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George Floyd protests" in Wikip미국 dia
미국 폭동: 조지 플로이드 신드롬
미국 폭동, 조지 플로이드 신드롬(George Floyd Syndrome)은 2020년 5월 말에 시작하여 6월 초 현재까지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파괴적인 저항운동이다. 위조 지폐 사용자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고에 대한 항의시위이다. 미국의 대도시 전역에서 미움과 증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약탈, 방화, 절도, 파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George Perry Floyd) 사망 사건은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파우더호른에서 발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플로이드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에서 질식사당한 사건이다.
미니애폴리스 경찰 소속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이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쇼빈은 8분 46초간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압박했고 플로이드는 이 중 2분 53초 동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경찰이 무릎으로 목을 찍어 누를 당시 플로이드는 수갑을 찬 채 땅 위에 엎드려 제압당한 상태였다.
출동한 경관들은 플로이드가 의식불명이며 심장 정지 상태였음을 인지했음에도 무력행사를 멈추지 않았다. 목격자 행인들이 이 사건을 스마트폰으로 영상 녹화했다.
사건 다음 날 직접 플로이드에게 무력을 행사한 데릭 쇼빈과 함께 출동해 플로이드를 붙잡은 토마스 레인, 알렉산더 쿤 그리고 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본 투 타오 총 4명은 해임됐다.
이 사건은 플로이드가 위조지폐를 사용하자 체포되면서 발생했다. 플로이드가 방문한 식당의 직원이 그가 지불한 20달러를 위조지폐로 의심하여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은 성명을 통해 위조지폐 사용한 용의자 플로이드가 자신의 승용차에서 내리라는 경찰의 요구에 따랐지만 신체적인 저항을 한 탓으로 수갑을 채웠다고 했다. 그러나 근처 CCTV는 경찰이 그를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제압당할 때까지 물리적인 저항이 없는 모습을 담고 있다.
플로이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살려 달라"고 반복적으로 말했고, 행인들이 경관에게 플로이드가 숨을 쉬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은 플로이드가 의식을 잃은 뒤에도 계속 무릎으로 그의 목을 짓눌러 호흡을 방해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했다. 행인들은 이 과정을 전화기 동영상으로 녹화하여 인터넷 채널에 올렸다. 이 영상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대한 시위는 5월 26일 오후부터 미니애폴리스에서 처음으로 발생했다. 경찰과 시위대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미니애폴리스는 주방위군을 배치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씨는 무력을 행사한 시위대를 건달이라고 지칭하며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이 시작될 것"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의 시작”이라는 발언은 1967년 흑인 시위에 대한 폭력적 보복을 공언한 윌터 헤들리 당시 마이애미 경찰국장이 만든 문구이다. 시위대 진압을 위해 주방위군을 배치하고, 시위대에게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한 트럼프의 대처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이기업 목사는 “조지 플로이드 신드롬”이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게시(2020.06.06)했다. 아래의 글은 미움과 중오가 갖는 무게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기업 목사는 칼리포니아 어바인 소재 글로리아커뮤니티교회의 목사이다(홈페이지 주소: gloriacc.org).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나의 잠재의식, 우리 공동체, 지역, 사회 전반에 만연된 미움과 증오의 뿌리를 엑스레이 사진을 보듯이 돌아보게 한다. '미움과 증오'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 때문에 내 안에는 이런 감정을 키우지 않으며, 내 삶의 행태도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미움과 증오의 반대 어휘는 '사랑'이라는 것을 누가 모를까 만, 나에게 그 사랑이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다고 진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사랑 결핍이 미움과 증오가 된다. 사랑 결핍은 두 가지 얼굴빛을 띄게 만든다. 하나는 '무관심'이라는 내면적 얼굴이며, 또 다른 하나는 '차별'이라는 외형적 얼굴이다. 무관심은 사랑이 결핍된 소극적 얼굴이라면, 차별은 사랑이 결핍된 능동적 얼굴이다.
내 안에 '무관심'이라는 소극적 얼굴을 품고 있음에도, 나는 어떤 죄 의식도 없고 사회적 정의 파손에 대한 일말의 의식도 가지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떠한 도덕 의식과 정의어린 양심의 소리 앞에서도 ‘가벼운 회개’ 정도의 ‘약빨’이면 충분하다고 무시해 버린다. 심지어 이러한 무관심이라는 내면적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것은 그다지 문제가 없는 듯 여기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듯 쉽게 치부해 버리며, 스스로 자위한다.
이것은 마치 내가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만 하면 '무관심'이라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반면 '차별'이라는 능동적 얼굴은 종종 폭행과 살인과 폭동, 심지어는 전쟁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차별은 종류가 다양하다. 지역적 차별, 직업적 차별, 인종적 차별, 남녀 차별, 외모의 차별, 정치적 차별, 종교적 차별 등 천차만별의 차별들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자기가 소속된 지역, 직업, 인종, 성, 종교에 대한 긍지와 자랑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넘어서 나와 유사한 소속적 긍지를 가지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는 것이 차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조지 플로이드 신드롬"이다.
타인과 타 문화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히 나의 성향이나 ‘기호 음식’ 정도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인과 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문화에 속한 그 사람을 이해하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문화적(cross-cultural) 인간 이해가 요청된다. 이러한 이해가 없는 것이 곧 무관심이다. 이 무관심이 차별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쓰나미를 일으킨다.
결국 초문화적 사랑의 존재로 오신 성육한 그리스도로 돌아가는 길이 유일한 열쇠인 것 같다. 영광의 처소를 떠나시고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죄악의 문화 안으로 사람의 형상으로 오신 것을 믿고 닮는 것이, 내 안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자리 잡은 무관심과 차별을 치유할 것이라 의심하지 않는다.
아, 숨이 막힌다! (Ah, I can't breathe!). '무관심'이라는 왼쪽 무릎과 '차별'이라는 오른쪽 무릎이 나의 목을 눌러 나로 하여금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구나! 이것이 조지 플로이드 신드롬이다. (The left knee of ‘indifference’ and the right knee of ‘discrimination’ are on society's neck and it can't breathe! This is Georgy Floyd Synd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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