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성서연구와 성서신학 운동
엄현섭
I. 서론
한국교회가 선교 백여 년 만에 세계 어느 나라의 교회도 추종을 불허할 만큼 급성장한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 개신 교회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양적으로 많은 성장을 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은 좋은 현상이지만 그에 따르는 교회의 질적인 성장도 절실한 요소이다. 양적으로 단시일 안에 성장한 이후 질적인 성장이 미처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문제 역시 적지 않았다. 교인의 질적인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성서의 내용을 교인들이 많이 알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여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베델성서연구를 한국에 도입한 것은 시기적절한 일이었다. 1969년 2월 베델성서연구의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Harley Swiggum)이 한국에 와서 기독교 한국 루터회 지도자들과 이 프로그램을 한국에서 실시하는 문제를 의논함으로써, 베델성서연구가 한국에 도입되는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되었다.1)
이 도입과정은 한국에서 베델성서연구의 실시 항목에서 자세하게 다루려고 하나, 이 성서연구 과정은 1974년 제1회 강습회 실시 이후 1998년 6월까지 삼십만 명에 이르는 회원이 가입하여 성경을 공부하였고 공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실시하는 여러 가지 성경공부 가운데 많은 회원을 가진 것 중에 하나이며 한국 교인들의 성경 지식을 매우 향상시켰고 신앙생활에 큰 활력을 불어넣어 준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지난 24년간 삼십만 이상이 공부하여 많은 공헌을 한 베델성서연구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저자 할레이 스위감이 이 프로그램을 저술할 때 어떠한 상황, 즉 성서 신학의 어떠한 흐름 속에서 이러한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 필자는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먼저 한국에서 베델성서연구의 간단한 역사와 현황을 살펴보고, 베델성서연구에 대한 한국 학자와 교인들의 연구와 반응을 연구하며 저자 할레이 스위감에 대한 개인적인 배경을 참고하며 이러한 내용들이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살피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글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한국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베델성서연구를 준비하고 발전시키고 헌신적으로 봉사하여 이 프로그램이 한국 교인이면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만든 분을 추모하려는 것이다.
그 분은 바로 고 지원상 목사님이시다. 그 분의 묘비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 분의 1주기를 맞아 이 글을 고 지원상 목사님께 헌정하는 바이다.
II. 베델 성서연구
베델성서연구(원명 : The Bethel Series)는 1959년 미국에서 할레이 스위감이 저술하여 시작하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에 대하여 개인적인 배경을 다루려 한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이민 온 제2세대 미국인으로서 위스컨신 주 마운튼 호렙(Mt. Horeb, Wisconsin)이라는 곳의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아이오와 주 데코라(Decorah, Iowa)에 있는 루터대학을 졸업하였고, 1957년에 미네소타주 센트 폴(St. Paul, Minnesota) 소재 루터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여 목회학 석사(M. Div)를 받았다.2)
할레이 스위감이 베델성서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55년 그가 준목으로서 목회실습을 하던 위스컨신 주 메디슨(Madison, Wisconsin)에 있는 베델 루터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면서이다. 그는 신·구약 성경을 전반적으로 교인들이 파악할 수 있도록 교안을 작성하고 수강생들이 더 오랫동안 성경에 있는 중요한 개념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각 재료를 사용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성서연구에 대한 생각은 그가 루터대학과 루터 신학대학원 재학시절 얻은 것이었다고 한다.
1957년 할레이 스위감은 목사 안수를 받고 그가 목회 실습을 했던 베델 루터교회에 부목사로 청빙되었다. 그의 소임은 교회가 장년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교재의 개요를 만들어 이것을 그 교회에서 실험적으로 가르쳤다. 그 결과 그 개요를 더 확대하여 교재를 발간할 필요가 생겼다. 이 교재 발간을 위한 재정적인 후원은 베델 루터교회가 맡았다.
저자 할레이 스위감은 신·구약 성경을 전반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구약과 신약을 각각 20과로 편집하였고 각 과마다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개요를 만들었다. 이 때 베델 루터교회 담임 목사인 모리스 위(Morris Wee)가 저자에게 시각 자료를 사용하도록 조언하였다. 저자는 미국 정부를 위하여 상업미술 작업을 하였던 월터 올슨(Walther Ohlson)에게 각 과 마다 요약하여 기억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저자와 화가는 많은 시간, 내용에 대하여 토론한 후 그림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교재를 가지고 저자는 베델 루터교회 장년 교인들 가운데 28명을 선발하였다. 남녀 동수로 각각 14명씩 선발한 것이다. 첫 번 실시할 때 그 수강생들은 다음에 베델성서연구를 가르칠 강사로 교육한 것이다. 그들은 매 월요일 모여서 두 시간 반씩 공부를 2년 동안 계속했다. 물론 여름에는 방학을 하였다. 저자는 이 수강생들에게 한 주간 동안 집에서 적어도 열 시간을 숙제하는데 할애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2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교사 자격을 받고 베델 루터교회에서 다음 수강생을 모집할 때 500명의 지원자들이 몰려왔다. 그 시절 장년 성서연구에 대한 열성이 대단하여 이 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이 다른 교회까지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 결과 1959년 할레이 스위감은 베델 루터교회 부목사직을 사임하고 비영리 재단인 ‘장년 기독교 교육재단’(Adult Christian Education Foundation, 약자: ACEF)을 설립하여 대표직을 맡아 장년 성서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이러한 공로로 인해서 그의 모교 루터대학에서 1965년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73년 5월 20일 위스콘신 주 케노사(Kenosha, Wisconsin)에 있는 카르타쥐(Carthage)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할레이 스위감은 신구약 성서편 교재에 이어 1970년 네 부분으로 된 생활편 교재를 저술하였다. 그 내용은 행복한 결혼 생활, 일상생활의 보배들(잠언 연구), 십계명, 구속의 교회이다. 이 교재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진리를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하며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할레이 스위감이 신구약 성서편과 생활편을 저술한 동기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로 성서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경시이다. 즉 우리가 세속 사회와 관련을 가지고 교회가 증거 해야 할 모든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져야할 주요 무기는 성서임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로는 장년 기독교 교육의 결여 문제이다. 흔히들 세례 받고 입교하면 종교상의 졸업으로 생각한다. 어린이들의 기독교 교육은 부모로부터의 영향이 절대적인데 부모들이 성서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자녀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기를 기대할 것인가?
셋째로는 성서의 적절한 생활화의 부재이다. 우리는 많은 성서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러나 흔히 그 메시지는 모른다. 성서를 오늘의 우리 생활에 적용할 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수레는 있어도 화물이 없다.
현재 이 교재는 독일어, 서반어, 라트비안어, 포르투갈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로 번역되어 미국을 비롯하여, 카나다, 멕시코, 브라질, 홍콩, 말레이시아, 일본, 독일, 호주, 뉴질랜드, 싱가폴, 대만, 남아공화국, 공산권의 여러 나라에서 실시되고 있다.
베델성서연구의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의 학력과 경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세계 제2차 대전 후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950년대 중반까지도 미국에서 평신도 장년을 위한 좋은 성경연구 교재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가 신학공부를 하던 그 때가 바로 세계적으로 혹은 미국에서 새로운 성서연구 방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이러한 방법이 유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넓게 말해서 신 정통주의적인 성서 해석방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성서신학 분야에서 말한다면 전문적인 용어로 성서신학 운동이다.
1998년 10월 현재 ACEF(장년 기독교 교육재단의 약칭)의 통계에 따르면 다음의 내용을 알 수 있다.3)
미국 내에서 베델성서연구원에 가입한 교회 6,518 교회
미국 내에서 베델성서연구원에 참여한 교단 47 교단
미국 내에서 베델성서연구를 훈련받은 교사 89,390 명
미국 내에서 베델성서연구에 등록한 수강생 1,065,000 명
미국 내에서 베델성서연구에 등록한 주 50 주
III. 한국에서 베델성서연구
1. 역 사
기독교 한국 루터회가 한국 교회의 양적인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한국 교회에 공헌할 일을 찾고 있었다. 기독교 한국 루터회는 한국 교회의 양적인 성장에 필수 조건인 교회의 질적인 성장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노력하던 가운데 성경 연구를 통하여 공헌하기로 결정하고 그 방법을 모색하였다. 여러 가지 성경 연구가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교인들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1969년 그 때 장년 교인을 위한 성서 연구 중에 미국에서 한창 인기리에 진행되던 방법인 베델성서연구를 알게 되었고 그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 박사를 그 해 2월에 초청하였다. 스위감 박사로부터 자문을 받아 베델성서연구를 한국에서 실시할 것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여서 1970년에 베델성서연구 위원회를 조직하여서 본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준비를 하였다.4) 1971년에 저자의 동의를 받고 협력을 얻어 베델성서연구 교재를 한국어로 번역을 시작하였다.5) 이 번역 작업에 대하여 이영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침내 1971년 한국에서 베델성서연구 위원회가 조직되었고6)7) 그 준비 작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신·구약 성서연구 교재의 번역이 진행됐고 동년 9월 스위감 박사의 재차 내한을 계기로 하여 주로 연구 교재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한국에서의 실제 이행의 문제 등을 연구 논의했다. 드디어 교재의 번역이 끝났다. 당사자들이 이 번역에 얼마나 신중했는가는 그 실제 번역 과정을 알면 족히 알만하다. 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이에 의하여 번역된 이 교재는 한국적인 문화 현상에서 숨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응될 수 있는가를 신학적인 훈련을 쌓은 대한성서공회 전문 번역위원에 의해 검토된 후에도 서울의 큰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교수하는 교수로부터 신학적인 비판을 거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최종적인 검토를 거친 다음에야 74년 초8) 출판됐던 것이다.
1971년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 박사가 2차 방한하여 프로그램 시행의 구체적인 협의를 하였다. 1973년 한국에서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폴 바트링(Paul Bartling, 한국명: 박덕인) 선교사를 모금 책임자로 임명하여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고 성공적으로 모금운동이 되어 교재 출판과 강습회 실시를 차질 없이 진행하게 되었다. 여러 번의 교정과 개정을 거쳐서 드디어 한국판 베델성서연구 초판 교재가 1973년 10월 1일 출판되었다.
한국에서 첫번째 강습회가 공식적으로는 1974년 1월 27일에서 2월 8일까지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10개 교파 56명의 목사가 모여 시행되었다. 이것은 교사 강습회라는 면에서 첫번째 강습회였고 한국인에게 한국어 교재로 2년간의 첫번째 정식 프로그램은 그보다 1년 전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교재를 수정하고 개정하는 동안 루터교 신학원(Lutheran Theological Academy) 학생들에게 실시한 것이다. 그 때 교사는 힐버트 리머 박사(Hilbert Riemer, 한국명: 이무열)였고 학생은 김동진, 김승식, 김윤철, 박성완, 엄현섭, 허송(가나다 순)이었다. 이러한 실험을 한 후 1974년 첫 교사 강습회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는 매년 2주간의 강습회가 열렸다. 그러나 매년 지원자의 수가 이 훈련 강습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수보다 3배가 되어 1978년부터 2주간 강습회를 한 해에 두 번 실시하기로 한국 베델성서연구 위원회가 결정하였다.
1980년부터는 성서편에 이어서 할레이 스위감 박사의 다른 저술인 생활편의 교사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것은 4부로 된 것으로 “십계명,” “행복한 결혼,” “일상생활의 보배들” 그리고 “구속의 교회”이다.9)
강습회가 한국의 목회자뿐만 아니라 주한 미군 군목들에게도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그 동안 30여 명이 참석하였고 1986년부터는 미국과 카나다 등 외국에 있는 한국인 목회자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1년에 한 번씩 강습회를 개최하고 있으나 근래에 와서 참가자 수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10)
2. 현황
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은 어떠한 한 교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초교파적인 프로그램으로 저술된 것이다. 미국의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에서 47개 교파의 목사와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11) 교재의 성격이 어느 교파의 교리를 주장하거나 전파할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할레이 스위감 박사는 루터교회 목사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루터교적인 색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의 메시지만을 전달하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고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초교파적인 목회자들이 거부감 없이 참여하여 초교파적으로 실시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이점이 입증되고 있다. 지원용 박사는 이 초교파적인 성격과 참가한 목회자들의 유대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세미나의 중요한 점은 참석자들 사이에 강한 유대감과 동지의식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각각 서로 다른 교파에서 온 참석자들이 말씀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하나 됨을 경험한다. 이런 방식으로 베델 시리즈는 한국의 에큐메니즘에 큰 공헌을 하였다.12)
한국 베델성서연구원이 개최한 강습회 횟수는 1998년 6월 현재 신구약 성서편 강습회가 한국에서 43회, 미국에서 4회로 모두 47회이며 참석한 목회자는 5,013명이며 생활편 강습회는 한국에서 14회, 미국에서 1회로 총 15회이고 참석한 목회자는 971명이다.
신구약 성서편 강습회에 참여한 교파 수는 54개 교파이다. 예를 들면 예장 통합·합동·고신·대신·개혁·합정, 기장, 기감, 예감, 기성, 예성, 침례, 하나님의 성회, 하나님의 교회, 성공회, 구세군, 천주교, 루터교, 나사렛, 복음교회, 재건, 정교회, 기관, 미 군목 등이다.13) 생활편은 성서편의 참석 교단과 비슷하지만 그 참석 수는 훨씬 적다.14) 강습회를 졸업하고 각자의 교회 혹은 기관에 돌아가서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많은 수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98년 6월 현재 신구약 성서편에 등록하고 공부하는 수강생이 30만에 이르고 그 중 2년 과정을 졸업한 수강생이 109,984명이나 되고 생활편의 수강생은 5만이며 졸업한 수강생은 13,894명이다.
참석한 목회자의 지역별 분포를 살펴보면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그 비율대로 참석한 것을 알 수 있다. 예로 서울이 2,045명으로 약 40%이고 경기도는 791명으로 16% 순이다.15)
신구약 성서편 강습회에서 강의하는 강사는 제1회와 제2회 구약 부분까지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 박사 자신이 직접 강의를 하였고 제2회 강습회 신약 부분부터 말틴 롤핑(Martin Rohlfing)목사가 18여 년 간 강의를 하였다. 1992년 지병으로 투병하다 1994년 8월 소천하여 1993년과 1994년 1월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 박사가 다시 와서 강의하였고, 1994년 8월 라이쯔만(Wrightsman) 박사가 한 번 강의하였고, 1995년부터 힐버트 리머(Hilbert Riemer) 박사가 강의를 하고 있으며 생활편도 한동안 말틴 롤핑 목사가 강의를 하였고 지금은 한국인 목사가 강의를 맡고 있다.
베델성서연구가 한국에서 이렇게 잘 보급되고 많은 교회가 실시한 이유에 대하여 이영헌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말한다.
1974년부터 초 교파적으로 베델성서연구 강습을 시작했다. 신교 선교 백 년 미만에 한국처럼 놀라운 발전을 한 나라는 거의 세계에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요인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교회가 성서를 사랑하고 애독하는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일요일이면 어느 교회도 교회학교에서 어른 어린이들 할 것 없이 모두 다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일정 말기 중일전쟁, 미일전쟁 등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또 그것도 날이 갈수록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면서 이제는 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하여 거의 모든 성경공부 시간을 철폐하고 한 주일 한 번 한 시간 예배만 허용하여 몇 해를 지내는 동안 교회는 그만 어른들을 위한 장년 주일학교를 등한히 하게 되고 또 어른들의 이에 대한 관심도 식어가고 말았다.
해방 후 특히 6·25 동란 수복 이후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재건과 부흥 발전을 가져왔으면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 학교에는 열심을 기울여 이에 대한 교사들의 교육, 각종 교재 발간 등을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을 위한 성서교육은 여전히 미미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성경연구 방법은 구절구절 외우고 그 뜻을 해석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성서 전체와의 관련성에서 그 구절을 해석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흠을 면할 수 없었다.
이것이 모름지기 한국 교회 분쟁 기질을 조성한 이유의 하나가 아니었겠는가 여겨진다. 다행히 베델성서연구 방법은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할 수 있는 포괄적인 성서이해를 촉진하는 방법이다. 이 까닭에 이 연구방법을 진행하는 당사자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분열된 교회를 다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이기를 기대한다.16)
V. 베델성서연구 출현의 성서 신학적 배경
본 장에서는 베델성서연구가 출현하게 된 그 시대의 성서 신학적 배경을 다루려 한다.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 박사는 장년 성경 공부를 위하여 성경을 전체적으로, 즉 통전적으로 독자가 파악할 수 있는 교육적인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한 것과 더불어 그의 저술에 나타난 해석학적 요소와 그의 내용들이 어떠한 사상, 개념, 그리고 영향을 받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미 앞의 “II. 베델성서연구” 항목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저자 할레이 스위감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 초에 대학과정을 공부했고 1954년 세인트 폴에 있는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1957년에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59년에 베델성서연구를 저술하였다. 바로 1950년대가 베델 성서연구 출현의 시대적 배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1950년대에 넓게는 세계적으로, 좁게는 미국에서 있었던 성서 신학적인 경향의 하나는 소위 말하는 “성서 신학 운동”(Biblical Theology Movement)이다. 그래서 베델성서연구와 성서 신학 운동과의 관계를 검토하려고 한다.
1. 성서 신학 운동의 기원성서 신학 운동의 기원은 지역적으로 말할 때는 유럽이라고 말할 수 있고 신학의 조류로 말한다면 신 정통주의(Neo-Orthodox)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이 신 정통주의를 규명하거나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간단하게 언급하려 한다. 이 신 정통주의는 스위스의 목회자였던 칼 바르트(Karl Barth)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폴 K. 제위트(Paul K. Jewett)에 의하면 신 정통주의 신학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바르트주의라는 명칭이 때때로 이 신학적 르네상스 운동에 주어지게 된 이유는 이 운동에로의 최초의 발발이 한 젊은 스위스 목사였던 바르트에 의하여 아주 극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바르트는 과거에 독일의 자유주의 사상 안에서 철저히 훈련받았던 인물이었다. 최초로 출판된 바르트의 글은 상대주의의 문제와 씨름을 하는 것이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 밖의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는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설교자가 사람들에게 접근을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적은 판은 설교자의 손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 관한 그의 주석 Der Romerbrief가 1919년 최초로 나타나면서 그 이후 바르트는 종교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평가요 신학의 고유한 주제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 그런 산 신학의 투사로서 계속하여 왔다. 이러한 새로운 신학(본 항에서는 이것을 신 정통주의라 부른다)을 주도해 가는 대표자들 가운데 몇은 neo적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보다 orthodox적이다.49) 그는 신 정통주의 신학에 다른 명칭이 있음을 말한다. 즉 역설의 신학(The Theology of Paradox) 혹은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 또는 위기의 신학(Theology of Crisis)이다.50)
W. 테일러(W. Taylor)는 이 성서 신학 운동이 이 신 정통주의에 유래되었음을 이렇게 말한다. “바르트는 ‘사회적인 기독교’의 실패와 진화론적인 성경연구와 세계 1차 대전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매우 화가 나서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도록 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성서 신학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51) 호레이스 훔멜(Horace Hummel)도 전체적인 성서 신학 운동은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신 정통주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52) 허몰은 성서 신학 운동을 시작한 학자로 폰 라드(G. v. Rad)를 꼽고 있다.
헐버트 한(Herbert Hahn)은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성서 신학 운동의 경향을 가진 학자들을 신 정통주의 항목 아래서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H. H. 라우리(H. H. Rowley), G. E. 라이트(G. E. Wright), W. A. L. 엘므시리(W. A. S. Elmslie) 등이다.53) 게하르트 F. 하젤(Gerhard F. Hasel)은 성서 신학 운동의 중요한 세 가지 원인을 제시하였다. 1) 진화적인 자연주의 속에서 일반적으로 신앙을 잃어버린 점, 2) 역사적 진리는 순전한 과학적 객관성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으며 이와 같은 객관성은 진실로 도달 가능하다는 확신에 대한 반응, 3) 변증법적 신학(신 정통주의) 안에서 계시의 개념으로 돌아서는 경향 등이었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역사주의는 전적으로 불충분한 것임이 드러났고 그러므로 새로운 방법이 발전되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54) 그 새로운 방법이 성서 신학 운동이다.
이러한 주장과 다른 의견을 B. S. 차일즈는 내놓았다. 그것은 성서 신학 운동이 신 정통주의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을 가르치는 데 전문적으로 종사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분과 학문이 최근에 한 국면을 통과하여 또 다른 국면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또한 많은 평신도들도 느낌으로 이러한 변화를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변화의 정확한 성격은 충분히 명확한 것은 아니고, 이 변화의 성격에 대한 대부분의 성찰들은 본능적으로 느낀 인상을 피력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평신도들은 기독교인의 책임의 세속적 측면에 대한 새로운 강조를 감지하고 관심의 초점이 오늘날의 사회 문제에 모아져 있음을 느낀다. 전문적 신학자들은 흔히 “신 정통주의”로 규정된 신학적 합의의 종언과 새로운 신학 전선들의 개시에 관하여 말한다. 또한 신학자들은 관심이 성경학으로부터 사회적 행동으로 옮겨진 유동적인 상태에 있음을 날카롭게 알고 있다. … 성경에 대한 관심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특징이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말을 넘어서서 하나의55) “성서신학 운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G. F. 하젤은 차일즈의 성서신학 운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차일즈는 미국에서의 ‘성서신학 운동’에 대한 훌륭한 개요를 제시하였다. 그가 볼 때 이 운동은 비록 유럽의 성서 신학에서 연유된 것이지만 1910년부터 1930년대 사이에 있었던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의 논쟁에서 성경을 둘러싼 싸움의 대치 상황이 만든 결과였다.”56) 성서 신학 운동이 신 정통주의와 동일하다는 데는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 정통주의가 먼저 시작되었고 성서 신학 운동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둘 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에 많은 학자들은 동의한다. 제임스 바르(James Barr)는 다음과 같이 둘의 관계를 요약한다.
이렇게 해서 성서신학 운동(말하자면 1945- 60년간의)을 신학 일반의 신 정통주의 운동에 발맞추어 일어난 성서 운동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 이 말은 성서 신학자들이 신정통주의 교의학자들과 정확히 공통된 의견을 품었다는 뜻은 아니다. 중복되는 견해는 대개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성서 신학자들은 바르트같은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신학적 문제와 철학적 문제에 대해 큰 이해를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업은 비록 상이한 자료에 대해 다른 수준에서 수행되긴 했지만 신 정통신학과 대체로 같은 방향의 한 압력을 나타내었다.57)
신 정통주의와 성서 신학 운동이 공통적으로 반대한 것은 19세기 자유주의가 성경을 연구한 경향과 방법들이다. H. 헤이즈(John H. Hayes)가 요약한 19세기 성경 연구의 결과를 인용하려 한다.58)
1) 종교 그리고 종교적 실천이 독일에서 이념이나 교훈보다 연구 관심의 주요 초점이 되었다. 이러한 특색은 출판된 저서 제목 중 “신학”이 “종교”로 바뀐 것만 보아도 명백해진다. 종교가 연구의 초점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성서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 신적인 계시의 기록, 또는 신학적 사색을 위한 문헌의 보고로 취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에 기록된 종교적 역사, 역사 신학이나 교리의 역사나 또는 교리 및 신학 발전의 역사로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2) 종교적 진리와 통찰 혹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란 객관적인 신성이나 영구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인간 체험의 결과이며 기능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종교사 학파”의 특별한 강조점인데, 이들은 성서의 내용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체험적 세계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벨하우젠과 그의 추종자들이 시도했던 순수한 역사 및 문헌 연구를 뛰어넘어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3) 경전 자료의 최종적인 형태나 경전의 한계 등은 이스라엘 종교와 사상을 연구하는 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 성서 자료와 종교적 체험을 그 원래의 상황이나 또는 삶의 정황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대의 오래된 편집 과정으로 이루어진 본문의 최종적인 형태를 간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해석자는 고대 이스라엘 생활의 역사적 과정 안에 있는 원래의 내용과 상황을 재발견해야 하는데, 이것은 자료의 최종적이고 경전적인 어휘나 혹은 배열 순위와도 일치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모세 시대의 상황에 배열되었으나, 실제로는 많은 주석가들이 후대의 시기와 상황에 연결되었다고 보는 오경의 율법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적 형태가 아닌 원래의 형태가 탐구의 초점이 된 것이다. 경전 형성 그 자체까지도 이스라엘 종교 역사 내에서는 하나의 불행한 사태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 다음 탐구의 열기는 보편적 종교 세계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구약성서는 전체 종교 현상 중 극히 적은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4) 이스라엘 종교에 있어서 예언자의 우월성은 19세기 후반 구약성서 연구의 보편적인 주제가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역사 비평적인 입장은, “예언자들은 율법보다 오래 되었고, 시편은 예언과 율법보다 더 늦다.”(로이스)는 것이었다. 그러한 입장은 예언자들을 연구의 중심 자리로 밀어 놓고, 그들이 이스라엘 참 종교의 진정한 창시자인 것처럼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히브리 종교의 초점을 자연과 민족주의에서 개인적 도덕심과 보편적 유일신 사상으로 바꾸어 놓았고, 또 개인적인 체험이 제사와 제사자의 의식을 통해 제도적 형편보다 더 참된 종교의 표현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예언 현상과 예언자들을 강조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a. 역사 비평적 방법은, 모세 종교에 관한 성서의 묘사(오경이 율법서에 준한)가 원천이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계속적인 권위라는 점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시기와 다른 자료가 형성에 기여하는 시대와 영향력을 행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b. 예언 문헌은 어느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문집이라고 보았다. c. 예언자들은 원래 상황과의 공감성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데, 이것이 종교사 학파의 큰 관심사였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그들의 종교적이며 내적인 세계(황홀경의 체험까지도)를 재창조하여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d. 19세기 구약 연구에서 반제사장적이고 반제의적인 면을 강조한 것은 (실은 그 뿌리가 더 오래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며 특히 개신교의 특색이기도 하다) 히브리 성서 종교의 전통적이고도 제의적인 면을 약화시키기 위해 예언자의 예언 운동을 활용한 것이다.
5) 19세기 연구의 특색으로서 특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된 것은, 포로기 이후의 유대종교와 특히 후기 유대교에 대한 악화이다. 우리는 앞의 개요에서 이러한 감상적인 면을 많이 주목해 보았다. 이 감상은 19세기에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 것이다. 유대교에 대한 벨하우젠의 태도는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반유대교는, 그리스도교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유대교를 약화시킨, “구속사적”인 결과는 아니다. 벨하우젠은 그 당시 독일 학계의 전형적인 해석을 추종하면서 유대교를 순수한 율법적 체계로 이해했는데, 그것은 단지 “구약성서에서 신약성서로 건너뛰어야 할 하나의 공허한 간격” 이라고 보았다. 유대교는 신명기로부터 시작한 율법이 최종적으로 법제화된 것이며, 그것은 곧 종교적 창의성과 예언 운동의 종식을 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성서 신학 운동 전체에 공통된 것은 이 운동 보다 앞서 자유주의 신학 운동 하에서 행해지던 성서연구 방법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었다. 즉 자유주의 신학은 무미 건조한 역사적 주석, 분석적 경향과 자료비평에 대한 의존, 성서적 자료를 주변 문화로부터 도출된 조건에 의해 이해하려는 경향, 진화론, 자신만만한 보편적 신학적 입장, 신학적 관념과 실존적 열심의 부족 등에 반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 정통주의는 세계 제1차 대전 이후에 발생하게 되었고 성서 신학 운동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나타난 것이 다르다. 그러나 신 정통주의를 시작한 칼 바르트가 19세기 자유주의에 반작용으로 19세기의 성서연구의 경향과 다른 방향을 제시하여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권위를 회복시켰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로 성서 신학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2. 성서 신학 운동의 지역
성서 신학 운동이 펼쳐진 지역에 대하여 두 가지 주장이 있다. B. S. 차일즈는 1970년에 출판한 성서 신학의 위기라는 책을 통해 성서 신학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죤 헤이즈는 1985년 출판한 구약성서 신학사를 통하여 성서 신학 운동이 전 세계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먼저 차일즈의 주장을 소개한다. 그는 신학의 영향에 있어서 유럽의 영향은 부정할 수 없지만 신학적 과제의 개념은 독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전의 신학 동향은 물론이고 이후의 신학 동향과도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주로 일정 정도의 유럽의 영향력들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났고 외국의 여러 신학적 사조들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해서 반영하였지만, 그 특이한 미국적 특성으로 인하여 이 운동은 이와 관련된 외국의 신학 사조들과 구별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59)
차일즈는 성서 신학 운동이 미국적인 특성을 다음과 같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성서 신학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옹호하는 주요한 이유는 그것이 유럽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미국적 변용이 갖고 있는 특이한 형태를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 주제에 대한 통상적인 취급은 20년대의 독일에 그 관심을 집중시키고 미국 신학을 단순히 동일한 역사적 촉매제에 대한 지체된 반응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미국에서 작용한 실제적인 역사적 요인들을 정확하게 서술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었다.”60) 차일즈는 성서 신학 운동이 미국적인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서 신학 운동과 성서 신학과 구별을 한다. 성서 신학은 종교개혁 이후에 시작된 느슨하게 정의된 유럽의 신학 분과로서 합리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 양편에서 소위 당시의 고백적 정통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적으로 정향된 신학을 묘사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정의한다. 이는 잘 알려진 대로 19세기 후반에 있어서 역사비평학의 영향은 성공에 대한 이전의 신학적 접근방식들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 분과를 소위 종교사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로 대치하였다.61) 독일에서 이 성서 신학자에 속하는 학자를 다음과 같이 차일즈는 분류한다. 즉, 아이히로트, 폰 라드, 불트만 등이다.
성서 신학 운동이 출현하게 된 미국의 특이한 역사적 사회학적 모체는 1910년부터 30년대 후반에 걸쳐 아주 격렬하게 진행되었던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 간의 논쟁의 여파였다. 이것은 주로 개신교 교단들의 대부분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의견 대립을 이루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역사비평에 대한 주요한 싸움은 이미 19세기 말에 끝나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하여 환상에서 깨어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의 전제들은 뿌리째 흔들렸고 20년대 중반에 명확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던 성서신학(the Bible and theology)은 고뇌 속에서 재 인정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는 성경을 둘러싼 싸움을 통해 입게된 상처들은 결코 치유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와 양극은 결코 이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나 30년대의 경제공황도 지속된 자유주의 신학의 지적 파산이나 보수적인 신학 전통의 극적인 재인정이라는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차일즈에 의하면 미국에서 이 두 주의 사이의 해결은 제 2차 대전의 종결과 함께 신학적 삶의 새로운 분출이 만개하듯이 피어나서 전쟁으로부터 돌아온 새로운 신학생들의 엄청난 유입을 충족시킬 준비와 열심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처음으로 미국에서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신학적 곤경을 깨고 나올 진정한 기회가 출현하였다. 자유주의- 보수주의라는 증후군을 넘어선 또 다른 대안이 있었다. 성경 비평학을 유보조건 없이 타당한 도구로 받아들이면서도 신앙 고백적으로 정향된 굳건한 신학을 회복할 가능성이 주어졌다. 이것은 유럽 신학에 아주 개방적이면서도 유럽 신학을 사용하여 미국의 특별한 문제에 관하여 말하였던 미국 특유의 상황이었다.”62)
성서 신학 운동은 미국과 영국에서의 활동 상황은 달랐다는 것이 차일즈의 주장이다. 미국 신학자들은 성서 신학에서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 간의 절망적인 교착상태를 돌파할 기회를 보았다. 그들은 새롭고 보다 나은 시대의 동터옴을 선포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 학자들, 특히 영국 국교회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부활된 관심을 그저 환영하는 정도였고 그들이 그러한 현상을 과거의 학문과의 근본적인 단절로 생각했다는 암시는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차일즈는 미국과 영국의 특징적인 차이를 다음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로 영국에는 브룬너와 바르트의 신학에 대한 열정이 지속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던 반면에 미국에서는 이 운동의 한 구성요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성경의 사용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을 환영한 사람들조차도 소위 ‘위기신학’을 기본적으로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 국교의 신학 전통은 미국에서 출현하였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첨예한 양극 현상을 전형적인 영국식으로 처리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신학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방향에 대한 필요가 거의 표출되지 않았다.
둘째로 미국에서는 자신들의 저작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그 무엇으로 제시하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훈련 받았던 당시의 지배적인 학문 유형에 대항하는 항거로서 보는 것이 젊은 미국 성경 신학자들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모든 학자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던 학자들조차도 어떠한 위협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조용히 자신의 입장의 장점들을 논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63) 차일즈는 성서 신학 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에서는 성서학과 관련하여 신학을 하는 특정한 방식, 즉 성서 신학 운동으로 규정되어 왔던 방식이 출현하였다. 미국의 성서 신학자들은 영국과 유럽의 저작자들을 많이 활용하였지만, 그 신학 형태는 그 명칭을 하나의 운동으로 부르는 것을 정당화시켜줄 정도의 특별한 미국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64)
1970년 B. S. 차일즈가 “성서신학의 위기”라는 책을 출판하고 그 책에서 성서 신학 운동은 미국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 내용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주장이 있은 후 시간적으로 차일즈의 책보다 나중에 출판된 책에서 성서 신학 운동이 ‘세계적인 요소’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G. F. 하젤은 1972년 발표하고 1991년 개정 4판을 낸 “구약신학: 현대 논쟁의 기본 이슈들”에서 1930년대에 구약신학의 황금기가 시작되었고 독일의 학자들(젤린, 아이히로트 등)을 언급하고 미국의 라이트도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차일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차일즈)가 볼 때 이 운동은 비록 유럽의 성서 신학에서 연유된 것이지만 1910년부터 1930년대 사이 있었던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의 논쟁에서 성경을 둘러싼 싸움의 대치 상황이 만든 결과였다.” 하젤은 차일즈의 주장을 일부분 인정하지만 그 출발점은 유럽임을 분명히하고 있다.65) H. D. 훔멜은 1979년 출판된 그의 책 “The Word Becoming Flesh”에서 성서 신학 운동의 대표적인 학자로 G. 폰 라드를 꼽고 있다. 그도 성서 신학 운동의 세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1985년 출판된 “구약성서 신학사”의 저자 죤 헤이즈는 단적으로 성서 신학 운동이 미국만의 것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5년간, 성서와 성서 신학은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성서의 우위성을 강조하게 된 이 기간을 가리켜 사람들은 성서 신학 운동이란 말로 부르고 있다. 이 기간 중 성서에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교회와 신학자들 사이에서 작용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실제로 꽃을 피운 국제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운동 또는 그 시대의 신학적 정신은, 어느 한정된 문화 내의 개별적인 신학적 상황의 발로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단지 미국 신학계에서 일어난 일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66)
그는 이 국제적인 요소가 런던(1946. 8. 10-12)이나 보세이(1947. 1. 5-9)에서 거행된 세계기독교협의회(WCC)가 후원한 대회나 분과 토론 등에도 잘 드러나 있다고 한다. 이들 토론의 보고서는 1948년 암스테르담 WCC 대회 이전 “성서로부터 현대세계까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보고서의 해당되는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이러한 생각의 갈등(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간의 갈등)이 이제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는 것은 과장이다. 그러나 전세계 여러 곳의 보고로는 예전의 진보와 정통의 대결이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이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중간 노선을 취하고 있으며, 유럽 대륙에서는 바르트, 브루너, 그리고 루터의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존경심을 낳게 하여 역사 비평 방법의 존중과, 사회 및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대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성서의 역사 비평도 연대, 저자, 자료, 특수 본문의 배경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메시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성서 신학). 무엇보다도 히틀러주의의 중흥과 성장기에 유럽의 몇 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교회와 국가간의 극단적인 대결 국면에 즈음하여, 진보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겠다는 결의를 표명하여 두 가지 강조점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것은 1) 성서는 “성령의 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통해 원수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고, 2) 사회적 책임은 성서가 제시하는 바 교회 과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성서의 신적인 권위를 전제하는 성서 읽기와 성서 연구의 대부흥이 로마 가톨릭교. 동방 정교회. 개신교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을 휩쓸며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67)
1992년 발행된 The Anchor Bible Dictionary에 게재된 레번트로우(Reventlow)의 글에서도 성서 신학 운동이 국제적인 배경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성서 연구가 이 운동의 촉진제였음을 말하고 있다.68)
이러한 두 가지 주장이 나오게된 이유는 첫째 차일즈는 “성서 신학”과 “성서 신학 운동”을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차일즈는 성서 신학 운동의 기간을 너무 한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 시작 연대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 신학 운동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되었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운동이었다.
성서 신학 운동에 참여한 교파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세계적으로 볼 때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신구교를 망라하여 성서 신학 운동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계기독교협의회(1946년, 1947년)의 토론 보고서인 “성서에서 현대세계까지”에 교파의 내용이 있다. “성서의 신적인 권위를 전제하는 성서 읽기와 성서 연구의 대부흥이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회, 개신교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을 휩쓸며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69)
차일즈는 미국에서 성서 신학 운동을 주도한 교파는 장로교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운동(성서 신학 운동)에 있어서 가장 공격적인 지도자들은 흔히 장로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장로교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이전의 난투극의 결과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였으며 신학에 있어서 새로운 대안을 장려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니스트 라이트(G. Ernest Wright), 플로이드 필슨(Floyd V. Filson), 제임스 스마트(James D. Smart), 존 윅 보우만(John Wick Bowman), 존 맥케이(John A. Mackey), 엘머 홈리고센(Elmer G. Homrighausen), 조셉 해라우투니안(Joseph Haroutunian), 폴 레만(Paul Lehmann), 오토 피퍼(Otto Piper), 도날드 밀러(Donald G. Miller), 발머 켈리(Balmer H. Kelly)는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70)
차일즈는 장로교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주도한 후 이 영향이 모든 교파에 퍼졌다고 한다. “물론 거의 즉각적으로 모든 주요한 개신교 교단들은 영향을 받았고 많은 교단이 자신의 일급학자들을 통해 기여하였다.”71)고 차일즈는 말한다. 이 성서 신학 운동은 어느 한 교파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개신교에 속하는 모든 교파가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도 이에 처음에는 학자들의 참여가 없는 듯이 보였지만 1950년대 중반에는 많은 수가 참여하였다. 차일즈는 “그러나 1956년에 존 맥켄지(John MaKenzie)가 ‘양날 선 칼: 구약해석(The Two-edged Sword: An Interpretation of the Old Testament)’을 간행하였을 때 성서신학 운동은 가톨릭 학계에 깊이 침투해 있었고 성경에 대한 관심은 학자들과 평신도들 모두에게서 절정에 달해 있었다.”72) 성서 신학 운동은 구교뿐만 아니라 개신교 모든 교파가 참여한 운동이었다.
3. 성서 신학 운동의 관심
성서 신학 운동은 한 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어느 기간동안 여러 학자들의 주장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그 관심과 특색도 하나로 정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성서 신학 운동이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을 정리하고 그 특색을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성서 신학 운동이 관심을 가진 특이한 내용을 죤 헤이즈의 정리에 따라 살펴보려고 한다.73)
1) 성서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 무질서”의 문제를 다루며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과제를 위해 신학에 새로운 구심점을 주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2) 성서와 성서 신학의 역할은 전세계 보편 교회 내에 있는 분파들을 극복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성서는 교회 내의 분파와 대학의 학자들도 다 함께 동일성과 공통성을 찾을 수 있는 책으로 보았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둔 바르트 신학이나 신 정통주의 신학은 성서를 초점으로 하는 신학 연구에 주력하였다.
4) 성서 신학 운동은 진보적 역사 비평가들이 무관심하고 분석적이며, 실존적 참여 없이 건조한 주석을 하는 성서 비평에 대해 강한 반응을 보였다. 성서 자료의 신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진보적 비평에 대한 반응일 뿐 아니라 성서 본문의 참된 차원의 재발견이라 보았다
.
5) 성서의 역사적 비관주의 그리고 인간의 죄성과 역사적 타락성을 강조하는 인류학적 사실주의는 전쟁으로 황폐된 세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6) 사실상 성서 신학 운동은 19세기 후반, 특히 독일에서 일어난 반종교적이고 반구약성서적 표현에 대항해 성서의 적절성을 강조한 노력의 결과이다. 성서의 적절성에 관한 문제는 이제 국제적인 관심과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성서 신학 또는 성서를 토대로 한 신학은 신학적인 탐구,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생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설교의 필요성을 총망라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모든 관심 분야에 적절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4. 성서 신학 운동의 특색
성서 신학 운동의 특색은 학자들의 관심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고 내용도 다르지만 여기서는 필자가 가진 자료를 분석하여 특색을 정리하려고 한다.
1) 성서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 성서 신학에 대한 부활된 관심과 자신들을 동일시하였던 학자군들은 성서학에 있어서 구약 분과와 신약 분과 사이에 생겨났던 날카로운 균열을 극복할 필요성을 확신하였다. 두 분야의 학자들이 두 분야를 서로 연구할 수 있고 두 분야의 학자가 한 책을 각자의 분야를 맡아서 저술할 수 있었다. 예로는 G. E. 라이트(Wright)와 풀러(Fuller)의 ‘The Book of the Acts of God’이 있다. 통일성을 획득하기 위한 몇몇 방법론들에 대한 공통된 거부가 있었다. 예전의 우의적 방법(allegorical method)은 타당치 않은 것이기 때문에 기피하였고, 유형론(typology)도 거부되었지만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성서의 통일성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가장 흔히 상용된 표제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이었다. 이 접근 방식은 성서 신학자들로 하여금 그 선구자들의 자세한 분석적 연구를 확증함과 동시에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하게 해주었던 것으로 보였다. 일단 통일성이 다양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 인식되자 다양한 성서 신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관계성이 설명되는 방식은 서로 엄청나게 달랐다. 로우리는 특히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 하나는 통일성을 단지 하나님의 역할을 배제한 인간의 종교적 발전으로 보려는 극단, 다른 하나는 인간의 개성의 위치를 최소화시키는 계시의 역사를 보려는 극단. 그가 나름대로 제시한 정식은 “인간의 개성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역사를 배경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통일성”이라는 것이었다.74)
제임스 뮐렌버그(James Muilenburg)는 ‘Biblical Authority for Today’에서 성경의 통일성에 관한 세 가지 범주들을 묘사하였다. ― 하나님의 목적의 통일성, 언약 관계,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성.75) 차일즈는 뮐렌버그가 아이히로트의 언약의 강조를 받아들였지만 폰 라드의 입장에 더 가까운 계시의 지속적인 연속성을 통한 약속으로부터 성취에로의 종말론적 움직임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수정하였다고 해석하였다.76) 베이커(D. L. Baker)는 성서의 통일성이란, 두 성서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구분도 초월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통일성은 히브리 성서와 그리스도교 성서를 하나로 묶어 주는 구원사의 측면에서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구약의 역사는 그리스도 사건을 위한 예비가 되는 것이다.77)
2) 독특한 성서적 사고방식: 히브리적 사고 방식 - 성경은 신앙 문제들에 대한 “독특한” 접근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성서적 관점의 독특한 재발견을 그 접근방식이 합리주의적이고 추상적이고 단편적이라 하여 비판을 받았던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양편에 대항하여 변증적으로 사용되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입장 - 신구약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행해지지 않았다 - 은 성경의 입장에 서서 우리 자신을 성경의 세계 내부에 놓은 다음 성경을 그 자체의 범주들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성서 신학 운동의 아주 초기에 독특한 성경적 관점은 헬라적 사고 양식은 추상적이고 합리주의적이고 이론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헬라”라는 용어는 성경의 이해를 가리고 있었던 그릇된 관점을 압축한 것이었다. 히브리 사고는 구체적이며 역동적이고 특별하다.
물론 히브리적 사고방식은 신약에서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구약 모두의 근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신구약 사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저작자들에게 헬라와 히브리 사이의 이러한 이분법은 단순히 간략하게 독특한 관점에 대한 요구를 의미하였고 가치 판단을 쉽게 하는 방식을 제공하여 주었을 따름이다.78) “히브리적 사고”의 가치와 정당성에 대한 강조는,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쓰여졌으나 그 저자들은 히브리 사람이므로, 고대 헬라어가 보통 헬라어의 의미보다는 히브리적 의미로 쓰여질 때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넓은 의미에서 히브리적 정신력과 심리는 고대인들의 특색과 유사한 점이 많으므로,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적이며 20세기적인 가죽을 벗고 과거의 느낌과 사고 구조에 자신을 부합시켜야 한다고 보았다.”79)
어떤 사람들에게는 독특한 관점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헬라와 히브리의 대비는 서로 다른 사고 과정이 작용하였다는 것을 시사해주었다. 독특한 사고 범주들로 인하여 생겨난 현실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었다. 역으로 이러한 범주들은 현실 자체와의 진정한 만남을 통하여 그 형태가 이루어졌다. 브르너는 어의상의 구별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언어적인 증거를 이용하기조차 하였다. “성경의 언어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어 형태는 헬라어에서처럼 명사가 아니라 행위의 단어인 동사이다. 성경의 사고는 명사적이고 중립적이고 추상적이 아니라 동사적이고 역사적이며 인격적이다.” 그래서 단어 연구 방법론은 성경적 사고방식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가장 직접적인 길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새로운 신적언어’80)를 말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평범한 단어들이 초월적 의미의 무거운 하중을 실지 않으면 안되는 난점을 극복한 것으로 특히 인식된 어의신학에 관하여 말하였다. 키텔의 “신학사전”을 번역하는 엄청난 작업이 성서 신학 운동의 절정기에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81)
심지어 켈시(Kelsey)는 헬라 어휘도 그리스도교 문헌에 사용되었을 때에는 히브리적 내용을 담는다고 보기 때문에, 그 헬라어 어휘는 헬라의 ‘개념’이 아닌 히브리 개념을 반영한다고 보았다.82)
3) 구약성서 혹은 구약 신앙의 독특한 환경 - 성서 신학 운동의 특징은 성경의 배경을 연구하는데 커다란 관심을 쏟은 것이다. 성경과 그 환경의 관계와 관련된 성경신학 운동에 의해 발전된 명제는 다음과 같다. - 성경은 그 형식과 내용의 견지에서 모두 환경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 공통적인 근동의 배경에 대한 연구와 동떨어져서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을 빌어 썼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환경과는 완전히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이 공통적인 요소들을 사용하였다. 올브라이트(Albright)는 “우리가 이 모든 유사성들, 차용, 혼합주의를 주목하였을 때에조차도 이스라엘의 문헌과 가나안의 문헌 사이의 차이들은 보통 ‘독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구약 내에서의 이러한 요소들을 열거하였다. 유일신론, 하나님의 성상을 갖지 않는 것, 비신화적, 역사적인 것.”83)
죠지 어네스트 라이트(George Ernest Wright)의 저서 ‘The Old Testament Against Its Environment’에서 성서 신앙의 독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성서신앙의 중심적 요소는 너무나도 독특한 것이기에, 이방 세계의 자연적 진화 과정을 통해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다. …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 초기 단계에서도 주변 다신교와는 전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진화론이나 환경적인 발전 범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84)
이스라엘 신앙과 종교의 특이성에 대한 주장에 큰 영향을 끼친 영어권의 저서는 프랑크포트(H. A. Frankfort)가 편집한 ‘The Intellectual Adventure of Ancient Man’이다. 이 책의 편집가들은 카우프만의 생각과 비슷하게, 고대 근동의 생각이 신화로 특징지어진다고 보았다. 신화를 창출하는 생각은 신과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비분석적이며, 통전적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신들은 우주 현상과 자연 현상의 인격화이며, 구현화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종교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메소포타미아인들도 태양이 공의를 보장하는 샤마쉬 신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과 예언자들의 하나님은 자연 안에 계시지 않는다. 그 분은 자연 그리고 신화적 사고 영역을 초월하신다. 히브리인들은 희랍인들 못지 않게,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사고의 틀을 깨뜨린 것이다.85)
4)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 역사 속에서의 계시에 대한 강조는 이전 시대에서 성서학을 괴롭혔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듯이 보였다. 그 것은 현대의 비평 학자들에게 하나님의 활동과 관련된 객관적인 사건들을 회복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강조는 성경을 인간 발전의 역사로 봄으로써 상실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것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계시의 개념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관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를 들여오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은 “영감과 계시”를 중심으로 한 신학적 둥지 주변에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으로서의 계시에 대한 강조는 그 내용성을 하나님과 관련된 교리적이고 명제적인 정식들로부터 만남으로 이동시켰고 만남의 정확한 내용성은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추론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차일즈는 역사를 강조함으로서 다음의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 한다.86) 첫째는 문학 비평과 관련이 있는 성경의 파편화가 극복되었다. 모든 자료들과 편집들 배후에는 구약과 신약을 결합하는 하나의 지속적인 흐름이 있었다. 둘째로 계시의 수단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간격을 잇는 쉬운 수단을 제고하여 주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 더나가서는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셋째로 역사에 대한 강조는 미국인들이 언제나 출중한 분야였던 과학적인 고고학 작업을 수행하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여 주었다. 흔히 사용되는 역사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라는 어구는 유적 발굴 작업을 성서신학을 수행하는 또 하나의 측면으로서 정당화하였다.
역사와 계시의 관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87) 헤이즈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역사 안에서의 계시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이해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보수주의 사고 체계는 하나님이 가정이나 선언문 안에 계시되어 있고, 성서가 그러한 가정이나 선언문을 싣고 있는 책으로 보았다. 반면, 진보적 해석자들은 계시를 인간의 영적 이해에 대한 점진적 발전의 산물로 보았다.
그런데 역사를 통한 계시를 강조하는 것은, 계시가 이념이나 가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인간적인 것과 역사적인 과정 밖에서 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개입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인간들을 활용한다. 성서 그 자체는 실상 이러한 계시의 기록인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성서를 역사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성서와 계시 사이의 가까운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성서 또는 성서의 말들이 곧 계시라는 점은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계시의 객관적, 주관적 측면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접근법은 성서의 역사 비평을 시인하며 성서를 진지하게 다루지만, 동시에 성서 무오설의 주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입장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중간 노선을 택하는 것이다.
다음은 역사와 역사 안에서의 계시에 대한 강조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입증을 시도하려는 노력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보다는 미국학계에서 현저하게 드러났다. 고고학적인 자료가 성서 기록의 역사성이나 또는 본문 배후에 가정된 사건의 역사성을 입증하려는 욕구에 부응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서 신학 시기에 새롭다는 것은 고고학적 관심과 신학적 관심이 서로 가까워진 것이며, 또 고고학적인 자료를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성서의 묘사로 보충하고 지지하는 것으로 보게 되어, 하나님은 역사적 사건 안에서 활동하시고 계시하신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게 된 것이다. 바르는 역사 안에서 계시에 대한 강조를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통한 계시는 희랍인과 성서 밖의 세계에게 알려져 있지 않던 사상으로 히브리사상의 특징이었다고 생각되며 성경전체에 공통된 사상이었다. 또 그것은 성경의 내적 통일성의 기초이며 철학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던 사상으로 교의학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는 것이다.”88)
이러한 배경에서 구속사 학파(Heilsgeschichtliche Schule)의 입장을 따르는 학자가 나왔다. 차일즈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오토 피퍼(Otto Piper)이다. 오토 피퍼는 “인류의 역사적 삶 내에는 지속되어서 우리와 합류하는 ‘거룩한 역사’의 특별한 과정이 존재한다”고 말하였다.89) 이 특별한 역사는 교회를 모든 역사를 구성하는 중심부로 변화시키는 “언제나 오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기록이다. 이 “거룩한 역사”가 세상에 의해 식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이 세대의 눈멀음을 말하고 있는 신약의 증언을 확증해줄 뿐이다.
존 메케이(John Mackay)도 ‘Theology Today’라는 잡지의 최초 사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자유주의든 보수주의든 성경 학자들이 성경은 … 구속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중심적 범주의 견지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만 했다면 아주 많은 신학적 혼란과 처절한 논쟁은 피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90) 구속사는 외적인 역사와 내적인 역사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성경을 이 내적 역사의 측면에서 그 중심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5) 통전적인 성서 연구 - 성서 신학 운동 이전의 성경 연구 방법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근본주의자들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의 방법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을 가져왔다. 자유주의자들은 문학적, 어원학적, 역사적 문제들의 세목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 결과 성경은 절망적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복음의 본질적인 통일성은 왜곡되고 잊혀져 버렸다.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사소한 것을 추구하는 비극적인 과정 속에서 심원한 신학적 차원들이 간과되는 지적 훈련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서 신학 운동은 성경 전체를 흐르는 맥을 잡아서 나무 하나 하나를 보기 보다는 숲 전체를 볼 수 있도록 성경을 통전적으로 훑어 보는 것이다. 이는 바로 영어로 Overview로 표현하였다.91)
6) 다음의 세 가지는 제임스 바르가 성서 신학 운동의 특징에 대하여 위의 내용 외의 것을 종합한 것이다. - a 철학 및 철학적 신학의 영향에 대한 반대. 성서의 사고는 끊임없이 철학적 사고방식들과 대조된다. b 교의신학의 조직화 경향으로 이해되던 것에 대한 반대. 성서의 사상은 하나의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c 성서연구와 신학적 관심의 상호침투. 성서학자의 작업이 신학적 의식에 의해 그 모든 연구 단계에 알려져야 하듯이 신학의 작업 또한 성서적 의식에 의해 알려져야92) 한다. 이 성서적 - 신학적 관심은 교회의 삶에 대해 실존적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설교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히 표명되어야 한다.
VI. 결론
베델성서연구가 1959년 미국에서 시작하여 교회에서 장년들이 성경을 연구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 1970년대 초 한국 베델성서연구 위원회가 조직되어 이 프로그램을 한국에서 실시할 준비를 하고 1974년 교사 강습회를 첫 회를 연 이래 한국 교회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지금까지 등록된 회원 수가 30만 명이 넘었고 교사 강습회에 등록하여 교사 자격을 받은 목회자도 5천명이 넘었다.
베델성서연구가 한국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이 베델성서연구에 대한 많은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연구에 참여한 이들은 성서학자, 기독교 교육학자, 목회자, 신학대학원생 등으로 신학과 교회에 전문적인 분들이다. 이 논문들을 통해서 베델성서연구에 대하여 긍정적인 것 혹은 부정적인 면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논문을 쓴 저자마다 교파나 신학적인 독특한 입장이 있기 때문에 그 평가에 대하여 본 글에서는 논쟁을 피하였다. 그래도 베델성서연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취급한 점에 주목할 일이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하여 혹시 한국에서 논문을 발표한 분들이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여 다른 내용을 언급한 것은 바로 잡힐 것으로 기대한다.
본 글의 초점은 “베델성서연구가 저술 될 때 어떠한 영향받고 어떤 신학적인 흐름 가운데 있었는가?”이다. 베델성서연구 저자가 대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이 베델성서연구를 저술한 때가 1950년 중반부터 말까지임을 우리는 확인하였다. 이 시기는 바로 전세계와 미국에서 성서 신학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꽃이 피든 때였다. 시기적으로 성서 신학 운동과 베델 성서연구의 저술 시기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통해서 성서 신학 운동의 시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칼 바르트의 신 정통주의가 시작된 이후 그 영향으로 시작되었으며 미국 내에서 만의 운동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서 신학 운동은 자유주의적인 성경 해석이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근본주의적인 성경해석이 문자주의에 빠져서 성경의 메시지를 단편적으로 만 전달한 것을 극복하여 교회가 성경에서 메시지를 통전적으로 받아서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받도록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베델성서연구를 대상으로 하여 한국에서 연구한 이들이 언급한 신학적이고 성서 해석학적인 내용들이, 그 분들은 성서 신학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성서 신학 운동에 참여한 성서 신학자들이 주장한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베델성서연구는 성서 신학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감히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은 베델성서연구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성서 신학 운동이 신학자들과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들이 신학의 다른 분야보다도 성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흐름에 따른 성서적인 메시지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베델성서 운동이 한 교파의 신학을 담은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서 신학 운동이 신구교를 초월하여 일어났었고 특히 미국에서는 장로교 배경을 둔 학자들이 주도한 이후 개신교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일어났던 맥락을 따라서 초교파적인 성격을 가지고 성경을 취급한 것이다.
그렇다고 성서 신학 운동이 완전한 성서 해석 방법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서 연구의 역사에 있어서 한 기간의 중요한 해석 방법이라는 것이며 그러한 운동 이후 그 운동이 자극이 되어 새로운 방법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다루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며93) 이 성서 신학 운동의 한계를 지적한 책은 차일즈의 “성서 신학의 위기”라는 책에서 다루고 게하르드 하젤의 책 “구약신학 : 현대 논쟁의 기본 이슈들”에도 게재되어 있다.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