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성도의 견인에 대한 생각
칼빈주의자가 주장하는 성도의 견인 교리가 정말로 성경에 기초한 것인지, 존 웨슬리의 도움을 받아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전후 문맥을 꼼꼼히 확인하며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존 웨슬리, “성도의 견인에 관한 진지한 생각” ---
1.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책이 길어 일반 독자는 이해하기도, 구입하기도 쉽지 않다. 사람들은 이 주제에 관해 짧고 쉬운 글을 오랫 동안 원해왔는데, 이 글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지혜의 온유함을 허락하신 이들을 위한 것이다.
2. 나는 성도(saints)라는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그들은
I.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
II. 마음을 깨끗하게 해 선한 양심을 일으키는 믿음을 부여받은 사람,
III. 참 감람나무인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교회에 접붙임을 받은 사람,
IV. 그리스도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라고 말씀하신 참 포도나무 가지인 사람,
V.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게 하는 참된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매우 실제적으로 아는 사람,
VI.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성령의 증거와 열매에 참여하는 사람,
VII.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
VIII. 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다.
내가 성도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이 모든 특성 또는 그 특성의 일부라도 지닌 사람들이다.
3. 이런 사람이 타락할 수 있는가? 타락이라는 말은 단순히 죄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타락할 수 있는가? 성도 중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가?
4. 나는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이든 부정적인 답변이든 모두 큰 어려움이 있음을 안다. 그 어려움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사 8:20). 살아있는 말씀이 판단하시도록 하자.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더 이상의 증거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증거가 부족하지도 않을 것이다.
5. 나는 성경의 권위에 입각해 성도도 타락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의롭고 판단하신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왜냐하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겔 18:24).
이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은 26절에서 드러난다.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 모두를 포함한다. 이 사실은 에스겔 4장 전체를 보면 더 잘 드러나는데, 이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4절)는 말씀으로 입증된다. 만약 누군가 “여기서 영혼은 육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내 대답은 그것은 죄를 짓든 짓지 않든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6. 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겔 33:13). 이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 약속이다. 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라”(겔 33:18)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의롭다고 판단하신 사람도 타락해서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7. “그러나 이런 구절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 선언하신 말씀과 일치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시 89:30-35).”
내 대답은 한 곳에서 선언하신 것과 다른 곳에서 선언하신 것 사이에 전혀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과거에 의로웠으나 그 의로움에서 타락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진실로 맹세하신 오랜 인자하심에 관해 선언한다.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시 89: 20, 21, 29).
그 후에 이런 말씀이 뒤따른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 그럼에도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리라”(시 89:30-36).
여기서 말씀하는 언약이 전적으로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만 관련된 것임을 누구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한 특별한 가계와 맺으신 절대적 언약과, 모든 인류를 다루시는 방법으로 엄숙히 선언하신 말씀 사이에 무슨 불일치가 있는가?
게다가 다윗에게 하신 언약은 절대적이지 않고 조건적이다. 하나님의 법을 저버린 경우 회개라는 조건이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암시되어 있다. 회개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시 하나님께서도 다윗에게 이루어 주시기 않으신다는 것이 매우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 입술에서 내신 것을 변하게 하시더라도”(34절) 그것이 하나님을 성실하지 못한 분으로 만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신다”(38절)고도 하셨다. 다윗의 후손이 회개했다면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었을 것이다”(36-37절). 그러나 주님은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다”(39절). 시편 기자의 이런 말씀으로 선지자의 분명하고도 온전한 증거를 반박하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8.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다음의 말씀 사이에도 아무런 모순이 없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렘 31:3). 이 말씀이 어떤 의로운 사람도 결코 그 의로움에서 타락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단지 유대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를 분명히 확인하려면, 본문 전체를 주의 깊게 읽어보기만 하면 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렘 31:1-4).
여기서 우리는 거의 모든 저술가가 반복해서 일으키는 오류를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 전체에 보편적으로 관계되는 주장이나 예언을, 특정한 개인에게 부적절하게 적용하거나, 그 중 몇 가지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오직 유대인 교회나 국가에만 적용하면서 계속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특별히 나에게 계시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논쟁을 일으킬 만한 문제지만) 나는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특별히 당신이 끝까지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 그 이상을 증명해 주지는 못하며, 다른 사람이 그럴지 아닐지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
둘째,
9. 마음을 깨끗하게 해 선한 양심을 일으키는 믿음을 부여받은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8-19)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다음의 사실을 정확히 직시하라.
(1) 이 구절에서 말하는 (후메네오나 알렉산더와 같은, 20절) 사람들은 한 때 마음을 깨끗하게 해 선한 양심을 일으키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들이 한 때 가졌던 그 믿음을 그들이 과연 저버릴 수 없었는가?
(2) 그들이 믿음에서 “파선했다”는 것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믿음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파선해 버린 배는 결코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상실이다.
그리고 사도는 디모데후서에서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결코 회복 불가능하도록 잃어버린 바 되었음을 언급한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딤후 4:14). 따라서 한 번 마음을 깨끗하게 해 선한 양심을 일으키는 믿음을 부여받았던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10.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당신은 이 말씀이 지금 현재 “믿는 자”가 확실히 그리고 반드시 “미래에 구원 얻을 것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런 해석이 옳다면, 모든 논술의 규칙에 따라, 같은 문장의 다른 부분은 지금 현재 “믿지 않는 자”는 확실히 그리고 반드시 “미래에 저주를 받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말씀을 일부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문장 전체에서 “믿는 자는”이라는 말의 분명한 의미는, 그가 믿음을 지속할 때는 “구원을 받지만”, “그가 믿지 않으면” 즉 그가 불신앙 가운데 있으면 “저주를 받을 것”을 뜻한다.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에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 3:36)라고 하셨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영생이다. 영생은 본질적으로 하늘의 생명이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가졌다.”
(2) 따라서 믿는 자는 누구나 “사망에서” 즉 영적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그리고
(3) 그가 끝까지 믿음을 지속하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라고 하셨고, 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라고 말씀하셨다.
셋째,
12. 참 감람나무인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교회에 접붙임을 받은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17, 20-22).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1) 여기서 언급한 사람은 실제로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졌던 사람이다.
(2) 참 감람나무는 단지 외적으로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거룩한 신자로 구성된 비가시적 교회이다. 본문이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라고 말씀하며, 또한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20절)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3) 이 거룩한 신자들도 여전히 그들이 전에 접붙여진 비가시적 교회에서 잘려나갈 수 있다.
(4) 이 구절에서 잘려나간 사람이 다시 접붙여졌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따라서 참 감람나무인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교회에 접붙임을 받은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13. “그러나 이것이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라는 말씀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그 앞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택하심으로 하면” 즉, 유대 민족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심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28절). 그들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으로 인해 유대 민족을 위해 여전히 복을 베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축복과 그들에게 준 특권을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언급된 말씀의 본래의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특별한 축복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14. “그러나 당신은 여기서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라는 성경 말씀과 달리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분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신다”(시 45:7; 히 1:9). 그는 변함없이 선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막 1:15) 모든 사람을 용서하신다. 그리고 그는 변함없이 의로우시다. 따라서 그는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신다”(욥 34:11; 시 62:12).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들이 겸손할 때 베푸셨던 은혜를, 그들이 교만할 때 거두시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불변성 그 자체가, 그들이 교만해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꺽어버리시게 한다. 하나님 자신이 불변하시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경륜은 인간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상응해 변화할 수밖에 없다.
15.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신실하시다 할 수 있는가?”
내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후 약속의 조건에 부합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가 하신 모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점에서 신실하시다. 특별히
(1) 하나님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는 점에서 “신실하시다(미쁘시다, faithful).”
(2) “(만약 우리가 그를 신뢰하면) 주는 신실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신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 즉 우리가 그를 의지하지 않았을 경우 우리가 겪었어야 할 모든 악에서.”(살후 3:2-3).
(3)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19-24).
(4)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8-9).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당신은 약속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모든 약속은 예가 되니 아멘’(고후 1:20) 하고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약속은 하늘의 기둥같이 튼튼하다. 조건을 성취하라. 그러면 약속은 확실히 성취될 것이다. 믿으라,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약속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다.” 많은 경우 조건이 명확히 표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아무런 조건도 암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약속도 위에서 인용한 시편 87편보다 더 절대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수는 없다. 나아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전혀 조건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 구절에서도 조건은 이미 암시되어 있다.
16. “그러나 다음의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는 직접 표현되었거나 암시된 어떤 조건도 찾아 볼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어떤 조건도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 구절로 무엇을 입증할 수 있는가? 사도는 그저 그 순간 자신의 견인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는 사실 정도다. 그리고 나는 오늘날의 많은 신자가 성경에서 “소망의 온전한 확신”(the full assurance of hope, 히 6:11)으로 표현한 그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끝까지 신앙을 지속할 것임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이 자신의 견인을 철저히 믿고 있다는 사실만 입증할 뿐이다.
넷째,
17. 그리스도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라고 말씀하신, 참 포도나무의 가지인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1-6).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1) 이 구절이 말씀하는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참 포도나무 가지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2) 이 가지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게 되어 아버지께서 그들을 제해 버리신다.
(3)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가지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로부터 제하여 진다.
(4) 그들은 제거될 뿐만 아니라 말라버려, 결과적으로 다시는 접붙일 수 없게 된다.
(5) 아니, 그들은 단지 제거되고 말라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불에 던져진다.
(6) 그리고 그들은 불살라졌다. 현재 참 포도나무의 가지인 자들도 타락해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이보다 강하게 선언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18.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분명하고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선언에 근거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다른 말씀도 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처럼 말씀의 의미가 매우 확실한 경우, 주님이 다른 곳에서 다른 어떤 말씀을 하셨든지 간에, 그 말씀이 이 말씀과 충돌하도록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라”(요 6:39)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매우 확실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 또는 그 다음 절에서 표현된 대로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40절) 즉 끝까지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고”(39, 40절) 그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주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만일 사람이 (믿음으로)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그가 계속해서 그 떡을 먹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누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예를 보자.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7-29)라고 말씀하신다. 위에서 살펴본 구절에서 영생의 조건은 단지 암시되어 있었으나, 이 구절에서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주님은 영생을 얻을 이들을, 내 음성을 듣고 모든 거룩함 속에서 나를 따르는 내 양들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라고도 하신다. 그럴 때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라고 말씀하신다.
또 다른 예는,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주님께서 사랑하신 “자기 사람들”은, 그 전에 나오는 “세상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잘 보여주듯, 사도들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셨다.
19. 또 한 예는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라는 말씀이다.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매우 강조해 왔다. 그들은 이 구절로부터 (요한복음 17장 전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모든 사람은 반드시 끝까지 견인된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 구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직접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 중 하나가 끝까지 견인되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할 것임을 선언하신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았으나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요 17:12).
그러니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자 중에서도 한 사람은 결국 잃게 된 것이다! (다른모든 구절이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이 구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이라는 말씀은 오직 열 두 사도만을 의미한다.
20.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올바른 해석인지 증명되어야 함에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왔기에, 반드시 검증해 보아야 할 또 하나의 일반적인 사례를 발견한다. 우리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거나 사도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 모든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대체로 반박할 수 없는 진리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성경을 공정하게 연구하는 사람에게 이런 관례는 허용될 수 없다. 그들은 분명하고 구체적인 증거 없이는 일차적으로 사도들과만 관련된 성경 본문 중 어떤 본문도 사도 외의 다른 사람에게까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섯째,
21.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게 하는 참된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매우 실제적으로 아는 사람도 그 더러움에 다시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얻었던 의의 길에 대한 지식은 내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라는 사실은 다른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즉 그들은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다”는 표현인데, 이는 앞장 4절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라는 표현과 병행구이다. 두 장 모두는 세상의 더러운 것, 썩어질 것을 피하는 결과는 동일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한다. 1장에서는 그 원인을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아는 지식”(벧후 1:3)으로 설명하고, 2장에서는 보다 분명히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벧후 2:20)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체험적인 지식과 의의 길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예전에 피했던 세상의 더러움에 다시 떨어져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고 말았다”(벧후 2:20). 그들은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렸기에”(21절), 결국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해지고 말았다”(20절).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게 하는 참된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매우 실제적으로 아는 사람도 그 더러움으로 다시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22. 이는 앞선 서신 베드로전서 1장에서의 베드로의 말씀과도 완벽히 일치한다. “너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의심할 바 없이 이미 영원한 구원을 얻은 그들 모두는 보호하심을 받는다. 우리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보호하심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여섯째,
23.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성령의 증거와 열매에 참여하는 사람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표현은 너무나 강하고 분명하기에 여기서 언급하는 이들은 분명하고 중대한 어떤 왜곡이 없이 참된 신자를 말씀한다는 사실을, 모든 편견 없는 사람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한번 빛을 받고”(히 6:4)라는 표현은 사도에게 친숙한 것인데, 그는 이 표현을 신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적용하지 않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라는 말씀과 같다. 또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라는 말씀과도 같다. 이 빛은 어떤 불신자에게도 없는 빛이다. 불신자는 그 같은 비추심에 관어서는 철저히 문외한이다. 그 이유는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고후 4:4).
또한 그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히 6:4). 베드로는 이 말씀과 다른말씀을 연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의 다른 모든 열매와 함께 그들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 나아가 우리 주님이 바울에게 대위임 명령을 주시면서(이는 사도의 말에 암시되어 있다) 이 세 요소를 모두 포괄해 말씀하신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이 내용은 ‘한번 빛을 받고’라는 말씀으로 압축할 수 있다) 죄 사함과(이 말씀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와 관련된다)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이 말씀은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말씀과 관련된다) 참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8).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는 표현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라는 시편 기자의 표현을 가져온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치 당신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또 마치 꿀이 입에 단 것처럼 그 확신이 당신의 영혼에 달콤한 것이 되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한번 “빛을 받고” 이 “은사를 맛보고” 또 “성령에 참여한” 사람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도록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는 ‘만약 그들이 타락한다면’이라며 단지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사도는 전혀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헬라어 원문에는 조건절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원문을 평이한 영어로 옮기면 “한번 빛을 받은 후 타락한 사람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영원한 멸망할 수밖에 없다.
24. “만약 그렇다면 내 모든 위로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당신의 위로는 매우 빈약한 기초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내 위로는 신자가 다시 타락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의견이나, 어제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오늘의 것에 의존한다. 즉 나를 그 자신과 화해시키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현재적 지식을 의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고, 그가 빛 가운데 거하시듯 빛 가운데 거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현재적으로 교제하는 것에 의존한다. 나의 위로는, 은혜를 통해 내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또한 그의 영이 친히 나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롬 8:16)는 사실에 있다. 내 위로는 오직, 내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는 것과,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불멸로 가득한 소망을 가진 것, 하나님의 사랑에 내 마음에 부어지고 나는 세상에 대해, 세상은 나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내가 단순함과 경건한 신실함 속에서, 육체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내 양심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찾을 수 있다면 하늘 이편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기쁨과, 더 행복한 위로을 찾을 수 있는지 가서 찾아보라. 그러나 내가 가진 이 위로는 성도가 일반적으로 타락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 의견의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흔들리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이것에 미치지 못하는 위로를 취한다면, 당신은 부러진 갈대를 의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신의 손을 찔러 상하게 할 것이다.
일곱째,
25.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기자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의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삶을 현재적으로 살아간다(골 3:3). 그가 끝까지 견디면 그는 하나님과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뒤로 물러간다면” 주님은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즉 나는 그를 완전히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뒤로 물러간다고 표현한 것을 바로 뒷 구절에서는 “뒤로 물러가 멸망”(39절)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뒤로 물러간다고 한 그 사람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던 그 사람과 동일인이 아니다.”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이 결코 도달하지도 않았던 믿음으로부터 뒤로 물러날 수 있는가?
(2) 그러나 그 본문이 정확히 번역된다면, 그런 반대의 구실은 전혀 없어지고 만다. 헬라어 원문으로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뒤로 물러가면”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동사의 주어가 하나일 뿐 또 다른 주어가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거기서 무엇을 추론하고자 하는가? 이 구절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내용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비록 사도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2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 말씀이 들어있는 문장 전체는 다음과 같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는 사실이다. 단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 것을 전제로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담대히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히 13:6)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은 이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지 못하는가?
(1)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약속은 전적으로 현세적인 일에 관한 것이다.
(2)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조건적 약속이다.
(3) 그리고 그 조건은 바로 같은 문장 속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덟째,
27. 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된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6-29).
이 구절에서 부인할 수 없도록 분명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사람은 과거에 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된 적이 있었다.
(2) 그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도적인 죄를 저질러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았다.
(3) 그리고 그로 인해 그는 죽음보다 더 중한 심판, 즉 영원한 죽음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된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28. “무엇이라고! 그리스도의 피가 지옥에서 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자가 지옥에 갈 수 있는가?”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피는 땅에 쏟아질 수 없는 것처럼 지옥에서 탈 수도 없다. 하늘은 그가 모든 것을 회복하실 때까지 그의 몸과 피를 마땅히 받아둘 것이기 때문이다(행 3:21).
(2)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사람은 지옥에 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사람(히 10:29)은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사람도 지옥으로 가,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 속으로 떨어질 수 있다(히 10:27).
29.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지옥에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이 내일은 마귀의 자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의 아버지시면, 그는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신가?”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자녀는 참된 신자를 말한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다(요일 5:1). 만약 그들이 참된 신자로 계속 남는다면 그들은 지옥에 갈 수 없다.
(2) 그러나 신자라도 믿음에서 파선하면(딤전 1:19),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지옥에 갈 수 있다. 그렇다. 그가 불신앙 가운데 계속 남는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3) 만약 신자가 믿음에서 파선할 수 있다면, 지금 믿는 사람도 이후 언젠가는 불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 바로 내일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내일은 마귀의 자녀가 될 수도 있다.
(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믿는 한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그들이 예전에 믿은 적이 있든 없든, 마귀가 그들의 아버지다.
30.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 마음을 깨끗하게 해 선한 양심을 일으키는 믿음을 부여받은 사람, 참 감람나무인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교회에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라고 말씀하신 참 포도나무 가지인 사람,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게 하는 참된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매우 실제적으로 아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성령의 증거와 열매에 참여하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 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된 사람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
출처: 출처: 한국웨슬리학회 편역, 『존 웨슬리 논문집 I』 (서울: 한국웨슬리학회, 2009), 175-191 (웨슬리의 원문과 대조하면서 번역의 일부를 수정했음을 밝힙니다).
장기영 목사 페이스북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