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한 법의학 수단으로 재현한 예수의 얼굴. 영국 맨체스터대학교의 영국의 리처드 니브 교수가 복원한 얼글이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발굴한 예수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3개의 셈족 두개골에 컴퓨터 단층촬영과 디지털 3D 기법을 활용했다. 예수는. 담갈색 눈에 수염을 길렀으며 짧은 곱슬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 종교적 예술품에서 묘사한 긴 갈색머리를 가진 백인 예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키는 1.5 미터이고 작고 몸무게는 50 킬로그램 정도라고 추측한단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김홍전 목사의 강해설교문, 요 1:1-~14
1.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예수님 비하의 생활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큰 공로, 즉 속죄의 공로를 우리가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속해 주시고 그에 따라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그 큰 은혜의 사실을 예수님께서 종의 형상을 입고 사신 그 생활의 정점에서 우리가 얻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지극히 큰 은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의 그 완전무결하신 생활이 우리에게 큰 공로를 입혀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스콜라 철학자들 가운데 안셀름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강하게 주장하기를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를 입는 것은 그의 십자가 속죄의 공로다. 그분이 이 세상에 아기로 낳고 크고 성인이 돼서 공생애를 이뤄 나가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고 사신 것은 법 아래 난 까닭에 그 법을 준수해야 할 당연한 책임 아래에서 그분 생애의 당위를 위해서 법을 지키고 사신 것이지, 그 준법 생활이 우리에게 직접 공효를 주는 것은 아니다.” 하는 이론을 했지만, 우리 교회가 믿고 나오는 것은 개혁시대 이래로 명확하게 천명해 나간 큰 교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공로를 입을 때에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공로뿐 아니라 그분이 낳고 아기로 자라고 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전 생애에서 온전히 율법을 지키신 그 생애의 공로를 또한 입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초부터 이 땅에 오실 까닭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 사랑 때문에 스스로 종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셨다는 것도 우리를 위해서 오신 것이고, 오셔서 그러한 생활을 하신 것도 우리 때문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럴 필요가 있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러한 의무를 친히 짊어져야 할 위치에 계실 분이 아닌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의무를 친히 짊어져야 할 위치에 들어가셨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께 필요가 있어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해서 하신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나셨으니까 당연히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법을 꼭 지키고 살아야 할 그런 위치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법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람 세계에 사람으로 내려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즉 예수님 스스로 비익을 얻으려는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사생활이나 공생애는 그것대로 의 하나를 이뤄서,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입니다.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로마서 7장 10절을 보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됐도다.”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원래 목적, 그 당연한 귀결은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활, 율법을 지키고도 남은 그 철저한 생활, 성문成文이었든지 불성문不成文이었든지 모든 법이 결국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생활의 완전무결성에 따라 필연으로 생명을 보수報酬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 14:6)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이시므로 당신의 필요에 때문에 준법을 해서 생명을 터득해야 할 까닭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속죄의 공효로 의롭다 하심을 주시는 동시에 그리스도 율법의 완전한 준수라는 공효를 입혀서 과거의 모든 죄 있는 생활을, 마치 율법을 절대적으로 완전히 순결히 지키고 또 앞으로도 무슨 죄책에 빠져 들어갈 가능성이 없는 것같이 여겨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연으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데서 발생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2.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총대(總代)라는 의미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분 순종과 그분 준법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자에게 공효를 입혀 주셔서 그분께 속한 모든 자가 그 공로를 입어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의롭다고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원래 칭의(稱義)라는 말뜻이 의롭지 않은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보시고 의롭다 인정하시는 하나님 법적 행위를 뜻하는 것인데, 우리가 생명을 받을 법적 근거도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준법 생활로 필연으로 획득하신 그 영원하신 생명을 우리 안에 다 주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 아기로 나서 자라고 어른이 돼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때까지 생활 하나하나가 우리들이 마땅히 율법의 요구를 이뤄서 얻어야 할 영원한 생명의 내용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총대(總代)로서 생활,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기록 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됐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나니” 하는 말씀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있는데, 로마서 5장 12절~2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총대가 돼 완전무결하게 법을 지키는 생활을 하심으로써 받으신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어떻게 돌아오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두 절을 읽겠습니다. 18절을 보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름 같이”, 첫 아담이 범죄해서, 그것도 한 번 범죄한 것입니다. 다른 범죄를 가지고 논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은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것을 주의하십시오. 의롭다 하심, 즉 완전히 법을 준수하셨다는 법적 위치에서 너희를 완전히 법을 준수한 자로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롭다는 말, 티카이오쉬네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면 당연히 생명은 네 것이다.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많은 사람이 당연히 그 결실로 생명을 받아서 의인이 된 것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 순종으로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 그분께 속한 백성, 그분의 모든 식구들이 ㅡ말하자면 그분께 속한 새로운 종족이ㅡ 다같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김홍전, <성탄절 강설> (전주: 도서출판 성약, 1986); <그리스도께서 오심>(전주: 도서출판 성약, 1990, 개정증보판); 김홍전,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 (서울: 성약출판사, 2009, 개정증보판)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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