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기의 포로에서 자유로워지기 ―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다
― 시기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2-10)
시기(Envy)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은밀히 자라나는 감정이다. 처음에는 미세한 불편함으로 시작된다. 누군가의 이름이 칭찬받는 자리에서 심장이 미묘하게 떨리고, 친구의 성공 소식이 들려올 때 어딘가 모르게 목이 마른 듯한 느낌이 든다.
시기의 감정은 불길처럼 타오르지는 않는다. 조용히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스며들며 마음을 말라가게 만든다.
성경은 이 시기의 독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억제가 아니라 영혼이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다시 보는 것이다.
시기의 독은 대부분 말에서 시작된다. 야고보는 혀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혀를 “불의의 세계”라고 불렀다. 그는 교회 안의 미숙한 선생들이 진리를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교사의 가르침을 헐뜯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그 말의 근저에는 “독한 시기와 다툼”(약 3:14)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기는 이처럼, 혀의 끝에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의 재능이 불편해질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말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염려하는 척, 또는 객관적인 비평인 척하지만 그 말은 이내 한담(gossip)이 되고, 험담이 되고, 결국 중상이라는 독화살로 바뀐다.
잠언은 “남의 말을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잠 26:22)고 말한다. 가벼운 말의 쾌락은 그만큼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러므로 시기의 첫 문턱은 입이다. 한담을 멀리하는 것은 시기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 첫 번째 실천이다. 칭찬이 아닌 말이라면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약점을 즐기며 이야기하는 순간, 시기는 이미 내 마음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시기를 멀리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꾼다. 시기하는 사람은 언제나 ‘선(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이 영광을 받으면 내가 받을 몫이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생각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하나님은 선의 근원이시며, 그분의 선은 한정되지 않은 샘이다. 어거스틴은 “영적인 선은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나눌수록 더 풍성해진다”고 말했다. 명예, 지식, 사랑,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빛이다. 누군가가 칭찬받는다고 내가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그 칭찬이 내 안의 가능성을 깨운다면, 그것은 나에게 흘러온 또 하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빛을 공평하게 나누는 태양처럼 각 사람에게 다른 양의 빛을 비추신다. 이 빛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조화의 선율을 이루기 위한 차이이다. 동료의 빛을 질투하기보다 그 빛을 기뻐하는 순간, 시기는 힘을 잃는다.
시기는 언제나 눈이 바깥을 향할 때 시작된다. 우리는 타인의 재능을 보며 불편해하고, 그의 열매를 보며 내 땅의 메마름을 탓한다.
그러나 성경은 눈을 자기 안으로 돌리라고 한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사가 다르다”(고전 12:4).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에게 맡겼다. 그러나 주인의 칭찬은 달란트의 양이 아니라 충성의 태도에 따라 주어졌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에게도, 두 달란트를 남긴 자에게도 동일하게 품삵이 주어졌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다른 몫의 은사를 주셨다. 우리의 과제는 남의 몫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달란트를 찾아 그것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시기의 불길은 비교에서 시작되지만, 감사는 그 불길을 끈다. 하나님이 주신 내 몫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시기는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한다.
시기를 이기는 또 하나의 길은 동료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전 3:6). 그는 자신과 아볼로를 경쟁자가 아닌 하나님의 밭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보았다. 교회는 몸이고, 성도는 각기 다른 지체이다(고전 12장).
손이 눈을 시기할 이유가 없고, 눈이 발을 무시할 이유도 없다. 모든 지체는 서로에게 필요하다. 동료의 탁월함은 나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며, 그의 성공은 공동체 전체의 승리이다. 시기는 “그는 나보다 낫다”에서 시작되지만, 동역자는 “그가 잘될수록 우리가 함께 산다”고 말한다.
이 마음은 교회뿐 아니라 삶의 모든 관계에도 적용된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사회에서도 누군가의 탁월함이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전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자원임을 깨닫는 순간, 시기는 물러가고 감사와 협력의 기쁨이 자란다.
그러나 시기를 완전히 이길 수 있는 힘은 사랑밖에 없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따뜻함이 아니라 영혼을 정화시키는 불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이란 친구가 잘될 때 기뻐하고, 넘어질 때 함께 아파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은 내 기쁨이 되고, 그의 눈물은 내 눈물이 된다. 이 사랑이야말로 시기를 녹이는 불이다.
라이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는다면 가능하다. 그 사랑은 죄인을 용서하고, 원수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준 사랑이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라이벌의 성공을 축복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한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도달해야 할 사랑의 정상이다. 사랑은 비교의 언어를 무너뜨린다. 사랑은 “너와 나는 다르다”가 아니라 “너와 나는 함께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은 시기의 자리에서 사람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한다.
시기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그대로 품으면 영혼은 서서히 메말라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 메마른 땅에서도 꽃이 핀다.
시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입을 지키는 일, 감사로 시선을 바꾸는 일, 그리고 사랑으로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감사는 말을 정화시키고, 사랑은 감사를 완성한다. 그 길의 끝에는 자유가 있다.
단테는 연옥의 시인들을 지나며 천사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속삭였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고, 시기를 이긴 자는 행복하다.” 시기는 결국 우리 안의 작은 지옥이지만, 그 지옥을 뚫고 나올 때 그 자리에 천국이 열린다. 그리고 그 천국의 첫 문은 언제나 사랑과 감사가 있는 마음에서 열린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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