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증후군과 전통문화
아래의 글은 <리포르만다> 사이트 현대화 개편 때 사라진 글을 복원한것이다. 기독인의 전통문화 이해라는주제만이 아니라 이끌림, 운치, 기풍 있는 글쓰기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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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관객 백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놀라운 대중적 흡인력을 지닌 작품으로 한국영화사상 전례 없는 기록을 올리고 있다. 국내의 유명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대통령은 “내가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잘 된 작품”이라고 극찬했으며, 국회의원들이 단체 관람을 했다고 한다. 다소 과장되게 말해 텔레비전을 켜고 신문을 펼쳤다 하면 「서편제」 이야기가 빠질 날이 없다. 이것을 보지 않으면 문화인 축에 들지 못한다는 분위기마저 형성되고 있다. 한국적 정서와 멋을 예술화하고,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서편제」 증후군(syndrome)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서편제」는 짓눌리고 고달픈 삶 때문에 뼈 속까지 스며들어 농축된 한국적 정(情)과 한(恨)을 주제로 삼아 어느 소리꾼의 유랑적 삶을 그린 소설을 영상화한 것이다. ‘소리’에 집념을 가진 떠돌이 소리꾼이 주워 다 키운 딸에게 창악 판소리를 익혀 득음(得音)케 한다는 내용이다. 소릿길을 떠나지 못하도록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하고, 한을 소리에 실어 그 한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한스런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심 봉사가 살아난 딸 심청을 만나는 해한(解恨)의 소리판을 끝으로 극적으로 만난 눈먼 누이와 눈뜬 의붓동생과도 헤어진다는 슬프디 슬픈 이야기이다.
작품 「서편제」를 이끌어 가는 것은 주로 판소리이다. 서도 중심으로 발전된 애절하고 가냘프면서도 신명나는 창 서편제는 굴렀다가 꺾고, 맺었다가 풀고, 끌어안았다가 다시 펼치는 온갖 변화무쌍한 소리의 조화를 가사와 더불어 표현한다. 소리꾼과 북채 잡이가 혼연일체 되어 한을 토로하며, 신명나게 풀어 가는 문학적 표현이며 동시에 음악예술이다.
운명론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반영시키는 이 작품은 득음을 해탈(解脫)의 길로 제시하고 있다. “야 이놈아, 쌀 나오고 밥 나와야만 소리 하냐. 지 소리에 지가 미쳐서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더 좋은 것이 이 소리 속판이야.” 가난과 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토해내고, 한을 소리에 실어 그 한마저 극복케 함으로써 해한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고난과 비정, 정과 한의 문턱을 넘어서는 한국적 인간고(人間苦) 극복이 이 작품의 주요 메시지다.
「서편제」 증후군을 두고 논의해야 할 것은 기독교 복음과 전통문화 사이의 관계이다. 복음은 가는 곳마다 특정 문화와 만난다. 하나님은 문화를 초월하지만 복음은 문화를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매개체로 사용해 왔다. 인간은 문화적 양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교감이 이루어지는 문화 매개체를 통해서만이 문화공동체 속에 가장 효과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 유형에 따라 다르다. 소극적이고 은둔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문화 그 자체를 신학의 자료로 삼기도 한다. 전자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외친 터툴리안적 태도이고, 후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기독교인으로 보는 변증가 저스틴적 태도이다. 개혁신학은 복음으로 문화를 정복하고 변혁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문화 그 자체는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이교사상, 허무주의, 운명론 등 비복음적 요소와 오염된 세속 문화를 복음으로, 진리의 빛으로 중생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적 사명이다.
그런데 기독교를 유일한 종교로 삼으면서 문화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이 태도는 자주 전통문화의 형식(mode), 토속적 표현방법, 취향, 가락, 기질까지도 악마시하면서 서양적 문화형식을 복음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서양적인 형식, 정서, 기질까지도 답습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한국적 전통문화와 그 표현형식에 대하여 매우 염려스런 눈빛을 보내고 있다.
전통문화 형식은 음식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담을 수도 있고 비복음적인 것을 담을 수도 있다. 복음은 사발이나 뚝배기 옹기에 담겨질 수도 있고 접시나 유리잔에 담겨질 수도 있다. 서양인이 목댕기(넥타이) 매고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바지저고리를 입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서양교회가 뾰족한 종탑을 가진 예배당을 지을 때 우리는 기와지붕 예배당을 지을 수 있다.
전통문화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는 불신자 부모와 기독신자 자녀의 관계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신부모의 비복음적 메시지는 배척해야 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외적 내적 문화의 유산들을 버릴 필요는 없다. 황갈색 얼굴에 흑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한국인이 한국인 되기를 포기할 수 없고, 한다고 해도 파란 눈의 서양 사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편제, 동편제, 중고제는 찌들고 한스러운 삶이 만들어낸 가락이다. 이것을 “예수냐, 사탄이냐”는 식의 이분법적 발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문화재 박동진 장로의 판소리 「예수전」은 은근한 종교적 감동마저 가져다준다. 한국적 가락에 맞춰 작곡된 찬송가가 한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애창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전통문화 행사라는 미명 아래 우상숭배, 미신, 푸닥거리, 민속신앙을 끌어들이고 미화시키는 작금의 행태들, 그리고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혼합주의적 현대신학은 철저히 배격해야 하지만,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판소리를 들을 때 그 가락이 청승맞게 여겨지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서양화되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는 정한(情恨)이 가득해야 할 밀가루로부터 너무 먼 곳에 동떨어져 존재하는 누룩이다. 부패한 음식물을 방지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소금이다. “예수 믿으시오”라는 그의 외침은 대중의 귀에는 마치 기독교인의 귀에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소리와 같이 들릴 것이다.
전통문화 형식은 복음을 위한 도구이다. 「서편제」 증후군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의 한국인에게는 우리에게 걸 맞는 문화형식을 따라 복음을 전할 때 교감이 이루어질 수 있고, 아울러 대중적 흡인력을 지닐 수 있다. 한국인의 핏줄 속에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신명나는 가락, 소리, 몸짓이 있다. 한국적인 삶과 멋이 있다. 우리만이 갖는 정서, 기질, 취향, 심성, 문화형식이 있다. 신학도에게도, 유생에게도, 스님에게도 감동을 주며, 초로의 신사에게도 감흥을 안겨다 주며 눈물샘으로 연결시키는 채널이 있다. 우리 나름의 문화형식과 토속성, 비감, 향수, 미적 향취가 있다. 이것을 잘 살려서 복음의 내용을 담아 가는 적극적인 작업이 요구된다.
최근 기독교 일각에서 「서편제」가 제시하는 세계관이 운명론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인본주의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구원의 복음, 한의 극복 또는 진정한 해한(解恨)마저도 없다는 비판이 높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이 작품에 대한 적절한 평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 것을 두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감 놔라 배 놔라”고 말할 게재가 못 되기 때문이다. 「서편제」가 우리에게 체념적이고 절망적인 상태를 벗어나는 천로역정(天路驛程)을 제시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한국적 정서와 멋을 주제로 삼은 하나의 문학예술 작품으로 대하면 될 것이다.
최덕성 1993
참고: 위 글은 최덕성 지음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서울: 지식산업사, 2005), 269-273쪽에서 옮긴 것이다. 기독교와 전통문화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가진 '리포르만다' 회원들의 요청에 따라 게재한다. 애초에 <기독교보>(1992)와 <21세기 목회현장>(교회문제연구소, 1993)에 기고한 글이다.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는 “이끌림, 운치, 기풍” 항에서 위 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개말을 곁들인다.
“글은 궁극적으로 독자를 위한 것이다. 독자가 읽어주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논문과 논술문은 논리로 독자를 설득하는 글이란 점에서 이지적이다. 간결체, 만연체, 건조체로 쓰여 진다. 그러나 법조문 같고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난삽한 문체로는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없다. 새로운 사상과 정서를 낳고 키우는 표현, 삶과 몸의 끙끙거림을 문자화한 글, 담담하고, 당당하고, 실존적인 분위기를 담은 글이 독자의 사랑을 받는다. 논문과 논술은 간결성과 논리성을 요건으로 하지만 이끌림과 운치와 기풍이 있고, 간결체, 만연체, 건조체로 쓰면서도 주제를 상실하지 않고, 미끄러지듯 진행되고, 박진감 있고, 신선하게 독자에게 다가가야 하는 글이다. 번득이는 예지와 호소의 메아리가 있고, 독자와 손을 마주 잡고 진실, 소박, 눈물을 나눌 수 있는 글이 환영을 받는다. 위 예문은 이 같은 현대인의 선호도를 고려한 논술이다. 소박성, 정한(情恨), 끈끈함 등이 표현된 것으로 논문의 문체로도 적합하다. 이 글은 영화 「서편제」의 인기가 고조되고 있을 무렵에 쓴 시의성을 가진 글이다. 서양적인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기독교인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다소 길고 완벽하지 않지만,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전문을 싣는다”(269쪽).
최덕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2005.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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