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꾀르 연구소, 프랑스
폴 리꾀르의 철학적 해석학: 회복과 의심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13
1. 해석이론: 필연적 우회도로
폴 리꾀르(Paul Ricoeur, 1913-2005)는 프랑스 철학자로 프로테스탄트적 기반에서 현상학, 해석학, 언어철학을 섭렵했다. 딜타이, 훗설, 하이데거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자크 데리다, 위르멘 하버마스와 함께 당대의 '살아 있는 3대 철학자'러 꼽히기도 했을 정도로 학계에 영향을 미ㅊ쳤다. 리꾀르는 해석학의 범위를 넓혀 「해석의 갈등」(Conflict of Interpretations)에 대한 논의를 해석학적 성찰에 포함시켰다.
리뀌르는 해석학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종종 가다머와 논박을 했다. 가다머와 달리 수많은 현대적인 방법론적 제안들을 환영했다. 이 제안들은 해석학이 진정한 비평적 개념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잠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학적 성찰이 지닌 더욱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함의들(implications)을 놓치지 않았다.
리꾀르는 모든 해석학적 고려들이 인간상황을 더욱 포괄적이고, 철학적으로 파악할 목적의 한 과정이며, 필연적인 우회도로라고 했다. 가다머는 선한 의지를 가진 마음 자세로 고무된 모든 해석적 행위를 조화시키는 노력으로 진리를 드러내려 한 반면, 리꾀르는 존재의 현상에 대한 성찰로 해석학 논의를 시작했다.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나에게 존재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는 것만큼 존재한다. 이 진리는 하나의 사실(fact)과 같이 입증되거나 하나의 결론으로 추론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성찰 속에서 그 자체를 단정한다. 이 자기 단정은 성찰이다. 피히테(Fichte)는 이 첫째 진리를 독단적 판단이라고 불렀다. 그 같은 것이 우리의 철학적 출발점이다”.
이 출발은 이미 항상 해석의 문제에 직면한다. 그 같은 모든 단정들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리꾀르에 의해 제안된 첫째 성찰은 언어적이다. 둘째 성찰은 타인의 언어적 표현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항상 모호하기 때문에 리꾀르는 해석자가 모든 언어적 사건들의 모호한 성질을 비평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하는 해석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2. 이해와 설명
가다머는 오늘날의 독자와 그가 읽고 있는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역사적인 이질성(historical alienation) 곧 시간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이 간격은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새로워진 참여행위를 거쳐 극복될 수 있다고 했다. 가다머가 텍스트와 그것을 읽는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간격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반면, 리꾀르는 이것을 독자들이 텍스트를 자기의 이해로 삼아나가는 해석학적 행위의 기초로 간주했다.
리꾀르는, 저자가 자기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순간 또는 공중 앞에 내놓는 바로 그 순간에 기록된 텍스트는 자율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것을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의 해석학적 기능”이라고 한다. 자율적인 텍스트는 독자가 그것을 새롭게 자기의 이해로 만들어 나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작업은 있을 수도 있는 저자의 의도-이해관계, 원래의 의사소통적 상황, 그리고 본래의 수신자들 등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리꾀르는 이러한 자율적인 텍스트를 하나의 ‘작품’이라고 부른다. 일단 탈고되어 출간되거나 공중에게 던져진 텍스트가 새롭게 사용되도록 개방되어 있는 독립적인 구문(構文)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가다머와 달리 리꾀르는 텍스트-사용의 상이한 모델들을 논의하고 자신의 해석학적 목적들에 관련된 모든 방법론의 도움을 얻으려 한다. 예컨대 형식주의, 구조주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이론 등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이 이론들을 논의하면서 리꾀르는 텍스트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단일 해석활동은 없으며 단지 텍스트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상충된 목적, 이해관계 그리고 서로 다른 많은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 텍스트에 접근하려고 통과해야만 하는 지평들 또는 관점들도 근본적으로 상이하다고 본다.
이 주장은 현대 해석학자들이 어떻게 이 같은 방법론, 이해관계, 목적들로 뒤덮인 정글을 헤쳐 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리꾀르는 상이한 방법을 강조하면서 모든 전체주의적(totalitarian) 주장을 거부한다. 모든 다양한 방법론적 제안들이 해석활동 속에서 적합성이 증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구조주의적 해석은 텍스트 해석을 풍성하게 하는 하나의 잠재적 방법으로는 환영할만하다. 그러나 철학적 체계 차원의 구조주의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 방법 차원의 구조주의는 텍스트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독해의 구체적인 행위들을 타당하게 하는 비평적 과정에 공헌하는 반면, 이데올로기 차원의 구조주의는 실제적인 해석이 시작되기도 전에 역사적인 차원을 해석에서 자신을 배제시켜 텍스트에 대한 개방적이고 비평적인 연구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리꾀르는 해석에서 설명 방법들에 대한 이 개방성을 따르면서, 딜타이가 주장한 인문과학의 열쇠 개념인 “이해”와 자연과학의 열쇠 개념인 “설명” 사이의 분리시키며, 가다머의 반(反)-방법론적인 존재론적 해석학을 모두 거부한다.
리꾀르는 이해와 설명 모두가 모든 해석행위에 필수적인 단계라고 주장한다. 이것들은 변증법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두 움직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새로운 관점 때문에, 리꾀르는 언어학적 사건 차원의 텍스트가 갖는 실제적인 언어학적 특징을 고려할 수 있었다.
가다머의 해석학은 텍스트를 기호학적(semiotic) 관점 곧 하나의 실제적인 구조를 지닌 기호체계로 보지 않고 다만 철학적인 관점에서 의미론적(semantic) 가능성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위 과업은 결코 성취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해석학이 언어에 더욱 많은 주목을 해야 한다는 가다머의 요청은 그 자신보다 리꾀르에 의해 더 훌륭하게 수행되었다.
해석 모델에 대한 리꾀르의 이해와 설명 사이의 변증적인 관계는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처음으로 현대 해석학을 본문성에 대한 검토로 되돌아오게 했다. 가다머는 텍스트를 의미의 전달자로 보기는 했으나 그 텍스트가 실제적으로 그러한 의미를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가다머가 시대에 뒤떨어진 낭만주의 사상가로 간주한 슐라이에르마허는 본문성의 문제를 성찰했다. 텍스트를 언어의 일반적인 유형과 개별적인 문체로 구성된 구조화된 전체(wholes)로 보았다.
3. 슐라이에르마허와 리꾀르
20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텍스트-언어학(text-linguistics) 전공자들과 철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고 발전시켰다. 리꾀르는 해석의 양극이론을 옹호하고, 철학적 해석학의 창설자인 슐라이에르마허와 연결시켰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모두 ① 해석 활동의 ‘객관적’ 차원을 구성하는 텍스트의 언어학적 특징을 자세히 연구할 필요성, ② 해석의 ‘주관적’ 차원을 구성하는 해석자 개인의 관점에 대한 철저한 검토의 필요성, ③ 이 두 차원은 해석의 모든 행위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는 사실 등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 세 가지 통찰에 대한 리꾀르의 논의는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보다 더 발전된 것이지만, 그가 오래 전에 이미 예상한 것이었다.
리꾀르와 슐라이에르마허는 해석의 목적에 대한 진술에서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리꾀르는「해석이론」(Interpretation Theory, 1976)에서 해석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놓여있다. 그것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드러난 어떤 것이다.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이야기의 최초의 상황이 아니라, 텍스트의 비외양적인 지시(reference) 곧 있을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해는 저자와 저자의 상황과는 거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이해의 목적은 텍스트의 지시에 의해 열려진 세상 명제들(world-propositions)을 파악하는 데 있다.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의미에서 지시로 이동 곧 텍스트가 말하는 것에서 그것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조적인 분석이 수행하는 중개 역할은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을 정당화하는 것과 주관적인 접근을 고정하는 것 두 가지 모두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텍스트 이면에 있는 정신(mind)을 이해하려고 했고, 리꾀르는 이와 반대로 항상 새로운 의사전달 상황에서 텍스트 그 자체의 의미와 그것이 지시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했다. 리꾀르는 하이데거를 따라 텍스트 해석을 실존적 의미(significance)의 활동으로 간주한다. 해석의 과정에서 텍스트는 새로운 실존적 가능성, 새로운 “세계 또는 세계 안의 존재 양식들”을 열어 보일 수 있다. 이 존재 양식들은, 가다머의 해석학처럼, 텍스트의 지평에 조화롭게 잠입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석의 비평적 그리고 자기비평적 활동을 거쳐 드러난다고 한다.
리꾀르는 텍스트에 대한 모든 이해가 항상 설명을 거치는 확인과 교정활동을 통해 보충되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리꾀르의 해석이론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최초의 이해 (또는 추측) + 설명 = 비평적 납득 (이해)"
리꾀르가 말하는 설명활동은 구조주의적 또는 언어학적인 분석과 고찰에 제한되지 않는다. 프로이드, 마르크스, 그리고 니체와 같은 현대 회의주의적 주창자들을 따르는 회의적인 양태를 포함한다.
리꾀르는 이해를 전통 안에 들어가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 가다머의 비평적이지 않은 개념에 반대하여 비평적 차원을 해석학적 경험의 핵심에 들어갈 것을 주창했다.이데올로기와 이해의 과정에서 생길 수도 있는 조직적인 왜곡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와 달리 이 비평적 차원을 올바른 해석학적 차원이라고 본다.
리꾀르에 따르면 이해와 이데올로기 비판은 상호 관통해야 한다. 사회과학의 해방을 위한 관심과 인간전통의 비평적 회복을 증진시키려는 철학적 해석학의 관심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 관심들이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 해석학과 비평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리꾀르의 해석학은 인문과학에 대한 비평적 관심들을 합병시킨다.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에서 가다머에 이르는 리꾀르 이전 해석학자들과 대조해 볼 때 분명한 하나의 진전이었다. 이들은 어느 누구도 인간 이해에 비평적 차원의 가능성을 드러내 놓고 적대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이해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텍스트와 독자의 일치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슐라이에르마허만이 텍스트 해석의 언어학적 비평의 필요성을 수호했다. 이것은 그가 탁월한 주석적 전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심리학, 문화인류학, 사회과학, 그리고 관련된 다른 학문분야에 대한 비평적 관심은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시대에 출현했다. 리꾀르의 해석학이 회복(retrieval)과 의심(suspicion)을 포함시켜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해석학 분야에서 비평적 관심들을 해석이론 그 자체에 통합시키려는 첫 번째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이 비평적 관심들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해석학적이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4. 리꾀르의 공헌
리꾀르는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리꾀르의 업적, 문제점들, 남겨진 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해석학의 실존적-존재론적 차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이해에 대한 가다머의 존재론적인 접근이 지니고 있는 관념론적인 한계를 극복했다. 리꾀르에게 존재론은 필수적인 목표를 설명하는 것이지만 그 목표는 우리의 인간존재 안에서 도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취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항상 하나의 “부서진 존재”(broken ontology) 일 뿐이다.
텍스트 해석의 순환적 성질은 이해의 제한성을 말해준다. 해석자는 선-판단이 없이 그리고 최초의 위험 곧 추측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이해의 과정을 시작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주관적인 면 때문에 모든 해석행위는 아주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리꾀르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비평적 점검에 대한 소개이다. 그것은 텍스트의 관점에서 전제들을 시험함으로써 이해의 행위에 정확한 제한을 가한다. 그러나 텍스트의 관점으로 복귀하는 것조차 하나의 해석학적 활동이다. 따라서 텍스트 해석의 어떤 활동도 존재론적으로 ‘절대적’인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없다.
둘째, 리꾀르는 강력하고도 포괄적인 비평 차원을 해석이론에 도입했다. 해석은 이해와 최초의 이해활동을 정당화하거나 교정하는 수많은 설명 절차를 포함한다. 해석학은 더 이상 가다머가 생각한 것과 같은 회복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않는다.
셋째, 언어학적 고려는 리꾀르가 제안한 이 설명 방법들 가운데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처음으로 텍스트가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의 역동적 성격이 철학적 해석학에서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취급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역동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 역동적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우리들이 독해활동을 통해 텍스트가 어떻게 독자를 변형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 보다 정확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하다. 리꾀르는 해석이론의 언어학적 측면들과 실존적인 측면들 사이의 이 역동적 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충분히 다루지는 못했다.
넷째, 리꾀르의 텍스트의 자율성 개념은 독해를 통해 텍스트를 새롭게 자신의 이해로 만들어 나가는, 곧 전유(專有)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향해 텍스트를 개방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새로 등장하는 다양한 해석, 즉 해석의 다원주의를 평가할 수 있는가? 물론 리꾀르의 해석학의 비평적 측면이 어떤 독해를 설명활동을 통해 정당화 될 수 없는 부적당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리꾀르는 이들 모두가 각각의 비평적 활동에 의해 정당화 될 수도 있는 데 대해, 곧 상충하는 독해의 가능성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섯째, 리꾀르는 텍스트의 의미(sense)와 뜻(meaning) 그리고 지시(reference)를 구분한다.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의미에서 지시로의 이동 곧 텍스트가 말하는 바(what it says)에서 텍스트가 가리키는 바(what it talks about)로 이동 하는 것이다.” 리꾀르의 이 구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리꾀르는 ‘의미’를 순전히 텍스트의 언어학적 수준에 국한시키고 ‘지시’를 기호(sign) 텍스트와 그 기호의 실존적인 의미를 이어주는 실제적인 교량으로 생각한다.
5. 리꾀르 해석학의 실존적-신학적 차원
진론드는 우리의 해석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독해의 과정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어떤이는 의미를 위한 텍스트의 잠재성이 독해의 활동에서 실현된다고 할 것이다. ‘의미’는 텍스트 안에서 기호들로 결합된 지시적 힘의 독해를 통한 실현이다. 텍스트는 텍스트 안에서 이 지시적인 행위의 결합을 거쳐 형성된다. 따라서 ‘의미’(sense)를 텍스트의 질로, ‘뜻’(meaning)을 서로의 힘을 같이하여 텍스트를 생산하는 지시 망(網)을 형성하는 개별적인 언어학적 활동의 질로 정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우리는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독해관점이 다양한 설명방법을 거쳐 검증받고 이것에 의해 텍스트가 알려지고 인도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새롭게 생기는 텍스트의 의미(sense)는 항상 독자 개인의 능력과 임무수행에 따라 형성된다. 이것은 우주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와 관련된다.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독자의 세계에 관한 지시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리꾀르는 해석이론에 대한 고려가 이 우주의 인간실존에 대한 적합한 이해의 여정에 필요한 “우회도로”라고 말했다. 리꾀르에 따르면 이 실존적 조건에 대한 성찰은 직관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과 존재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증거해 주는 작품을 통해 그러한 노력과 욕망을 자기 것으로 삼음(專有)이다.” 전유작업은 해석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기호들 이외에는 존재의 행위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려 깊은 철학이 인간의 기호들을 읽고 해석하려고 하는 모든 학문의 결과와 방법 그리고 전제들을 포함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리꾀르의 해석학적 성찰은 항상 실존적 관심들로부터 동기를 부여 받았다.
이 실존적인 관심들은 리꾀르로 하여금 종교적인 텍스트로 방향을 전환하게 했다. 그것들은 자주 인간실존에 관해 매우 밀도 높은 성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러 경우에서 리꾀르는 종교적인 텍스트들이 독해 활동에서 드러낼 수도 있는 가능한 세계들을 보았다.
우리가 현대의 철학적 해석학의 신학적 차원들을 언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철학적 해석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신학적 해석학이 철학적 해석학의 완벽한 기초를 필요로 하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였다. 리꾀르에 의한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은 인간의 실존적 성찰에 있어서 종교적 텍스트들에 대한 적합한 해석이 포함되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 노력과 리꾀르의 철학적 번영 사이의 평형은 놀라운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 딜타이, 훗설, 하이데거, 가다머, 하버마스, 그리고 리꾀르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과 논평에서 우리는 리꾀르의 해석이론이 결국 겨우 두 세기 전에 슐라이에르마허가 요청한 것과 동일한 종류의 철학적 해석학이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과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특히 텍스트와 독해의 올바른 이론에 관한 문제이다. 리꾀르의 이론이 어떻게 수정될 수 있는가? 어느 정도까지 그 같은 비평적 해석학이 신학적 해석학을 변형시킬 수 있는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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