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신경’ 반포 1700주년
‘니케아 신경’ 반포 1700주년, 통합과 분열의 갈림길···역사적 배경 해설
교리적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룬 상징적 사건
1. 삼위일체 교리형성에 미친 니케아 신경의 영향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를 피조물 가운데 하나라 주장하던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교회는 이미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공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자설 가현설 양태론 같은 여러 이단 사상들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니케아 신경을 선포한 것이다. 니케아 신경은 먼저 성부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간의 본질적인 동등성(동일본질, Homoousis)을 확고히 하였다. 성령의 신성 Filioque도 점진적으로 강조하였다. 동방 교회에 비하여 서방 교회의 우위성이 숨겨져 있는 Filioque는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다는 선언이었다. 예수를 한낱 피조물에 불과할 뿐 피조물 가운데에서는 최고일 뿐이라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했다. 그러니까 니케아 회의는 삼위일체 교리의 신학적 토대를 튼튼히 구축하였고 반포된 니케아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 정통 신앙의 기준이 되었다.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령의 신성에 대한 언급이 보완되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정립된 것이다.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니케아 신경 반포 1700주년행사들이 쏟아진 시기를 맞았다. 먼저 전통있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는 손잡고 기념행사를 하였으며 개신교 역시 기념행사를 하였다. 성경 마태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가 있듯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하나의 동일 본질로 보고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324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 내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325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대교구 내에서 벌어진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주교회의를 개최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교리논쟁보다는 사회 통합을 위한 기초로서 제국의 통합을 원하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리비아 출신 사제 아리우스는 예수는 영원한 신이 아니며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 아닌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도전은 동방교회의 다른 대교구인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등지에서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그는 비티니아 니케아(이즈닉)에 주교들의 회의를 하여 논쟁을 잠재우자는 것이었다. 참석자는 318명이었다. 그리고 회의결과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니케아 회의는 알렉산드리아 대교구의 부제였던 아타나시우스를 통하여 논쟁을 이끌어 간다. 그는 니케아 회의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선임되어 무려 45년 동안이나 있었다. 그렇지만 반대파들에 의하여 전후 5차례(17년간)나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반대파가 득세하여 알렉산드리아 대교구에는 두 명의 총대주교가 병립하기도 하였다. 니케아 회의에서 출교당한 아리우스는 328-329년 사이 소집된 안티오키아 공의회에서 복권되었다.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누리던 아리우스의 노회한 태도가 교회의 지지 여론을 형성한 것이다. 문제는 교회 내에 자리하고 있는 중도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먼저 포용을 앞세우면서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겉으로는 평화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진리 앞에 단호함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논쟁의 당사자인 아타니시우스는 교회를 위한 진리수호에 용기 있는 결단과 인내심을 가지고 대처하였다. 자신이 믿는 진리가 세상의 흐름과 반대되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는 진리를 위한 끈질긴 투쟁을 하면서 포기하지 않았다.
니케아 공의회를 묘사한 16세기 프레스코화
니케아 공의회를 묘사한 16세기 프레스코화
2. 논쟁의 핵심
교회사에서는 이것을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이라 한다. 이 사건은 당시 기독교 세계는 지중해를 감싸고 도는 5개 대교구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로마의 신흥도시인 콘스탄티노플에 대교구가 있었다. 그리고는 로마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대교구가 각각 있었다. 기독교가 공인된 로마에서 교회의 특징은 법과 제도로 움직이는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띠었다.
니키아 공의회는 3개 파가 있었다. 첫째 아리우스파 둘째 아타나시우스파 셋째 중도파 유세비오스 주교 등이 있었다. 유세비오스파는 포용을 앞세우면서 다원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교회환경에서 이들은 제3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진 정통과-이단의 대립구도 속에서 전개된 논쟁은 공존의 길은 모색하지 않았다. 대신 적대적 세력들은 서로를 욕하고 약점을 잡아서 고소하는 등의 대치된 양상을 띠었다. 개중에는 인신공격도 하고 중상모략도 하였던 것이다. 고소도 일어났다. 상대방을 신성모독과 사기혐의 중상모략으로 몰면서 심지어는 폭력혐의 고문 강간 살인 등의 엄청난 혐의를 씌우기까지 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심지어 역전이 된 상황에 직면하여 북유럽 독일 국경 지역인 트리에르(Trier)로 2년간이나 강제로 유배를 당하기도 한다. 반면에 교회의 지지를 받던 아리우스는 로마황제에게 탄원하여 336년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소환을 당한다. 복권이 되고 명예가 회복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아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간다. 복권이 되기 직전 설사와 복통에 시달리다가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4. 정통-이단 사상의 격돌
제1차 공의회의 참석자들이 니케아 신경을 들고 있는 모습.
제1차 공의회의 참석자들이 니케아 신경을 들고 있는 모습. 중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다.
니케아 신경이 탄생 배경은 아리우스의 주장인 ‘예수는 피조물이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공교회는 이단으로 규정하다. 대신 니케아파는 동일본질을 신학화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하는데 성공한다. 이후로 교회에는 삼위일체파 거의 전부와 비삼위일체파 소수의 구도로 변한다. 아리우스파는 이후 발전적으로 유사 아리우스파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교회내에는 12가지나 되는 여러 신경들이 생긴다. 381년 로마제국에는 새로운 황제가 나왔다. 그는 그때까지의 교회문제 수습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 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탄생한다. 정통교회의 삼위일체 신학 사상이 완성된 것이다. 교회는 이제 단성론자들을 물리치고 삼위일체 사상이 확고히 뿌리내리게 된다. 여기에 기여한 인물들이 카파도키아 세교부들이다. 이들은 일찍이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로 유학을 다녀온 인물들로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바질우스,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의 손에 의하여 동방교회 영성신학의 기초가 닦여졌다.
5. 4세기 교회의 동향
교권의 변형이 일어났다. 로마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교회의 영향은 이제 정치권에서 외면할 수 없는 처지로 변한 것이다. 니케아 에큐메니칼 회의는 황제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움직였다. 제국의 통합과 안정을 바라는 황제의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제국의 법과 질서안으로 통합되었다. 통일된 신앙으로 제국의 기초를 놓은 것이 그러한 개입을 물러온 것이다. 교회는 황제가 개입하게 되었고 일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여 교회 일치와 통합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발전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분열이 시작된다. 민족과 국가의 개입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것이다. 정통 신앙이 생기고 이단 사상이 단죄되는 시스템이 들어선 것이다. 박해시기를 벗어나자 교회는 공동체 교회를 대하여 법과 제도가 공의회 체제를 필요로 했다. 여기에서 자립노선을 걷기 시작한 로마교회는 교황권을 구축하려고 니케아 신경에 그리시어 코이네 대신 라틴어 Filioque를 도입한다.
6. 필리오퀘 문제와 서방교회의 등장
필리오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을 통하여 이때까지 묻혀 있던 동방-서방교회간에 벌어진 권력 이동에 관한 것이다. 필리오퀘는 Filioque and also the son에서 비롯된 문구인데 589년 당시 유럽의 스페인 톨레도 지역에 여전히 잔존해 있는 아리우스파들을 경계한다는 이유로 도입된 라틴어 단어다. 그러나 서방교회로 교권이 넘어오던 시기에 등장한 라틴어는 니케아 신경의 원문에 들어갔다. 말은 번역문제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신학적 문제였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라는 Filioque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는 고로 이해되는 문구였다. 이것은 서방교회와 니케아 신경의 불일치이다. 1031년 동방교회 콘스탄니노플의 총대주교가 이것을 강력하게 시정하도록 항의하였다. 이미 로마교회는 서방교회의 중심에 있으면서 동방교회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쉽게 알수 있다.
예수의 직접적인 제자인 사도 베드로가 바로 필리오퀘를 융합하기에는 아주 좋은 교리적 대상이었다. 로마교회는 이것을 가지고 예수에게서 수위권을 받은 베드로를 잇는다고 강조하였다. 로마교회 총대주교만이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풍기고 있었다. 따라서 성령의 직접적인 이끄심을 받지 못하는 다른 총대주교보다 로마교회는 우위에 있다는 것이 가능하였다. 서방교회의 중심인 로마교회는 스스로가 가장 우위에 있는 교회이며 로마 총대주교가 성령의 이끄심을 직접 따르는 최고의 교종이 된다는 교리적 설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나 교회 안에는 11세기와 12세기까지 교회들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대운동이 있었다. 필리오퀘 교리는 사실상 로마교회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최고위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서방교회 총대주교가 정치적 자립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1054년이 훔베르트 추기경이 콘스타티노플 대성당에 파문장을 놓고 떠나면서 동서교회의 분열은 시작되었다.
이상윤, 페이스북 글,
<웨슬리안타임즈>, 이상윤 글로벌뉴스본부장, 202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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