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슬라프 펠리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 비아지기 2017
『성서, 역사와 만나다 - 민족의 경전에서 인류의 고전으로』의 지은이 야로슬라프 펠리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을 하나 올립니다. 미국의 저명한 그리스도교 잡지인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수석편집자인 티모시 조지가 펠리칸 사후 그를 추모하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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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로 기쁨을 누리다. , 티모시 조지 (크리스채너티 수석 편집자)
2006년 5월 13일 야로슬라프 펠리칸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학계는 당대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옹호자이자 미국이 배출한 최고의 교회사 학자를 잃었다. ‘위대한’이나 ‘최고’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좋게 평하기 위해 너무나 자주 부적절하게, 느슨한 방식으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야리’(펠리칸의 애칭)의 경우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진실이다.
생전에 그가 이룬 업적은 경이롭다. 그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다룬 40여 권의 저서와 10권이 넘는 참고 자료를 편집했다. 벨파라이소 대학교, 컨콜디아 신학교, 시카고 대학교를 거쳐 1962년부터는 예일 대학교에서 다양한 세대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예일 대학교 대학원장, 미 학술원 의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1983년에는 국립 인문학 재단에서 수여하는 제퍼슨 상을 받았으며 2004년에는 인문학 분야에서 평생에 걸쳐 빼어난 업적을 이룬 이에게 수여하는 존 클루지 상을 받았다. 애버딘 대학교에서 기포드 강연을, 토론토 대학교에서 질송 강연을 맡았고 전 세계 42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외에도 그가 이룬 수많은 업적을 여기에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열정을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는 그리스도교 전통이라는 이야기에 담긴 풍요로움, 드라마, 일관성, 사랑, 엄격함을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담긴 의미, 그 의미가 빚어내는 풍요롭고도 깊은 차원을 드러내고자 했다.
슬라브 유산
펠리칸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시 『파우스트』의 구절을 곧잘 인용했다.
“그대가 유산으로 상속받은 것은
이제 그대의 과제가 되었다.
사용치 않는 재산은 무거운 짐만 될 따름이니
그대는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
펠리칸의 경이로운 학적 활동의 동력은 그의 슬라브 가족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부모는 유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루터교 목사였다. 어머니는 에머슨의 수필들을 읽으며 영어를 익힌 학교 교사였다. 그들은 어린 펠리칸에게 배움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심어주었다. 그가 저녁 식사를 하는 식탁에 손이 닿지 못하던 시절, 그의 부모는 그를 미네J.P. Migne가 편집한 교부학 총서, 원어로 된 교보들의 문헌들을 모아 놓은 책 위에 앉혔다. 훗날 그는 이를 두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교부들에게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실제로 그의 언어 능력은 경이롭다 못해 경악스러웠다. 그는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와 같은 고전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슬라브어, 체코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세르비아어, 모든 로망스어(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 밖의 수많은 언어에 능통했다. 이따금 그는 언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항공기 라디오를 듣곤 했다(이 중에는 알바니아어도 있었는데 그는 택시 운전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언어가 무척 유용하다고 말했다).
그의 깊은 그리스도교 신심은 루터의 소요리 문답, 바흐의 합창곡, 무엇보다도 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이후 그의 학적 작업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지만 삶의 대부분을 세속 학교 주변에서 보냈다. 그러나 어렸을 때 물려받은 신앙은 그의 가슴 속에 늘 살아 있었다. 언젠가 그는 고백했다.
"나는 대학에 있는 동시대 신학자들과 장단을 맞추려는 노력을 언젠가부터 접었다.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정당성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의심한 적이 없다. 나는 신앙을 늘 간직했다. 이때 신앙은 다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복잡하지 않은 슬라브(정교회) 신심이었다.”
전통에 대한 원대한 시야
1946년 조숙했던 펠리칸은 22세의 나이에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학사 학위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동시에 받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첫 번째 책 『루터에서 키에르케고어까지』From Luther to Kierkegaard(1950)가 나왔다. 이내 그는 동 세대에서 가장 탁월한 루터 연구자가 되었다. 그는 55권 분량의 영역본 루터 선집의 대표 편집자였으며 별도로 루터의 성서 주석에 관한 책을 펴냈다. 그는 언제나 교회일치 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날 쓴 『로마 가톨릭 주의의 난제』The Riddle of Roman Catholicism(1959)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저작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사려 깊은 입문서다.
일설에 따르면 칼 바르트Karl Barth는 10세 때 자신의 ‘전집’을 쓸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펠리칸 또한 자신이 ‘커다란 책’이라고 부른 저작을 학적 경력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계획은 세부적이면서도 분명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 것”, 즉 그리스도교 교리에 관한 포괄적인 역사를 기술하고자 했다.
펠리칸 이전에 이 거대한 작업을 수행한 사람은 독일 자유주의 개신교의 위대한 적자였던 아돌프 하르낙Adolf Harnack 뿐이었다. 그는 세 권으로 이루어진 교리사에서 이 거대한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다룬 주제인 교리의 내용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교리를 과거의 족쇄로 간주하고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펠리칸 또한 하르낙을 좇아 이 주제에 엄격하게 역사적인 방식으로 접근했으나 하르낙과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내용에 커다란 공감으로 대했다. 언젠가 그는 말했다.
"나는 (나의 선배, 선생들, 동시대인들이 그러했듯) 신학적 자유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가 아닌, 전통과 정통 안에서 특정 부분이나 특정 시기를 해석하는 전제를 발견했다.“
그 결과 그가 단순하게 『그리스도교 전통』The Christian Tradition이라고 부른 다섯 권짜리 책이 출간되었다. 이 주저는 그가 남긴 업적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다양성과 다양한 표현을 소개할 뿐 아니라 신약성서에서 “성도들에게 한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유다 1:3)이라고 부른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일치와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관심을 가졌던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본문들에 대한 관심은 발레리 호치키스와 함께 편집한 4권 분량의 비평판, 그리고 『나는 믿나이다』Credo라고 불리는 한 권 짜리 역사적, 신학적 안내서의 출간으로 이어졌다(이 또한 위대한 업적이나 그리스도교 전통이라는 대작과 견주었을 때는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덜하다).
사파리 중인 예수
유대교에는 (중심 신조인) 쉐마가 있고 이슬람교에는 샤하다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던진 "너는 나를 누구라 부르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말 그대로 수세기를 거쳐 수천가지로 만들어진 진술을 갖고 있다. 펠리칸의 전집에는 수백개의 진술이 포함되어 있고, 그 중에는 나이지리아 마사이족의 신앙고백도 있다. 이 신앙고백에서 그들은 예수가 "사파리에서 언제나 선한 일을 행하신다"고 선언한다. 또한 예수가 "고문당하고 손과 발이 못박힌 뒤에 무덤에 묻히셨지만 하이에나들은 그를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이 되던 날, 그는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그는 하늘로 오르셨다. 그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을 펠리칸은 나이지리아 동부 병원에서 일하던 성직자 중 하나였던 그의 학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훗날 그는 이 고백문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회고했다. “그녀가 이 신앙 고백문을 가져왔을 때 나는 고백문에 담긴 내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꼈다. 그렇다. 하이에나는 그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고 어떤 공격도 가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하이에나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계신다.”
살아있는 신앙
펠리칸은 많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 주제들은 하나하나가 깊으면서도 어려운 주제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주제들을 단순하고도 명확하며 우아한 문체로 표현해냈다. 그는 심원한 진리들을 명료하면서도 쉽게 잊을 수 없는 문장으로 표현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널리 알려진 문장들을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자들만 다루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다.”
“모든 사람은 현재에 관해서는 전문가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과거를 대신해 소수 의견을 제기하는 것이다.”
“전통은 죽은 이들의 살아있는 신앙이다.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이들의 죽은 신앙이다.”
그는 예일 대학교 전임자였던 롤런드 베인턴Roland H. Bainton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몇몇 저작들, 이를테면 『인류 역사에 나타난 예수』Jesus Through the Centuries, 『성서, 역사와 만나다』 와 같은 책들은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8년 3월 25일, 성모 마리아 축일에 펠리칸과 그의 아내 실비아는 정교회로 전입했다. 펠리칸은 아마도 몇몇 사람들은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자신을 잘 아는 소수는 이 사실에 놀라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말했다. “오랜 시간 공항 주변을 선회하던 비행기의 연료가 다한 것이다.” 동방 정교회로 옮긴 행동은 슬라브 신심이라는 그의 뿌리, 동방 정교회의 전례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 동방 정교회 신학자인 조지 플로로프스키Georges Florovosky과 나누었던 우정, 『그리스도교 전통』 2권에서 동방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다룬 페이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순전한 기쁨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생애 마지막 시기 그는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의 이사로 활동했다.
나는 펠리칸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모두가 그러하듯 나는 그의 학생이었다. 역사 신학을 공부하던 젊은 학생 시절, 나는 그가 쓴 모든 저작, 글을 읽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다. 이는 분명 벅찬 일이었다. 1995년에 나온 그의 참고문헌 목록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간 이루어진 풍성한 결실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50페이지 분량에 이른다. 그는 친절한 동료이자 친구였으며 내가 역사 신학을 이어가는데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펠리칸은 예술과 학문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는 역사와 신학뿐만 아니라 예술, 정치, 법, 시, 교육이론, 공공윤리에 관련된 수많은 글과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이 모든 작업을 학자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인으로써 수행했다. 그는 인도주의자였으며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의 남긴 유산은 앞으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윤리적 상상력을 복돋아 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 그의 교회에 속한 이들, 구원자의 사랑이 담긴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 사이에서 빛날 것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성과 속 사이에서’라는 글에서 펠리칸은 바흐를 신학자들 사이에 놓으며 그가 “예수여 도우소서”라는 말로 작곡을 시작해 “하느님 당신 홀로 영광 받으소서”라는 말을 하며 작곡을 마무리했음을 지적했다. 이는 펠리칸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코튼 마터가 교회사가를 불렀던 표현을 빌려 쓰자면) 그는 “주님을 상기시키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성실했으며 신실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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