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톨스토이,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 분노 2

by reformanda posted Oct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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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 분노 2

 

 

분노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3-3)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The Ressulection, Воскресение, 1899)은 인간의 영혼이 죄와 분노, 불의와 무지 속에서 어떻게 깨어나고 다시 태어나는가를 보여주는 장대한 영적 여정이다. 이 작품에서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영혼을 마비시키는 불길이다. 동시에 부활의 불씨가 되기도 하는 이중적 실체이다. 작가는 분노와 죄의 불을 동일시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태워 정화의 불꽃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1. 분노의 얼굴 불의에 대한 눈부신 분노

 

소설의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젊은 시절의 방탕과 무책임으로, 한 여인 카챠(카테리나 마슬로바)를 타락의 길로 몰아넣고, 세월이 흘러 법정에서 피고석에 앉은 그녀를 다시 마주친다. 그 순간 그는 불의와 부패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대한 분노, 자기 죄와 허위의식에 대한 분노였다.

 

톨스토이는 이 분노를 양심의 눈이 처음으로 뜨이는 순간의 통증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마치 오랜 겨울 끝에 녹아내리는 얼음의 금, 땅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봄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한다.


분노는 처음엔 파괴적이지만, 그 뿌리에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다. 톨스토이는 바로 이 점을 붙잡는다 인간의 분노는 악의 불씨일 수도 있지만, 회개의 문턱에서 그것은 영혼의 각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2. 분노의 죄성 타인을 심판하는 불길

 

톨스토이는 인간의 분노가 얼마나 쉽게 타락하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네흘류도프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던 분노는 곧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한다. 그는 사회의 부패, 법의 부정, 교회의 위선을 보며 불타는 정의감을 느끼지만, 그 불길 속에서 자신 또한 타인을 정죄하는 또 하나의 폭군이 되어간다.

 

톨스토이는 말한다 인간의 분노는 언제나 정의의 탈을 쓴 교만으로 변질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의 문장은 차갑다. “그는 세상을 정죄하면서, 자신이 그 정죄의 일부임을 보지 못했다.” 이 한 문장은 분노의 죄성을 통찰한다. 분노는 본래 정의의 수호자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심판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변한다. 그때 분노는 더 이상 불의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기 의의 확증이 된다. 톨스토이는 그 순간을 영혼이 다시 죽는 순간으로 묘사한다.

 

3. 분노의 정화 회개와 용서의 불꽃

 

부활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톨스토이는 분노를 단순히 억누르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방식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삶의 깊은 경험을 통한 영혼의 불순물 제거 과정이다.

 

네흘류도프는 시베리아로 유배된 카챠를 따라간다. 그 긴 여정은 분노가 회개로, 회개가 사랑으로 변하는 순례의 길이다. 눈 덮인 들판을 건너며, 그는 마침내 깨닫는다. “진정한 부활은, 용서 속에서만 일어난다.” 이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선언이다. 분노는 불의를 향한 정의감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이 끝내 용서로 향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죄의 그늘에 머문다.

톨스토이의 문학은 분노를 다스리는 기술이 아니라, 분노를 용서로 변모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을 보여준다. 그에게 용서는 약한 자의 도피가 아니다. 용서는 분노의 불길을 사랑의 불빛으로 바꾸는 능동적 선택이다.
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온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4. 분노의 실체 정의의 불과 교만의 불 사이에서

 

톨스토이에게 분노의 실체는 모순적이다. 그것은 정의의 불이자 동시에 교만의 불이다. 그는 인간의 분노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룩한 분노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신을 태우는 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불은 세상을 향해 타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을 태우며, 불순한 의도와 위선을 재로 만든다. 이때 분노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다.

 

톨스토이의 필치는 묵상적이다. 그는 진정한 분노는 자신에게 향하는 칼날이며, 타인을 위한 불이라고 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닌 말이다. 분노가 타인을 태우는 불이라면 그것은 죄다. 그러나 분노가 자기 자신을 태우는 불이라면, 그것은 회개의 불이다. 그때 비로소 분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불로 성화된다.

 

5. 분노를 다루는 기술 영혼의 침묵을 배우는 일

 

톨스토이는 분노를 이기는 방법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는 독자에게 분노의 순간을 관찰하라고 말한다.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미세한 이기심과 불안으로 흔들리는지를 보게 된다.

 

그에게 분노를 다루는 기술은 억제가 아니라 침묵의 훈련이다. 침묵은 무력함이 아니라, 영혼이 분노보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과정이다그곳에서 인간은 자신을 비추는 내면의 빛을 본다.

 

그는 더 이상 분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 안에서 불타오르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부활이 도달한 영적 정점이다. 톨스토이는 분노를 억누르는 대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진정한 의미다 죄와 분노의 죽음 위에서 다시 일어서는 영혼의 생명.

 

6. 불의한 시대를 사는 자들의 분노

 

오늘 우리는 여전히 불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묻는다. “그대의 분노는 누구를 위한 불인가?” 세상의 악에 대한 분노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을 정죄하거나, 스스로의 의를 세우는 불이라면, 그 불은 이미 죄의 불이다. 그러나 그 분노가 내 안의 죄를 태우고, 타인을 품고, 정의를 향한 사랑의 불로 변한다면 그것은 부활의 불이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불을 두려워하지 말라다만 그 불이 자신을 태우지 않을까 두려워하라.”

 

분노는 인간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에너지다. 그것이 죄가 되느냐, 거룩이 되느냐는 오직 한 가지 그 불이 누구를 향하느냐에 달려 있다. 부활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영혼의 부활을 촉구한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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