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리근(連理根)과 단다(單多)
일식이 있던 시간에 등산을 하다가 우연히 위 그림의 나무들을 보았다. 두 나무의 뿌리가 붙어 있다. 연리근(連理根)이라고 한단다. 해발 약 300미터의 높이의 부산지역 장지산 등산로 기슭에 있다. 이 두 나무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개념은 기독교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이해에 중요하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이다. 신성과 인성은 모두 완전하며(각각 100 퍼센트), 이 둘은 나누어지지 않고 분활되지 않고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이러하다. The divinity and humanity of Jesus Christ is not divided, not separated, not mixed, not changed. 이를 4대 부정문이라고 한다. 이 신학공식은 박해받던 교회가 신앙의 자유 시대를 맞이하여 오랫 동안 기독론 논의를 해 오다가 칼케돈공의회(451)에서 확정된 진리이다.
기독교 세계에는 아직도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으며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내재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다. 주로 시라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집트 지역에 자리를 잡은 오랜 역사를 가진 단성론자들이다. 반면, 예수를 다만 인간이라고 믿어온 종교인들이 있다. 세르베투스주의, 소시니우스주의, 뉴잉글랜드의 고풍스런 이단 유니타리안교회(Unitarian Universalist Church), 종교다원주의자들, 예수 세미나 신학자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은 삼위일체라는 존재양식을 가진 분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각의 위(person)를 가진 완전한 독립적인 분이면도 동시에 유일한 하나님이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이다. 이를 신학 용어로 단다(單多, one and many)라고 한다.
정통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성경과 논리와 응전의 열매이다. 지중해 연안에 퍼져 있던 플라톤주의 이원론 사고 패러다임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이단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을 거부하고 이를 부단히 공격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보호하고 주권적인 섭리와 인도로 신의 존재 양식에 대한 기독교의 핵심 진리들을 천명하고 고백하게 했다.
어찌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인 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유한한 인간의 두뇌와 이성으로는 이해불가능한 진리이다. 만약 하나님의 존재가 사람의 두뇌에서 이성적으로 완전히 이해된다면 그 신은 숭앙과 예배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다. 논리의 실험관 속에서 분석되고 간파되는 존재는 인간을 넘어서는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완전히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위대한 존재이다.
합리성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신탁(神託)과 계시(啓示)를 통해 드러난 신적(divine)인 진리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입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는 독단(dogma)과 케리그마(kergma: 선포)이다. 예컨대 삼위일체(三位一體), 신애세인(神愛世人), 도성인신(道成人身), 사자부활(死者復活), 대속구원(代贖救援) 같은 것들이다.
특별계시를 통해 주어진 신적인 진리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해를 초월한다. 일상적 경험에서 추론할 수 없는 교리이며, 검증도 불가능하다. 이것에 대해 인간이 옳고 그르다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다.
세상에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검증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인간의 합리성은 육의 세계, 물질의 세계, 인과응보의 세계 안에서 형성된 것이다. 인간 이성은 제한적이다. 지식이란 뷔페식당에서 이것저것을 자기 입맛에 따라 가져다가 한 쟁반에 채우는 것과 같이 자기의 기호에 따라 채워진다. 그 지식을 따라 판단을 내리는 이성은 최후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가 전적으로 신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에 대한 논리적 추론을 거부하는 것도 오류이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논의는 비록 그것이 계시된 것, 신앙의 영역, 영원한 세계를 다룰지라도 논의 자체는 인간의 활동이다. 이성적 작업은 일련의 지적, 합리적, 이성적 체계를 필요로 한다. 종교적 명제를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 단지 독단이나 송영(doxology)으로 처리해 버리는 것은 이성적 작업 곧 학문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 복판에 그려진 음양 모양은 단다의 개념을 쬐끔 반영한다. 음과 양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둘이면서 하나를 구성하고 있다. 음과 양은 구분되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이 개념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남편과 아내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군주와 신하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부모와 자식은 각각 다르면서도 하나이다.
반면, 플라톤주의 이원론 사상에 깊이 물든 유럽인은 음과 양, 남편과 아내,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을 서로 다른 객체로 여기며, 완전히 다른 두 가지가 변증법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불교의 경전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단다와 비슷한 개념의 문구가 있다.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란 게 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텅빈 것은 가득 참이고, 가득 참은 텅 빈 것이다(emptiness is fullness, fullness is emptiness)로 번역될 수 있다. 물질적인 세계와 평등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한다.
이 글의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기술되어 있다.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전개한다. 그래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일의(一義)로 관조할 것을 강조한다. 색과 공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색이 변괴(變壞)되어서 공을 이루는 현상적인 고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방법이다. 불자들에게 이 개념이 완전히 이해되는지 의문이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 태양계와 우주를 창조한 분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유일한 참 신 하나님은 '단다'의 양식으로 존재한다. 다수이면서 동시에 단수로 계신다. 각 위는 속성의 교류, 본질의 교류를 가지는 동일본질이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지상의 어느 것에 비교할 수 없다. 유비(analogy) 가능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 하나님께서 영원한 신적 진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계시해 주셨기에, 기독교는 그것을 근거로 신의 존재와 존재 양식을 알고 그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들의 모음집이다. 성경은 인간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다. 그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구원자, 그리스도)이며, 그 분을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union)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이다.
위 사진의 연리근은 같은 종의 두 나무를 연합, 결합시킨다. 위 나무들은 단다(單多, one and many)의 존재양식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소나무는 독립적인 개체이면서 하나로 연합, 결합되어 있다. 자양분을 나누고, 하나로 완전히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만히 추론해 보면 좌측 소나무 뿌리가 우측 소나무의 가랑이 사이로 뻗어 자라고 오랜 세월동안 각자 확대 팽창하면서 겹쳐졌으며, 실제로 서로 수액과 자양분을 주고 받는 하나의 나무로 결합된 것 같다.
영생의 진리를 알고 싶거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싶은 구도자는 아래의 이메일 주소로 연락하면 글쓴이와 연결될 수 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약속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5:31). 인간은 구원자 예수를 거쳐 비로소 창조주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 죄 사함을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창조자 하나님은 예수를 인류 구원의 통로로 마련한 사랑과 공의의 신이다. 그분의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여호와(야웨라고도 부름) 하나님이다.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잠 1:7)고 말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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