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진 왕관의 무게: 하나님 되기
― 교만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1-3)
교만은 단순한 자아도취나 오만한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비극적인 선언이며, 피조물로서의 숙명을 거부하는 장엄하고도 슬픈 반역이다. 교회는 오랫동안 이 교만을 일반 윤리적 흠결이 아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본질적인 ‘신학적 죄’로 이해해 왔다. 교만은 스스로 빛과 그림자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과 세계를 통치하겠다는 자기중심성의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태초의 동산, 아담이 손을 뻗어 금단의 열매를 취했을 때, 그는 단지 규칙을 어긴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이미 영원한 순종의 약속이 아닌,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찰나의 유혹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거스틴이 꿰뚫어 보았듯이, 이 최초의 범죄는 주권자의 통치를 거부하고 피조된 자리가 아닌 통치자의 자리를 탐낸 ‘자아의 승천’ 시도였다.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굳게 뿌리내려 있어야 할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를 그 근원으로 삼는, 영원히 목마른 존재가 되었다.
저 시날 평지 위,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던 바벨탑은 돌과 진흙으로 세운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인간의 거대한 자기애가 응축된 기념비였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곧 주권과 지배권을 의미한다. 그들은 바벨탑 아래 모여 하나님 없이 스스로 땅의 이름과 역사를 결정하고, 흩어지지 않고 영원히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던 다윗마저도, 군대의 수를 세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힘보다 나의 힘’을 더 신뢰하는 작은 바벨탑이 세워지고 있었다. 교만은 이처럼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창조주 없이 자기 뜻과 생각대로 스스로의 운명을 엮어보려는 시도이며, 우리 안에서 왕관을 쓰고 앉은 ‘작은 우상’인 것이다.
교만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무한한 자기 결정권을 지닌 존재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스스로 충족될 수 없는 유한성과 의존성이라는 본질적 한계를 지닌 이중적 존재이다. 교만은 바로 이 유한성의 조건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할 그 근원적인 결핍을 스스로의 힘으로 채우고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치명적인 오판이다.
이 비극적인 열망 때문에 6세기의 로마 감독 그레고리우스는 교만을 다른 모든 죄가 흘러나오는 가장 깊은 뿌리, 곧 일곱 대죄 중 하나가 아닌 그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선언했다. 영국인 작가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교만이야말로 ‘죄 중의 죄’이며, 다른 모든 죄악은 교만에 비하면 마치 “벼룩에 물린 자국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이 오만하고 비극적인 열망이 우리를 끝없는 분열과 고립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스스로 지은 왕관의 무게는 너무나 무겁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그 왕관을 내려놓고, 창조주께 우리의 주권을 겸손히 되돌려드릴 때 비로소 시작된다.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인정하고, 우리의 영혼이 마땅히 뿌리내려야 할 영원한 근원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인간은 그 아름다운 한계 안에서 참된 충족과 안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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