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의 자살
양현혜(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윤치호와 김교신>(서울: 한울, 1994)에서 윤치호가 해방 직후 자살했다고 기록한다. 15년 뒤 개정판은 자살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소개한다. 아래의 글은 윤치호의 자살을 기정사실화 한다.
좌옹 윤치호기념사업회 창립총회를 보고
지난 3월30일 YMCA강당에서 윤치호 씨의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날 총회에는 연세대학교, YMCA,송도학원 역사학자 등 100여명이 모였다.
유치호는 누구인가? 충청북도에서 출생하였으며 전 대통령 윤보선이 그의 조카이며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핵심에서 최고 요직을 두루 거치고 독립운동 하였다고 훈장까지 받았으나 독립운동 계에서는 친일파로 분류하고 있는 윤치영의 형이다.
1881년 17세 때 신사 유람단의 한사람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그 후 관비 유학생으로 케이오 의숙에서 수학했다.
부친 윤웅열(尹雄烈)로 부터 남작을 습작하였으나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하여 에모리 대학에서 면학하였고 그후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그 기관지“독립신문”의 사장을 역임하고 독립회 회장도 하였다.
1911 데라우찌 총독 암살을 기도한 것에 연루 되여 105인 사건 때는 일경에 체포 되여 10년형을 언도받고 남작을 잃는 등 조국 독립운동에 앞장서 투쟁한 지식인 중 지식인이다.
그러나 만년이 되여 일제 총독부의 회유에 굴복하고 온건 노선으로 전향하였으며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기도 하는 등 민족반역 행위에 앞장섰다.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3.1운동을 전개할 때 우리나라는 일본과 하나가 되여야 한다며 일선용화, 투쟁 무용론을 주장하는 등 친일 거두로 변신하여 민족반역자가 되었다.
일제 말에는 기독교 황민화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수많은 독립 투사들이 중국 등 외국으로 망명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민족에 제단 앞에 자신을 초개와 같이 버릴 때 윤치호는 조선인 실업 대회에서 귀족원 의원으로 선임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
해방후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해 개성의 자택에서 자살하였다.
윤치호는 자살을 해야만 할 만큼 민족반역행위를 하였으나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살을 하였다는 점에서, 해방후 지금까지 민족반역행위를 반성하지 못하고 합리화 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통일과 민주화를 저해하며 민족정기를 말살한 친일 민족반역자나 그 후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지식인 중에 지식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솔선수범해야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민족반역행위를 했다는 것은 그 죄가 더 크다고 하겠다.
어러한 행적을 갖은 윤치호의 기념사업회가 열리고 앞으로 윤치호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칠 방침이라며 연세대학교 총장이 기념사업회 회장이 되고 여러 언론기관에서 이를 보도를 했다는 것은 무지하다기 보다 오늘의 우리 사회에 현주소를 말해 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한마디로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천국이 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한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유족회에서는 역대 정권과는 다른 국민 정부가 탄생한 이상 앞으로 친일 민족반역자들에 대하여 기념사업회를 하겠다는 철면피한 민족정기 말살 행위에 대하여 국민적 저지 투쟁을 전개하고 모든 국민들에게 자세히 알림으로서 독립운동에 일선에 섰던 자가 변절하여 민족반역행위를 저질은 것은 어떤 논리를 가지고도 용서받을 수 없는 민족반역행임을 깨우쳐 줌으로서 지엄한 역사의 교훈을 남기고 우리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한 민족정기를 확립을 확고히 다져 나갈 것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바이다.
대한민국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 김삼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