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귀츨라프, 최초의 조선방문 선교사

by reformanda posted Aug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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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귀츨라프, 최초의 조선방문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Gützlaff)는 1832년에 조선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독일 출신 목사이자 선교사입니다. 그는 뭍이 아닌 섬인 충남 보령의 고대도에 머물며 약 한 달 동안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기록은 조선에 대한 초기 선교 기록으로 중요하다.

 

칼 귀츨라프의 생애와 사역 1

 

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7.8 ~ 1851.8.9)는 독일 출신 루터교 배경의 개신교 선교사로, 동아시아 선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의 동아시아는 서양 열강의 통상 및 선교 요구와 맞물려 거대한 격변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 시기, 칼 귀츨라프는 단순한 개신교 선교사를 넘어, 통역가, 의사, 작가, 그리고 탐험가 등 다층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서양의 동아시아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확장에 기여했다. 동시에 통상 및 선교라는 이중적 목적을 가진 서구 제국의 팽창주의가 어떻게 동아시아 국가들의 쇄국 정책과 충돌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를 남겼다.

 

 

이글에서는 귀츨라프의 생애와 행적을 살펴보고, 특히 그의 조선 방문과 홍콩에서의 복한회(福汉会) 사역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칼 귀츨라프의 최기 생애

 

 

칼 귀츨라프는 180378, 프로이센(Prussia, 현 폴란드 지역) 포메라니아의 퓌리츠(Pyritz, Pomerania), 유대계 가난한 집안 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마구상에서 심부름을 하며 성장했고, 14살 무렵 혁대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820, 17세의 귀츨라프는 친구 하이덴라이히와 함께 스테틴 시를 방문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장문의 시를 공동으로 작성하여 전달했다. 이들의 대담함과 재능에 감동한 왕은 이들을 칭찬하며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때 귀츨라프는 왕에게 해외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말했다. 이에 왕은 그의 포부를 높이 사 1821년 베를린에 있는 야니케(Jaenicke) 선교학교 에 왕립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이곳에서 신학적 지식을 깊이 쌓았으며, 이후 베를린 선교학교 에서 수학하고 18267, 23세의 나이에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고 동아시아 선교사가 되었다.

 

 

동아시아 선교 여정의 시작

 

 

귀츨라프는 1826년 네덜란드 선교회에 의해 자와섬 (자카르타) 으로 파송되었다. 당시 중국은 서양 선교사에게 문을 굳게 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화교들을 대상으로 중국어와 선교 활동을 준비했다.

 

 

1828, 네덜란드 선교회를 떠나 싱가포르를 거쳐 방콕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런던선교회 소속 제이콥 톰린(Jacob Tomlin) 선교사와 협력하여 태국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이시기에 그의 아내 마리아 뉴엘 (Maria Newell)이 죽었다. 그는 개인적 아픔을 겪었으나,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중국으로 향했다.

 

 

통역가 겸 선교사로서 이중적 정체성 확립

 

 

1832, 귀츨라프는 중국 개척 선교의 선구자 로버트 모리슨 (Robert Morrison)의 추천을 받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무장 상선인 500 톤급'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에 승선했다.

 

그는 이 배의 선장 윌리엄 자딘(William Jardine)의 통역관이자 배의 의사(船醫)의 신분으로 동행했으나 이 상선은 아편 밀수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 항해의 표면적인 목적은 조선과 중국 연안 지역의 통상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었으나, 선교사 귀츨라프의 마음속에는 "조선과 일본 백성의 구령과 해상 복음 루트 개발"이라는 선교적 사명이 있었다.

 

 

이 무렵, 네덜란드 선교회가 중국 내지 선교를 불허하자, 그는 네덜 란드 선교회를 떠나 런던선교회로 옮겼다. 그후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해 중국식 복장을 하고 통상선에 올랐다. 이런 그를 사람들은 '괴짜 선교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선교적 열정은 제국주의의 현실과 분리될 수 없었다.

 

 

1차 아편전쟁(1839~1842) , 그는 영국 외교 사절단의 통역사로 활동했고, 그리고 아편전쟁 이후에는 닝보와 저우산의 치안판사 (magistrate)로 임명되어 일했다.

 

 

1842년에는 홍콩 신설 식민지의 첫 번째 중국 담당 비서관보 (assistant Chinese Secretary)가 되기도 하는 등 영국 제국 행정부의 일원으로 공식적인 역할 등을 중국에서 수행했다.

 

 

중국에서 이러한 활동을 한 귀츨라프를 중국 역사학자들은 제국주의 앞잡이(帝国主义的走狗)’이라고 평가한다.

 

 

2. 최초로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

 

 

로드 애머스트호의 조선 서해안 탐험

 

 

1832226일 마카오를 출발한 로드 애머스트호는 대만, 상해, 산동 지역을 탐사한 후, 717일 조선의 황해도 장산곶 인근 해역에 기항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통상 요구라는 구체적인 의도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는 남하하여 723(음력 625)부터 충청도 보령 앞바다 의 고대도에 정박하여 약 25일간(723~812) 머물렀다.

 

 

귀츨라프는 통역관의 역할을 수행하며 홍주목사(洪州牧使) 이민회 (李敏会), 수군우후(水军虞候) 김형수(金莹绶) 등 조선 관리들과 한자로 문답하며 교류했고, 영국과의 통상 및 선교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으며, 결국 일행은 817일 조선을 떠나 일본 류큐국(琉球国)으로 향했다.

 

 

귀츨라프의 조선에서의 선구적 업적들

 

 

귀츨라프의 조선 체류 기간은 비록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기록들은 한국 개신교 역사의 중요한 서막을 열었다.

그는 조선을 방문한 개신교의 첫 선교사이며, 그가 남긴 업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최초로 한글 주기도문 번역 시도: 귀츨라프는 고대도에서 '양이 (Yang-yih)'라는 이름의 조선 청년에게 한글을 배우고, 한문으로 된 주기도문을 한글로 옮겨 주민들에게 가르쳤다. 이 시도는 비록 단편적이지만 한글 성경 번역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2) 최초로 한문 성경 및 전도서적 전달: 그는 조선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과 전도서적을 배포했으며, 순조대왕에게는 로버트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 성경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진상했다.

 

 

3) 최초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소개: 귀츨라프는 '한국어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이라는 소논문을 발표하여 "한글이 매우 간단하지만 동시에 독창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한 글자"라고 극찬하며 서양에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최초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9

 

 

4) 최초로 서양 감자 파종: 먹을거리가 부족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 감자 종자를 전래하고 재배법을 가르쳤으며, 야생 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도 전수하였다.

 

 

5) 최초로 서양 근대 의술 보급: 고대도 도착 이후 감기 환자 60여 명을 포함한 주민들에게 약을 처방하며, 서양 선교사로서 서양의 근대 의술을 최초로 베푼 기록을 남겼다.

 

 

6) 최초로 동북아를 위한 선교전략 구상: 그는 제주도 일대를 둘러본 후, 제주도를 조선, 중국, 만주, 일본을 잇는 체계적인 선교 기지(Missions station)로 삼아야 한다는 구상을 언급하였다.

 

장석/ 페이스북 글, 2025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