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이해하기 어려운가?
성경에는 ‘천년왕국’(Millennial Kingdom)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목 베임을 받은 자들 곧 순교자들과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은 자들과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성도들이 살아나서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다(계 20:4). 기독교계는 이를 일컬어 ‘천년왕국’이라고 한다.
요한의 계시록이 말하는 ‘천년왕국’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종말론의 천년왕국설은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로 나뉜다. 기독교인은 대체로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지지한다. 개혁신학은 무천년설을 지지한다. 기독교인은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천년왕국론은 개인의 선택 사안이다. ‘천년왕국론’은 하나의 이론, 학설이다. 어느 견해 하나를 절대시하고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힐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도 현실은 천년왕국론에 근거한 독선적인 주장이 난무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비방하고 적의를 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느 하나의 이론에 함몰되거나 이론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천년왕국론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다. 문자적 해석자들은 천년왕국을 연대기 순 곧 시간 순서로 이해한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 이하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묘사와 20장 1절부터 3절까지의 사탄의 무저갱에 갇힘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 4절이 언급하는 종말 사건의 순서와 표현을 모두 문자적으로 풀이한다.
전천년설은 예수님의 재림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20장 1절과 2절과 3절이 말하는 대로 문자적으로 사탄이 무저갱에 천년 동안 갇힌다고 한다. 그 다음의 “순교자들이 살아난다”(계 20:4)를 문자적으로 풀이하면서 이를 몸의 부활이라고 본다. 순교자들의 몸이 부활하여 그들이 정확히 천년 동안 이 땅에서 왕 노릇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님이 재림하고, 사탄이 천년 동안 결박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이 땅에서 천년왕국을 누릴 것이라고 믿는다.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이론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이 세상에는 사탄의 활동이 왕성하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사탄을 결박한다.
전천년설 신봉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세상이 험악해 지고, 살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한다는 이론이다. 요한계시록 19장의 예수님의 재림과 사탄의 결박과 천년왕국에 대한 묘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이 말하는 천년왕국이 있은 뒤에 19장이 언급하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의 재림 때 사탄의 결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사탄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후천년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초림(初臨)한 이후 사탄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후천년설의 또 다른 전제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이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는 것이다. 후천년주의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도 몸의 부활이 아니라 죽은 영혼들의 영적 부활로 이해한다. 거듭남 또는 중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후천년주의자들에게 천년왕국의 ‘천년’은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다. ‘천년’이 상징하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긴 기간에 이 땅에 하나님의 의와 평강의 나라가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후천년설은 기독교인이 복음을 전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또 사회개혁이 일어나서 세상이 점점 좋아지는 가시적인 천년왕국이 임한 뒤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후천년설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우리의 세상이 실제로 좋아져야 한다. 악이 줄어들고 공의로운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무천년설도 천년왕국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우리의 시간에 따른 정확한 천년기간이 아니라 일련의 종말론적 사건과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치명타를 입었다고 해석한다.
한편,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왕국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곧 천년왕국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하는 이론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때로는 죽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이 세상이 점점 정의롭고 선해 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선과 악이 공존하며, 불의와 폭력과 비정의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예수를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교회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무천년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의 역사 전체가 천년왕국에 속한다고 본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가운데 어느 견해가 더 타당한가?
요한계시록은 상징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 사이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될 경우를 제시한다. 예컨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어린 양’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정말 ‘음-매’ 하고 소리를 지르는 양의 새끼라고 보지 않는다. ‘어린 양’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엉뚱한 결과에 이른다.
요한계시록은 적그리스도 또는 거짓 선지자를 ‘짐승’이라고 일컫는다. 이 짐승은 뿔 달린 실제 짐승이나 괴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풀이해야 하는 표현이다.
한편, 성경 본문들 가운데는 간혹 상징적으로 해석하든 문자적으로 해석하든 큰 오류에 빠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이 언급하는 천년왕국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전천년설 견해를 따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든, 후천년설 또는 무천년설을 취하여 요한계시록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든, 그 선택은 기독인의 자유에 해당한다.
전천년설, 후천천년설, 무천연설 중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를 검토하려 하면 먼저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오늘날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천년왕국 이론은 무천년설이다. 어거스틴이 이 이론을 주창한 이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도 이 견해를 지지했다. 어거스틴이 등장하기 이전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대부분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전천년설은 이 세상이 점점 악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견해의 장점은 세상이 아무리 약해져도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배도하지 않겠다고 하는 결단과 도전 정신을 가지게 하는 점이다.
후천년설의 장점은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그런 뒤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믿기 때문에 복음전도와 사회개혁을 통해 좋은 세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게 한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후천년설을 지지하면서 자기들이 건설하는 신천지를 하나님의 나라로 여겼다. 개혁파 회중교회의 목사 조나단 에드워드는 후천년설을 지지했다.
인류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적 사건들을 겪은 뒤에, 이 세상이 점점 좋아지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후천년설을 믿고 복음 전도와 사회 개혁을 통해 이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으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후천년설은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 만큼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전천년설은 세상이 점점 악해지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숨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러한 믿음을 강화한다.
후천년설은 세상을 복음과 사회개혁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평강이 다스리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도전을 준다.
무천년설은 세상이 어떻든 간에 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에서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전히 임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숨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 이야기는 예수님이 재림하면 휴거(Rapture)가 일어난다는 설과 직결되어 있다. 휴거는 기독교 신자가 하늘로 들림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휴거 신봉자들 가운데는 그것이 7년 대 환란 후에 일어난다고 믿는 그룹과 대 환란 전에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전천년주의자들 가운데는 대 환란 전에 기독교인들이 하늘로 들림을 받는다고 믿는 자들이 많다. 이 주장은 공포의 대 환란을 겪지 않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만든다.
전천년주의자가 휴거를 믿는다고 말하는 경우,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이 언젠가 공중으로 끌어올려 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대 환란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종말의 때에 이 세상에 7년 대 환란이 있을 것이며, 그 환란이 일어나기 전에 휴거 받아 하늘로, 공중으로 올라가므로, 자신은 대 환란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종말론적 대 재앙 곧 7년 대 환란을 비켜갈 것이라는 의미이다.
과연 기독교인들 또는 지상의 교회는 종말론적 환란을 비껴갈 것인가? 과연 환란 전 휴거 이론은 타당한가?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포함한 성경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이 고난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임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믿는 길, 십자가의 길이 고난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요한계시록 7장에는 흰옷 입은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사람들은 큰 환란을 통과한 기독인들이다. 구원받은 큰 무리는 환란을 비껴간 사람들이 아니라 큰 환란을 겪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자들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메시지를 전하면서 환란과 관련하여 ‘이기는 자’를 크게 부각시킨다. “이기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고 한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상급은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과하고 큰 환란을 이긴 자에게 주어진다.
요한계시록 11장은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을 등장시킨다. 이들은 모두 예수를 증거하다가 순교한 자들이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등장하는 어린 양을 따르는 14만 4천 명은 이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그 양을 따르는 자들이다. 꽃길을 밟을 때만이 아니라 가시밭 길, 십자가의 길, 순교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다. 이들은 어린 양 덕분에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다.
요한은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라”(계 14:13)고 말한다. 성경은 순교를 '복'이라고 말한다. 순교와 복을 동일시하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우리 인간의 성정 곧 편안한 것을 선호하고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면류관은 가시관을 쓴 자에게 주어진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고 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명료한 메시지이다(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도 면류관이 있다는 발상은 요한계시록이 비판하는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에 해당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천년왕국과 관련하여 “이기는 자”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라고 함은 환란 후 휴거설을 지지한다. 휴거설은 요한계시록의 전체 메시지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천년왕국 환상을 보여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천년왕국에 관한 메시지는 기독인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일깨운다. 다음의 요한계시록 성경구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계 20:4). “이는 첫째 부활이라”(계 20:5).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6).
요한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이 있고 거룩하다’라고 말한다. '복이 있다’ 와 ‘거룩하다’는 단어는 이 주인공들을 묘사한다.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천년왕국의 주인공들이다.
요한에 따르면 복있고 거룩한 자들은 지독한 고통을 거친 순교자들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천년왕국의 첫 번째 주인공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느라고 목 베임 받은 자들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자들이다.
이와 동일한 메시지는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도 등장한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은 어린 양의 신부, 어린 양의 아내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준다. 이 신부는 교회를 상징한다.
위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깨끗하고 빛나는 세마포”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믿음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어떻게 옳은 행실을 살아야 할지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할지를 말한다. 그 거룩한 삶의 핵심은 절정은 박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배도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목숨을 내걸고 순교의 각오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일이다.
천년왕국 메시지는 우리의 오늘의 삶이 거룩해야 함을 말한다. 종말론 신앙과 천년왕국에 대한 가르침의 초점은 오늘의 삶의 거룩성에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뜻 곧 창조자의 시간계획에 달려 있다.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주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매일 성실하게 성결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성실한 삶이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주님이 원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천년왕국론을 이해하려고 하면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는 것을 곁들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천년설은 이 둘로 나뉜다.
역사적 전천년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몇 가지의 특징적인 사건들이 발생한다. 세계 복음화, 7년 대환란, 대반역과 배도, 적그리스도의 출현 등이다. 교회는 최후의 환난에 해당하는 이것들을 통과해야 한다. 대 환란 후에 공중 휴거가 있다. 환란 후에 곧 그리스도가 재림 할 때 죽은 신자들은 부활하고, 환란 때 신앙을 지킨 살아남은 신자들은 휴거하여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신자들은 그 뒤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지상으로 내려와 적그리스도의 최후를 본다.
역사적 전천년설에 따르면, 이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얻는다. 연이어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이뤄지고 신자들은 모두 왕노릇한다. 천년왕국 시기에도 죄와 죽음은 존재하지만 악은 미미하며 의가 온 세계를 지배한다. 천년기가 끝날 무렵, 결박되어 있던 사탄이 풀려나고 나라들을 다시금 미혹한다. 사탄은 반역하는 나라들을 모아들여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일으키고 성도들의 진을 공격한다. 그러나 사탄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로 심판을 받고 소멸되어 지옥에 던져진다. 그 후에 죽었던 신자들이 부활하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이 때 하늘의 생명책에 녹명(錄名)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간다.
풀러신학교의 조지 엘돈 래드(George E. Ladd, 1911-1982)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환란 후 재림설을 발전시킨 신약신학자로 유명하다. 래드의. <신약신학>(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는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 다음 가는 영향력 있는 책으로 평가받는다. 래드는 개혁주의 종말론과 구원론을 거부했다. 고든칼리지, 고든신학교, 하버드대학교(Ph.D.)에서 공부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은 할 린제이(Hal Lindsey, 1929-)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만이 기독교인을 위한 참된 희망이라고 했다. 린제이는 달라스신학교에서 신학석사(M.Th.) 과정을 수학한 신약신학도이다. 두번째 부인과 함께 대학생선교회을 위해 1969년까지 사역했다. 린세이는 1994년에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칼니포니아신학대학원(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는 대환란 전에 신자들이 휴거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가 재림 한 뒤에 성도들이 천년 동안 이 땅 위에서 왕노릇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와 동일하다.
세대주의 교리의 기본 원리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경의 예언에 대한 철저한 문자적 해석이다. 둘째는 이스라엘과 교회, 지상의 백성과 천상의 백성, 유대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철저한 이원론적 구별이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여러 단계의 시대 또는 세대로 구별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순결시대, 양심 곧 도덕적 책임시대, 인간 정부 시대, 약속시대, 율법시대, 교회시대, 왕국 시대 등이다. 각 시대는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본다.
세대주의에 따르면 구약의 모든 예언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한 지상 왕국의 약속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약속이 유대인들의 예수 그리스도 거부에 의해서 천년기 때까지 연기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때가 이르기까지는 기독교 시대이며, 교회가 지상의 왕국이 아닌 신비 속의 하늘의 왕국을 구성한다고 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에 걸쳐 발생한다. 첫 단계는 휴거이다, 대 환란을 통과한 뒤에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역사적 전천년설과 달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 환란이 시작되지 전에 믿는 자들이 휴거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시대적 징조가 없이 급작스럽게 이뤄진다. 예수님의 재림 전에 구약성경 시대의 성도들을 제외한 모든 참 신자의 부활과 더불어 생존한 신자들이 변화하고 휴거가 이뤄진다. 이 신자들은 하늘에서 7년 동안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신부 단장을 한다. 이 때 다니엘서 예언에 나타난 70주의 마지막 70번째 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다. 교회가 하늘에 머무는 7년 동안 지상에 대환난이 찾아온다. 적그리스도가 잔인한 통치를 시작하고 땅에는 무서운 재앙이 임한다. 동시에 복음이 전파되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천년왕국에 들어갈 유대인 14만 4천명)과 뒤늦게 회개하고 돌이킨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땅의 왕들과 짐승들의 군대와 거짓 선지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며 아마겟돈 전쟁을 벌인다.
7년 동안의 대 환란의 기간이 끝날 때, 그리스도는 교회와 더불어 영광 중에 재림한다. 이것이 두 번째 재림인 귀환이다. 이 때 그리스도는 땅에 내려와 원수들을 멸하고 아마겟돈 전쟁을 종식시킨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고 재규합되어 팔레스틴으로 모인다. 마귀는 결박되어 무저갱 속에 천년 동안 갇히게 된다. 또한 방금 끝난 7년 환난기 동안 죽은 성도들은 일으킴을 받는다. 이와 함께 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드디어 부활하며, 모두 천상의 교회에 합류한다. 그 뒤에는 살아있는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며, 심판을 통과한 자들은 천년왕국의 통치에 들어가 복을 누린다.
천년왕국 통치 기간에는 지상의 왕국과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통치가 이뤄진다. 천년왕국 기간이 끝날 무렵 사탄의 반란이 있지만 사탄은 진압되어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 주장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천년기가 끝날 때, 천년기 동안 죽은 모든 신자들은 부활하고, 모든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부활하여 백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 이것이 두 번 째 사망이다. 그 후에 최종적으로 어떤 죽음이나 불완전함도 없는 완전한 나라가 이뤄진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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