. 탐욕은 성소의 제단을 더럽히고, 법정을 기울이며, 도시의 거리를 차갑게 만든다. 탐욕의 사회학은 다름 아닌 우상숭배의 정치학이다.
7. 예수의 가르침—생명은 넉넉함에 있지 않다
예수는 한 젊은이의 유산 다툼을 듣고 곧바로 말문을 닫는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눅 12:15).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문제는 큰 곡간이 아니라 큰 착각이다. “내 영혼아, 평안히 쉬자.” 그는 재물을 구원론의 언어로 사용했다. 예수의 판정은 단호하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눅 12:20). 이처럼 재물의 신학은 언제나 오늘 밤의 심판 앞에서 무너진다.
예수는 또한 두 주인의 비유로 탐욕의 실체를 벗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 여기서 재물(맘몬)은 중립적 수단이 아니라 “경쟁하는 주”(主)로 의인화된다. 탐욕의 본질은 단지 돈을 사랑하는 성향이 아니라, 다른 주인을 섬기는 예배 행위다. 그러므로 ‘염려’(마 6:25–34)는 경제학적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신학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의 불안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증폭된다.
8. 사도들의 진술—뿌리, 우상, 궤도이탈
바울은 한 문장으로 탐욕의 신학을 종결한다. “탐심은 우상숭배”(골 3:5). 그리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한다(딤전 6:10). 우상은 단지 목석의 신상이 아니라, 의지와 확신을 빼앗아 가는 실제의 힘이다.
에베소서 5장 4절은 탐하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일컬으며, 그를 하나님의 나라 밖에 둔다. 바울의 맥락에서 탐욕은 단순한 도덕적 결점이 아니라 구원사적 궤도이탈이다.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이며, 다른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주께서 ‘내가 결코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고 말한다. 탐욕을 밀어내는 동력은 금전의 충족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탐욕의 본질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 부재 감각의 환상이다.
9. 교부와 전통—삶의 방향이 된 신학
어거스틴은 사랑의 질서를 뒤틀어 최고의 것을 최하로, 최하의 것을 최고로 두는 무질서한 사랑(amor inordinatus)을 죄의 본질로 보았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질서를 잃어버린 사랑이다.
어거스틴에게 죄란 단순히 ‘나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틀린 자리에 두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영원한 것보다 일시적인 것을, 진리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무질서한 사랑은 사랑의 방향이 어그러지고, 우선순위가 전도된 상태다. 사랑의 왜곡이 인간의 내면과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
‘무질서한 사랑’의 반대말은 ‘질서 있는 사랑’(ordo amoris)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랑해야 할 것들의 ‘순서’를 창조 안에 세워 두셨다. 가장 높은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 다음은 진리와 이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속적 사물이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사랑은 거꾸로 뒤집혔다. 최상의 것을 최하로, 최하의 것을 최상으로 두게 된 것이다.
‘무질서한 사랑’은 “좋은 것을 잘못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방향이 어그러지고, 우선순위가 전도된 상태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욕망 구조가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이동한 상태를 뜻한다. 어거스틴에게 탐욕, 교만, 쾌락 추구는 모두 이러한 무질서한 사랑의 열매다.
결국 모든 죄는 하나님을 덜 사랑하고,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죄는 사랑의 순서가 깨진 자리에서 태어난다. 하나님이 보기에 거룩함이란 ‘사랑의 재배치’다.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 사랑하고, 나머지를 그분 안에서 사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창조된 질서 안에서 평화를 회복한다. 어거스틴에게 “정의란 사랑이 제자리를 찾은 상태다”(어거스틴, De Civitate Dei).
탐욕은 선한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왜상(歪像)이다. 좋은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로마교회의 감독 그레고리우스는 탐욕이 낳는 ‘일곱 딸’(배신, 사기, 거짓, 위증, 불안, 폭력, 냉혹)을 열거하며, 탐욕이 개인의 결함을 넘어 관계의 파열을 낳는다고 보았다.
단테가 지옥의 네 번째 원에 낭비와 인색을 맞부딪치게 배치한 것은, 탐욕이 쥐는 손과 흩뿌리는 손,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닌다는 사실을 꿰뚫은 통찰이다. 방향만 다를 뿐, 중심은 같으니, 자기 자신이다. 탐욕이 가진 두 얼굴, 곧 이중성은 쥐는 손, 곧 인색함과 흩뿌리는 손, 곧 낭비다.
10. 신학적 정의—탐욕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모아 한 문장으로 세우면 이렇다. 탐욕은 ‘하나님 아닌 것’에 생명과 안전을 걸고 더 많음으로 구원을 사려는 마음의 체계이며, 예배를 전도(顚倒)시켜 재화를 주(主)로 섬기는 우상숭배다. 여러 가지가 뒤바꼈다.
첫째, 주권을 전도시켰다. 원래 인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탐욕은 하나님 대신 돈과 재물이 삶의 주인이 되게 만든다. 예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 탐욕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인간이 재물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주권의 전복이다.
둘째, 구원을 전도시켰다. 성경은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만(엡 2:8), 탐욕은 돈이 안전과 평안을 준다고 속삭인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가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자”고 말할 때, 그는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축적과 소유에서 찾았다. 탐욕은 그렇게 은혜 대신 축적을 신뢰하게 만든다.
셋째, 질서를 전도시켰다. 하나님은 사랑의 질서를 정하셨다. 인간은 창조주를 가장 사랑하고, 그 다음으로 이웃을, 마지막으로 피조물을 다스리며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탐욕은 이 질서를 무너뜨려, 하나님보다 피조물, 곧 돈, 소유, 성공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바울이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다”(롬 1:25)고 한 말은 바로 이 뒤틀린 사랑의 상태를 말한다.
주권·구원·질서의 뒤바꿈은 탐욕이 하나님을 대체하고, 인간의 사랑의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은 결과다. 탐욕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점령하는 영적 반역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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