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태우는 불: 분노 3

by reformanda posted Oct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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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태우는 불: 분노 3

 

분노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2-3)

 

톨스토이의 부활은 명상처럼 흐르는 한편의 긴 설교이다. 성경에 근거한 분노 신학이 맞닿는 지점을 따라가고 있다. 단순히 한 인간의 도덕적 각성을 그린 소설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죄와 불의, 분노와 용서의 광야를 건너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영적 서사이며,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분노의 구속이라는 신학적 주제와 깊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분노는 단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 깨어나는 첫울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패함을 직면하게 하는 불길이다.

 

톨스토이는 그 불이 단순히 타오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안다. 그 불은 타인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자신을 정화시키는 불이다. 그럴 때 분노는 죄의 불길에서 사랑의 빛으로 변하고, 영혼은 마침내 부활의 자리에 선다.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이러한 분노의 거룩한 실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예수께서 성전의 상인들을 내쫓으셨을 때, 그 분노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다시 정결하게 하려는 정화의 불이었다.

 

그 불은 사람을 향하지 않았고, 죄를 향했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를 통해 그 동일한 불길을 인간의 내면 속에 옮겨 놓았다. 네흘류도프는 처음에 사회의 불의와 제도의 부패에 분노한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닫는다. 자신이 비난하는 그 세상의 악이 바로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때 그의 분노는 방향을 바꾼다. 세상을 향하던 불이 자신을 향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치 예수가 성전의 장사꾼을 몰아내듯, 자신의 영혼 안에서 탐욕과 위선을 몰아낸다. 그렇게 그의 영혼의 성전이 비로소 깨끗해 진다.

 

이처럼 톨스토이가 그려낸 분노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정화의 과정이다. 예수의 분노가 회복의 불이었다면, 네흘류도프의 분노는 회개의 불이다. 두 불길은 서로를 비춘다. 예수의 분노는 거룩의 불이었고, 네흘류도프의 분노는 인간이 그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불이었다.

 

바울의 서신에서도 톨스토이의 영적 여정과 닮은 구조가 보인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분을 내되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한다. 분노는 인간 안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그것이 오래 머무르면 곧 죄의 그늘이 된다.

 

네흘류도프는 처음에 세상에 대한 의분으로 불타오르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불길이 자신을 태우기 시작한다. 그는 점점 피폐해지고, 자신의 분노가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때 그는 바울의 권면처럼 분노를 품지 않고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시베리아로 유배된 여인 카챠를 따라가며, 그는 점차 그 분노를 사랑의 불로 바꾸는 길을 걷는다.

 

바울이 말한 분을 내되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은 결국 분노를 억누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성화시키라는 뜻이다.

 

톨스토이의 문학은 그 말씀의 서사적 해석처럼 보인다. 네흘류도프의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온도가 변한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의 분노는 이제 타인을 비추는 빛으로 바뀐다. 바울이 말한 절제는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변형의 신학이며, 톨스토이는 그 변형의 과정을 인간의 삶 속에 실제로 구현해 보인다.

 

시편의 시인들처럼, 톨스토이의 주인공 또한 처음엔 하나님께 항의하며 분노한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노는 기도로 바뀐다. 그는 시편 51편의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울며 고백한다. “나는 그들을 미워했으나, 나 자신이 그들보다 더 부패했음을 보았다.”

 

이 고백은 인간의 분노가 신앙의 자리에서 회개로 변하는 장면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간구했듯, 네흘류도프 역시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해달라고 속삭인다. 결국 부활은 하나의 긴 시편처럼 읽힌다. 그것은 분노로 시작해, 회개로 깊어지고, 용서와 사랑으로 끝난다.

 

예수의 생애에서 가장 신비로운 순간은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분노의 침묵이었다. 십자가 위의 예수는 세상의 불의 앞에서도 침묵하셨다. 그 침묵은 무력함이 아니라 사랑의 절정이었다.

 

톨스토이의 부활후반부에서 네흘류도프는 바로 그 침묵의 신학으로 들어간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던 사람이었지만, 마침내 그 부조리 속에서 자신을 본다. 그 순간 그는 말문을 닫는다. 그는 세상을 더 이상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의 침묵 속에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가 울린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침묵은 분노의 완성이다. 인간의 분노는 결국 침묵 속에서만 완전히 구속된다. 그 침묵은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이며, 모든 정의의 욕망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영혼의 안식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분노가 이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부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분노를 단순히 죄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정의감의 불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불이 성령의 바람 아래에 있지 않다면, 곧바로 교만의 불로 타오르게 된다.

 

톨스토이는 이 미묘한 경계를 문학으로 탐구했다. 그의 결론은 성경의 결론과 동일하다. 분노는 사랑으로만 구속된다. 사랑이 분노를 덮을 때, 정의는 자비로 완성된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더 이상 증오의 불이 아니라, 사람을 비추는 빛이 된다.

 

부활의 마지막 장면에서 네흘류도프는 성경을 펼친다. 그때 그는 깨닫는다. 분노를 다스린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분노는 결국 자아의 십자가 위에서만 사라진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인간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예수의 의로운 분노, 바울의 절제된 분노, 시편의 회개하는 분노를 하나의 인간 이야기로 엮어낸 복음의 재현이다. 그에게 부활은 죽음의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분노의 불길이 사랑의 빛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 불길은 인간의 내면에서 타오르며, 정죄의 언어를 침묵으로, 증오의 불을 사랑의 온기로 바꾼다. 그때 영혼은 다시 태어난다. 그때야말로 인간은 진정으로 부활한다.

 

부활은 분노를 설명하는 톨스토이의 문학적 복음서이다. 그의 문장은 한 편의 설교처럼 울린다. “불을 두려워하지 말라. 다만 그 불이 자신을 태우지 않을까 두려워하라.” 이것이 톨스토이가 전한 분노의 신학’, 그리고 성경이 말한 거룩한 부활의 깊은 비밀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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