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르크대학교 교정의 불트만 상
불트만의 신학적 해석학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17
1. 불트만의 해석학의 초점
루돌프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은 독일 고백교회 구성원이었으며,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한 루터파 교회 신자이다. 마르부르크대학교의 신약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방법을 사용하여 성경의 비신화화를 시도한 신학자이다. 양식비평 이론을 성경해석에 적용하여 역사적 예수 연구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이정표를 제시했다.
불트만의 해석학의 초점을 성경해석의 순전히 내용적 곧 신학적인 측면에 제한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점의 성격을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해의 조건들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고 따라서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논의에 뛰어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불트만의 성찰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전통에 서 있다. 이들 두 신학자들은 신학적 해석학을 개선하려고 철학적 해석학에 참여했다. 불트만의 접근방법과 실존주의적 해석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초기 작품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 불트만의 해석학적 강령과 진정한 기독교적 실존에 대한 그의 탐구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이데거로부터 실존주의적인 탐구에 대한 통찰을 도입했고, 자신의 실존주의적 수사학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이것은 불트만의 사상이 단순히 하이데거의 철학을 신학에 적용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 같은 편협한 생각으로는 하나의 신학을 발전시키려는 불트만의 중요한 시도를 공정하게 다룰 수 없다. 그의 신학은 텍스트 해석과 세상 해석에 등장하는 여타의 방법들과의 비평적인 대화, 그리고 텍스트 자료와 자신의 전통에 대한 비평적 해석 모두에 관련되어 있다.
“비신화화”라는 그의 독특한 강령 때문에 불트만의 해석학적 통찰을 통째로 폄하, 비난함은 타당하지 않다. 불트만의 해석학은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하고 더욱 발전시켜야 할 중요한 통찰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비신화화하는 그의 신학적 강령 속에 있는 부적합한 것들은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심각한 주장이다.
불트만은 교수와 저술가 사역 경력 전반에 걸쳐 해석학적인 쟁점들을 거론했다. 친구 칼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역사주의(실증주의)적 주석에 만족하지 않았다. 기독교 전통의 어느 단계에서 무엇이 말해졌는가를 찾아내는 대신 그 같은 텍스트가 자기 자신의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자 했다.
불트만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역사를 우리에 대한 그것의 주장,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는 주장을 깨닫는 방식으로 직면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역사주의적 주석이라는 객관주의자들의 환상을 거절하는 데 일치했으나 그 이후로 결별했고, 성경해석에 대한 각각 전혀 다른 접근방법들을 발전시켰다.
바르트가 해석자가 닫혀 진 신학적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옹호한 반면, 불트만은 현대 성경해석자의 복잡한 상황을 인식했다. 특히 “해석학의 문제”(1950)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현대인들이 성경 본문을 직면할 때 부딪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조직적으로 밝혔다.
여기서 불트만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를 언급하고 칭송했다. 이들이 텍스트의 형식적인 구성에 대한 단순한 분석만으로는 텍스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은 해석자가 텍스트를 자기 자신과 연관시켜 파악하는 주관적인 활동이 필연적인 것을 알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해석의 이 측면을 “예감”(divination) 이라고 불렀고, 딜타이는 인간 삶의 공동 경험 곧 어떤 특별한 표현이 이해될 수 있는 토대로 보았다. 슐라이에르마허의 목표는 텍스트 뒤에 감추어진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딜타이의 목표는 다양한 형식 속에서 삶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목표를 발전시키면서 이 두 사상가는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관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 선이해: 독해의 실존적 공리
불트만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가 채용한 두 가지 관점 외에도 수많은 해석 관점이 존재할 수 있으며, 각각의 해석행위는 그러한 특정 해석관점 하나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텍스트에 대한 특별한 질문이 없이는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한 어떤 초점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해석은 항상 텍스트 속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상이한 주관적 문제들에 관련된 삶을 전제로 한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해석도, 특정 선이해에 의해 가동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이를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석은 전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석가는 백지상태(tabula rasa)에서가 아니라 특정 질문을 갖고 텍스트에 접근하거나 또는 질문을 제기하는 특정 방식으로 접근하며, 텍스트와 관련된 주제 내용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접근한다.”
‘객관적,’ ‘전망,’ ‘전제,’ 그리고 ‘선이해’ - 이것들 각각의 개념들은 모든 해석자들이 항상 이미 어떤 해석학적 순환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해석학적 순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선이해와 그것을 통한 텍스트의 주제-내용을 이해하는 순환, 그리고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그리고 역으로 전체를 통해 부분을 이해하는 순환이다.
불트만의 해석학은 특히 위 첫 번째 측면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해석자의 독해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많은 이해관계의 목록들 곧 심리적, 미적, 역사적 동기 등을 만들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결국, 해석의 목표(objective)는 삶의 영역(sphere)인 역사에 대한 관심에 의해 정해질 수 있다. 이 영역 안에서 인간의 실존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을 획득하고 발전시키며, 그 안에서 이 가능성들을 성찰함으로써 각자는 자신과 자신의 가능성들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 이러한 질문 제기에 자신을 거의 진력(盡力)하는 것은 철학, 종교, 문학의 텍스트들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텍스트(일반적인 역사 포함)은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불트만이 공리로 간주한 독해의 실존적 개념은 반(反)역사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아직도 자주 그렇다고 주장되고 있지만), 인간의 역사성의 본질에 대한 바로 그 통찰로부터 나왔다. 불트만은 반복해서 이 점을 강조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갖고 살아있는 역사에 접근한다면 역사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불트만은 “역사적 지식은 동시에 우리 자신들에 관한 지식이다”라는 말에도 염증을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깨트리려고 한 것은 어떤 역사가들(성경사가들)이 가진 객관주의라는 자만이지 신학자의 역사적인 임무가 아니다. 오히려 신학자는 역사적 사고의 의미를 충분히 각성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학의 강령을 성경분문과 그것의 주제-내용에 대한 하나의 강요(强要)로 보았다. 그러나 불트만은 슐라이에르마허처럼 “성경 본문의 해석은 다른 어떤 문학 텍스트의 적용과는 다른 이해의 조건들에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모든 철학적인 엄격함과 형식적 분석의 도구들을 갖고 성경에 접근해야 하지만, 성경의 주제-내용에 대한 비평적으로 검증된 선이해를 갖고도 접근할 필요가 있다.
불트만은 바르트에 반대하여 심지어 우리 인간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깨달음조차 어떤 형태로든지 선이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같은 선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인 지식에 의해 일깨워 진다.
“‘행복,’ ‘구원,’ 또는 세계와 역사의 의미에 대한 질문 속에는, 이 질문이 우리 자신의 실존의 진정성에 관한 것인 한, 인간의 실존 안에서 현존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지식은 존재한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해석된 지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의 이 과정을 성찰하는 신학자는 그의 해석에 사용되는 개념적인 틀에 대해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트만의 틀은 실존에 대한 실존주의적 이해였다. 그는 바르트에게 바르트가 갖고 있는 개념성(conceptuality)의 원천과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라고 요청했다.
3. 전제 없는 주석은 가능한가?
불트만은 “전제 없는 주석은 가능한가?”라는 후기 논문에서 자기의 해석학적 강령을 다섯 가지로 공식화했다. (1) 성경 본문 주석은 선입견(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트만은 앞서 ‘선입견’과 ‘전제’를 대조시켜 선입견은 텍스트에 대한 의도적이며 교리적인 강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2) 그러나 주석은 전제 없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해석으로서의 그것은 역사-비평적인 연구방법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3) 주석가, 성경 본문, 그리고 선이해 사이에는 생(生)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4) 이 선이해는 닫혀 진 것이 아니라, 변형을 향하여 열려 있다. (5) 텍스트의 이해는 결코 일정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의 의미는 항상 새롭게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불트만의 해석이론은 바르트의 해석학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역사주의적 접근만이 아니라 성경주석과 조직신학 사이의 균열에도 도전했다. 그러나 바르트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의 해석학은 슐라이에르마허가 100년 전에 시작한 철학적 해석학 운동과 신학을 재결합시켰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가 텍스트의 원래 의미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해석학의 조명 아래에서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을 발전시키면서 해석학의 목표를 성경 텍스트의 주제-내용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불트만의 해석학에서 우리는 슐라이에르마허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모든 철학적 해석학의 열매들을 볼 수 있는 반면, 바르트의 해석학에서 우리는 모든 텍스트 해석자들이 직면하는 해석학적 조건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신학적 작업을 보다 더 온전하게 수행하려는 노력을 회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트만의 해석이론에 대한 바르트의 부정적인 판결은 환영할 만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불트만의 해석학적 성찰에 문제점이나 모순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히 신약성경의 텍스트를 비신화화하려는 그의 사고가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하다.
4. 비신화화 강령
불트만의 첫 작품 「신약과 신화」(New Testament and Mythology, 1941)을 포함한 수많은 논문과 책들을 통해 불트만은 신약성경에 대한 비신화화 이론을 제시했다. 열광적 환영과 혹독한 비판의 소용돌이와 지적 전쟁을 함께 몰고 왔다. 사실상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논쟁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불트만의 해석학적 강령의 많은 부분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지만 그의 해석학적 성찰의 주요 관심들은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모든 논쟁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방법은 그의 해석학적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불트만은 해석학적 조건들 곧 개념성, 선이해, 배후의 세계관 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해석학적 노력들을 비판했다. 그의 비신화화 방법은 특히 현대의 지평 또는 세계관과 관련해 자신의 특별한 해석학적 조건들을 명확히 하려는 그의 노력을 잘 보여 주었다.
불트만은 이 세계관을 거쳐 신약성경의 텍스트에 접근했다. 기독교의 기원에도 영향을 미쳤던,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말하는 고대의 신화적 방식은 세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우리의 방식으로 쉽게 전환될 수 없다. 그것은 비평적인 전환(translation) 곧 비평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화적 개념들 이면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는 신약의 이 해석방법을 나는 비신화화라고 부른다. 만족스런 용어는 아니지만. 이것의 목적은 신화적인 진술들을 제거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해석하려는 데 있다. 이것은 해석학의 한 방법이다.”
이처럼 불트만은 우리가 접하는 신약성경의 이른바 신화적 언어로 되었다는 부분을 제거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신학적 해석자들의 편에서 볼 때 이 ‘신화들’이 특별한 해석학적 노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종교적 상상은 성경 본문 속의 이 같은 신화적 구절들에 쉽게 관계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조직신학적인 성찰은 무엇보다도 이 텍스트들을 읽는 일에 근본적으로 다른 두 세계관이 서로 상충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상충은 신화들이 고대 세계관 모델 속에서는 어떤 기능을 지녔고, 텍스트의 문맥 속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의 현대세계와 종교적인 탐구의 상황 속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도록 만들었다.
신학적 해석학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검토는 불트만이 성경 텍스트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을 신중하게 다루려고 노력했고, 따라서 16세기 이후에 출현한 해석학적 도전에 대해 건설적으로 반응한 첫 번째 신학적 해석학자들 그룹에 포함됨을 알게 되었다. 불트만 특유의 해석학적 제안들과 신화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에 어떤 비판이 필요하던 간에 그의 공헌은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서 성경 본문을 해석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 현대 해석학자들의 해석학적 조건들을 분명히 인식했다는 데 있다.
불트만은 과학적 세계관이 모두 옳다거나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신학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현대 세계관으로 전환해야 할 의무와 이러한 전환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옹호했다. “비신화화 한다는 것은 성경과 교회의 메시지가 시대에 뒤떨어진 고대의 세계관에 얽매이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기독교인들을 그들의 지성적 통합성을 희생시키려는 노력 곧 현대적 세계관을 옛 세계관으로 바꾸고 2세기 기독교인들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방식대로 생각하게 하는 괴기한 노력에서 해방시켰다. 어거스틴과 슐라이에르마허와 마찬가지로 성경과 성경의 의미를 철저히 구분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믿는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의 타자성과 불가해성을 확실히 인정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논의들이 갖는 조건적인 성격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조건적이지 않은 논의를 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들은 어떤 세계관도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트만은 이 점을 강조하려고 비신화화의 태도가 이미 신약성경 본문에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바울과 요한이 결단의 시간으로서의 ‘지금’을 가리키면서 유대교적인 종말론적 소망을 재해석했다는 것을 실례로 들었다.
이 같은 개념들과 구분들은 불트만에게 성경 본문 속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언어들을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하나님의 나라,” “성령으로의 잉태,” “동정녀 탄생” 등과 같은 성경의 이미지들은 신화적이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 표현들이 성경 본문을 읽는 현대의 독자를 위한 설명과 전환을 필요로 하는 방식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바르트와 다른 신학자들은 불트만이 특정 철학을 성경에 강요한다고 자주 공격을 했다. 불트만은 이 공격에 대한 답하며 다시 한 번 각자의 해석학적 틀이 무엇인가를 발표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모든 해석학적 틀은 어떤 종류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느 것이 ‘올바른’ 철학인가하는 것이다. 곧
“어떤 철학이 오늘날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관점과 개념을 제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이 불트만에게 종교적인 의미에 대한 실존주의적인 탐구와 실존주의적인 실천의 필요성에 대한 분명한 초점을 제공하기 때문에 불트만은 그의 철학을 채택했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실존주의적인 분석이 나에게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로 인도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실존주의적인 분석은 내가 사랑함을 통해서만이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불트만에 따르면 성경 본문에 대한 비신화화의 방법은 신자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실존적으로 강화(强化)한다. 그러나 이 소명은 교회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고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를 거쳐 중재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봉사하기를 원했지만, 바르트와는 달리 그 같은 선포가 수행되는 조건들에 대한 알 맞는 분석에 집착했다.
5. 신학적 해석학에 끼친 불트만의 공과
불트만의 해석이론에 대한 혹독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을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이론의 낙후성과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그의 해석학이 제공한 중요한 진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접을 필요는 없다. 슐라이에르마허에 이어 불트만은 과학적 정신을 가진 현대 세계에 성경 텍스트의 의미를 비평적으로 연관시킬 수 있는 해석이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불트만은 신학적 해석학의 철학적 특징을 설득력 있게 수호했다. 그리고 스스로 특별한 철학적 틀을 선택했으나 그가 선택한 것만이 유일한 것 또는 정당한 것이라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같이 그는 신학의 가장 주된 임무 곧 성경의 의미를 청중들 각자의 세계관으로 바꾸는 일을 수행하려고 하는 한 계속되어야만 하는 대화의 문을 열어놓았다. 신학과 철학 사이의 대화이다.
폴 리꾀르는 불트만이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를 뛰어넘어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해석학에서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해석학으로 발전시킨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불트만의 해석학적 성찰이 충분히 나아가지 못한 부분을 비판했다. 그는 불트만이 해석의 장거리 여행에 뛰어들기 보다는 본문에서 곧 바로 실존적인 의미로 연결되는 지름길을 택했다고 비판했다.
리꾀르의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불트만이 신화를 “객관화 표현”(objectifying expressions)으로 해석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기독교의 선포(케리그마)가 가지고 있는 비신화적인 부분들을 해석하는 어떠한 이론도 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더 이상 ‘객관화’ 시키지 않는 언어를 순결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인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가?”
이처럼 한편에서는 객관화시키는 신화적 표현과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을 대립시키려는 불트만의 생각은 순진하기 짝이 없다. 신화를 해석하는 일을 촉구했지만 다른 신앙의 진술들을 해석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리꾀르는 불트만이 성경의 많은 텍스트들이 지닌 신화적 본질을 인식함으로써 피하려고 한 “지적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을 어떤 면에서 이제는 성경의 비신화적인 부분들을 더 이상 해석할 필요가 없는 신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바꾸어 말하면 불트만의 해석학은 해석학적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리꾀르는 나아가 불트만의 신화와 케리그마 사이의 대립에 대한 이 지나친 배타적 집착이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이해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리꾀르는 의미를 다루는 불트만의 문제가 기호를 다루는 구조주의자의 문제와 반대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 둘을 선명하게 비교한다. 불트만은 ‘말하는’ 측면을 강조한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언어’ 측면을 강조했다. 구조주의자들은 언어를 사건(event)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반면, 불트만은 언어를 기호 체계로 생각하는 것이 부족하다.
만일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텍스트는 더 이상 전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다. 실존주의적인 전유(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감)가 없으면 텍스트가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말(speech)이 아니다. 해석이론의 임무는 이해의 이 두 운동을 하나의 과정 속에 결합시키는 것이다.
불트만의 해석학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문제는, 바르트가 제시하는 것처럼, 신앙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또는 신앙을 인간실존에 관한 논의 속에 용해시키는 것도 아니다. 불트만은 어느 쪽도 겨냥하지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불트만의 해석학적 성찰이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성경 텍스트가 의미하는 바 모두를 충분히 고려하기도 전에 너무 조급하게 신앙의 결단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해석과정이 텍스트로 하여금 그것의 모든 꾸짖음, 도전을 허용할 때에만 실존적인 결단의 비평적인 기초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불트만을 향한 우리의 비판적 주장이다.
텍스트의 의미를 드러내는 이것이야 말로 신앙과 신학의 성찰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 드러냄은 우리가 앞의 여러 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많은 설명의 수고를 수반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텍스트는 나를 하나의 대상(objectum)으로 삼을 수도 있고, 나의 단순한 견해 속에 쉽게 용해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비평적 해석학은 일반적으로 언어이론을, 특별하게는 텍스트의 의미작용(signification) 이론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불트만이 자신의 해석이론을 발전시킬 때 하이데거의 철학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그를 비방하는 기초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는 인간의 개념성을 신학자에게 계몽시킬 수 있는 적절한 철학적 체계를 찾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트만은 후기 하이데거의 언어철학을 역설하지 않았으면서도, 이 철학과 비평적 대화에서 자신의 비평적 언어이론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놀라움과 신학적 의구심을 갖고 주목해야할 사항이다.
6. 바르트와 불트만의 해석학 비교
바르트와 불트만의 신학적 해석학의 논점은 무엇인가? 첫째, 한 신학자의 해석학적 접근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가 가진 해석학적 틀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질문해야만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바르트의 경우는 텍스트-해석의 원리들 및 현대 해석자들이 제시하는 지평에 대한 도전이 비평적으로 성찰되지 않았다. 불트만의 경우 그 지평은 논의되었지만 해석학에 대한 비평적 성찰이 비평적 언어이론에 의해서 뒷받침되지는 않았다.
둘째,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 계시를 왜곡시킬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슐라이에르마허가 주창한 해석학 원리 전체를 거부했다. 반면 불트만은 신학적 해석자들에게 자신들의 해석 조건들과 목적들을 비평적으로 성찰할 필요성을 계몽시키기 위해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적 통찰과 제안들을 비평적이고 건설적으로 발전시켰다.
셋째, 불트만은 기독교 석의의 철학적 원리들에 대한 비평적 성찰의 오랜 전통을 신학적 사고에 연결시켰고, 해석학에 대한 고전적이고 현대적인 철학적 성찰(특히 하이데거)과의 대화를 재개시켰다.
넷째, 바르트와 불트만은 둘 다 성경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에 비판적이었지만 모든 성경 해석에 있어서의 역사적인 차원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섯째, ‘하나님은 다만 의미를 위한 또 다른 용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에 대해 바르트와 불트만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호하려는 데 뜻을 같이했다. 불트만의 경우, 의미에 대한 탐구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는 텍스트에 귀를 기울이도록 준비시켰다. 리꾀르의 비평적 제안에 따르면 성경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롭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할 수 있다.
바르트의 경우, 우리는 이 텍스트들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선포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기 위해 성경 본문에 귀를 기울인다. 따라서 바르트와 불트만은 원칙적으로 성경 텍스트가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처럼 이들 두 학자는 모두 의사전달의 권위를 성경 본문에 새롭게 부여했으며, 살아있는 적절한 해석에 대한 관심을 계속적으로 유지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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