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와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 (바르트의 제자, 비서, 격려자, 비평가, 연구자, 조언자, 동역자, 동료, 저술 조력자, 대변인, 절친, 그림자, 동거인)
바르트의 해석학은 비평적인가?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16
바르트는 열정적인 해석학자이다. 성경 본문을 역사적인 사료로 분석하고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 척 했던 역사가들과 주석가들의 “비평적이지 않은” 주장에 대항하여, 성경 본문을 보호하는 데 열정적인 관심을 가졌다. 바르트는 더 나은 비평주의를 요구한다.
바르트에게 참된 비평주의는 텍스트의 의미를 신중하게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분문의 경우에 그것은 텍스트가 독자에 대해 비평적이라는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함을 의미한다. 성경 텍스트는 신중하고 주의 깊은 독자에게 위기를 야기한다.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ungel, 1934-)은 루터파 신학자이며 튜빙겐대학교 신학교수이다. 그는 바르트가 신약성경 「로마서」를 통해 그의 해석학을 위한 내용적인 기준을 어떻게 얻었는가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로마서」에 대한 바르트의 특별한 해석학적 경험은 그가 모든 성경 본문에 적용한 “하나님은 하나님이다”(God is God)라는 공리를 수납하도록 했다고 한다.
융엘은 우리에게 이 공리가 사실 자연신학에 대한 하나의 통찰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소위 자연신학의 전통과는 달리 바르트의 반복적인 진술 곧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확실히 “신격의 본질 곧 신적 요소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적 본질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모든 비신적인 본질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에 관한 이 공리는 바르트가 우리들에게 그것을 통해 성경이나 종교적 텍스트만이 아니라 모든 텍스트를 해독하기 바랐던 바로 그 공리이다. 특별한 신학적 과학(wissenschaft)이 필요하지 않으며, 설명과 이해에 관련된 모든 과학이 궁극적으로 신학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 해석학은 일반 해석학과 다를 필요가 없다. 다만 일반 해석학이 이런 기본적인 공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정직한 이해의 주제-내용(subject-matter)을 상기시키기 위해 성경 해석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CD I/2:725-7).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공리가 성경 「로마서」에 대한 바르트의 독해를 지도한 반면 그의 「교회교의학」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들을 향한 자신의 영원한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공리적 통찰에 의해 점차 인도를 받았다. 이 후자의 통찰은 더 이상 자연신학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에 대한 바르트의 특별한 해석학적 경험에서 생겨났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초기 작품인 「로마서 주석」의 주된 독해 관점이 다소 변증적이었던 반면 「교회교의학」을 지도한 관점은 자기 자신의 특별한 독해 경험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하나의 공리 곧 우리의 비평적 주의를 환기시키는 “성경 본문은 그 자체 곧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공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바르트는 종교개혁자들의 해석학에서 이미 이 공리를 접한 바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이 인간 이성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성은 성경해석에 대한 교회의 강요와 왜곡에 대항하는 척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해서 뿐 아니라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최근에는 불트만, 게르하르트 에벨링과 기타의 신학자들이 취한 성경해석 방법과 조건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대항하여 이 공리를 적용시켰다.
바르트와 그의 해석학에 대한 반대자들 모두가 성경 본문의 주제-내용은 그것 자체가 현대 독자인 우리들에게 알려지도록 허용되어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바르트는 모든 참된 성경해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로고스(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순종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바르트는 다른 해석자들과 같지 않다. 성경 본문을 갖고 신앙인 독자의 해석학적 경험의 내용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바르트에 대항하여, 불트만은 이 텍스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알기위해 우리가 성경해석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두 신학자 모두 아이스제시스(eisegesis)에서 텍스트를 보호하고자 했으나, 바르트는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오독(誤讀)의 가면을 벗기는 노력을 통해, 불트만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의 자아의식적 그리고 자기 비평적 개방성을 요구를 통해 그렇게 하고자 했다.
참고로, 아이스제시스(eisegesis)란 엑세제시스(exegesis)의 반대말이다. 독자가 어떤 것을 텍스트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텍스트를 이해함을 뜻한다. 통상 주석(exegesis)이라고 일컫는 해석 활동이 사실상 아이스제시스(eisegesis)일 경우가 많음을 빗대어 일컫는 용어이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모두 독해의 인간적 조건들을 깨닫고 있었다. 둘 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결점의 필요성에 대해 성찰했다. 그러나 이들의 출발점은 예리하게 달랐다. 불트만에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결점이 해석의 과정 그 자체였던 반면, 바르트는 텍스트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실증적 사실에서 시작했다. 바르트는 “우리 밖에서”(extra nos)에서 출발했고 불트만은 “우리 안에서”(intra nos)로 출발했다.
텍스트는 그것이 읽혀질 때 비로소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기해야할 질문은 텍스트-해석 그 자체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바르트 자신의 해석 경험을 통제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는 있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왜곡만이 아니라 새로운 독해활동에 대한 어떠한 교리적 선(先)결정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성경 분문의 뜻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을 가능성은 없다. 텍스트가 이해되려면 먼저 그것이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르트 자신의 해석학적 경험의 보편화가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아보려면 텍스트 그 자체를 통해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비평적인 미시적-해석학이 없이 비평적인 거시적-해석학이 있을 수 없다. 이 같은 계속적인 시험이 없다면 성경해석에 대한 바르트의 기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본회퍼가 제안했던 것처럼 단지 하나의 실증주의 곧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성립 불가능한 이론으로 남게 된다.
바르트의 해석학은 형식적인 언어학적 고려에 일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슐라이에르마허와 달리 그는 인간의 의사소통의 차원들을 논의하지 않고, 오독이나 텍스트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문제와도 씨름하지 않는다. 언어의 기능에 대한 성찰에 흥미가 없다.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을 거부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에는 바르트 자신의 신학적 공리 곧 좋은 해석학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수용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공리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에 관한 바르트의 강의는 슐라이에르마허의 텍스트 해석의 양극성(텍스트에 대한 문법적 그리고 심리학적 해석) 이론으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융엘이 잘 지적했듯이 바르트의 해석학은 계시의 해석학이었고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해석학이 아니었다. 만약 언어의 중재와 그것이 종종 일으키는 의미의 애매모호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로고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비록 바르트 자신은 언어의 이 기능들을 전제로 하고 사용했지만 텍스트 해석에서 이것들이 가지는 중요성, 특징,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소홀했다. 이 점에서 바르트는 그가 그렇게 경탄했던 어거스틴의 천재성을 결여했다.
바르트는 기호론적 문제들과 씨름하는 대신 전체 곧 계시에 대한 그의 특별한 해석학적 경험의 빛 속에서 우주를 해석하는 일에 목표를 두었다. 성경에 대한 자신의 읽기, 관찰, 성찰, 전유(專有)를 통해, 그는 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공리에 도달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해석활동에 적용했으며 우리에게 천거했다. 그러나 이 공리들은 비평적 성찰 없이는 교조주의적인 것이 되며 우리의 독해 결과에 너무 많은 것을 이미 결정해 버린다.
바르트의 위대한 업적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를 성경 텍스트의 신학적 메시지에 주목하게 했다는 점이다. 성경 본문의 의사소통적 관점을 재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신학적인 텍스트이며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우리가 오늘날 이 메시지를 어떻게 파악해 낼 수 있는지, 이 텍스트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그리고 성경 독해에 다양한 정당한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을 포함하여 기독교 신학 대부분이 가진 유럽 중심적인 특성과 같은 텍스트 독해 상황의 문화적 조건들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거론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 질문이다. 성령께서 세상에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고려가 성경 본문 연구를 위한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는 우리의 비평적 성찰을 배제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에 대한 바르트의 열정적인 지지는, 그가 후기에 이르러 인정했듯이 하나님의 인성(humanity)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해석학적 조건들을 인식하는 데도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바르트가 보았던 자유주의 신학과 자연신학 속에 작용하고 있는 성경해석에 대한 모든 철학적 그리고 그와 유사한 강요들은 그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고 인간이해의 조건들에 대한 불트만의 정당한 성찰을 오해토록 만들었다. 바르트와 불트만이 1952년에 나눈 의견 교환은 바르트가 왜 해석 조건에 대한 불트만의 성찰을 텍스트에 관한 정당하지 않은 결정이라고 거절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안셈(Anselm)에 대한 책에서 간단히 밝히듯이, 바르트는 좋은 신학의 기초는 그 신학자가 가지고 있는 기존 신조(credo)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이 신앙적 결단 바깥에서 시작한 어떤 신학적 강령도 거부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불트만은 바르트의 존재론적인 전제가 자신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인식했다. 우리는 불트만과 함께 바르트에게 질문할 것이 있다. 텍스트에 접근하는 전제들에 대한 공개적 논의가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정하는 것”(determining)으로 여겨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인간의 모든 해석적 노력은 그 자체가 조건적이다. 그러나 조건(conditions)과 결정(determinations)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해석적 조건들에 대한 우리의 토론이 정말 열려진 토론이라면, 그러한 토론을 통해서는 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성경 진리에 대한 항상 보다 깊고 정확한 이해로 인도하지 않는가를 알 수 없다.
바르트의 사고 속에 있는 하나님과 세상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로 하여금 우리가 16세기 이후로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혁명의 결과로 여겼던 신학적 해석학의 이중적 필요성 곧 적합한 텍스트-해석 이론을 발전시키는 일과 동시에 적합한 세상-해석 이론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아울러 거론하도록 하지 못했다.
바르트는 우리의 시대를 ‘현대’로 특징짓는 이 이중적인 해석학적 과업에 공헌하기 보다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신학적 해석학의 특별한 형식을 옹호하는 데 제한시켰고, 현대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문화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정당한 것으로 수납하기를 거부했다. 개신교와 가톨릭 정통주의를 연상케 하는 이 자기 제한적 사고는 바르트의 신학에 ‘신정통주의’라는 고유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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