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설교 - 팀 겔러
2018 센터처치 콘퍼런스 ‘복음, 도시, 운동’ …첫째 날 강의 주요 내용
뉴욕에서 ‘도시복음 운동’을 펼쳐온 팀 켈러 목사가 한국의 목회자들과 만났다. ‘시티 투 시티 코리아(CTCK)’의 주최로 서울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5일부터 진행된 ‘2018 센터처치 콘퍼런스 복음, 도시, 운동’에 목회자 1300여명이 참석했다.
켈러 목사는 사흘 동안 뉴욕 리디머장로교회에서 목회하며 겪은 복음 운동의 성과와 그 과정에서 품었던 고민을 한국 목회자들과 나눈다. 국민일보는 사흘간 진행되는 콘퍼런스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서 제공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복음과 설교(Post-modern&Gospel>
서구교회는 한국교회를 존경한다. 100년 동안 한국은 인구성장률보다 교회가 더 빨리 성장했다. 0%에 가까웠던 기독교인 비율이 10%, 20%를 넘는 나라가 됐다. 한국의 믿지 않는 문화권 속에서 ‘선교적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알려주고 잘 소개함으로써 회심하도록 돕는 선교적 만남이 선교사들을 통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쇠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사회 안에 기독교를 믿지 않는 문화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믿지 않는 문화 속에서 어떻게 선교적 만남을 만들어 낼지 찾아야 한다.
내가 한국에 대해 받은 인상은 물질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을 묘사해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전 시대엔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질문에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이행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내 인생 밖에 도덕적 진리가 있고, 죄와 수치심을 알며, 내세라는 개념을 믿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에서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고 물으면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한 게 무엇인지 밖에서 누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규정한다. 그 대신 내 갈망과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음악, 영화, SNS, 광고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4가지 슬로건을 듣게 된다. ‘당신 자신에게 진실해라’, ‘행복해져야 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는 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야 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말할 권리는 없다.’
유교 문화권에 사는 한국의 젊은 세대는 매일 광고, 음악, 영화, SNS를 통해 위와 같은 4개의 슬로건으로 폭격당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끌진 않지만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와는 달라지게 하는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 그 변화는 매우 빨라서 미국에서 4세대에 걸쳐 진행된 변화가 한국에선 한 세대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성인 세대는 나의 아버지, 심지어 할아버지 세대와도 비슷하다면 지금 젊은 세계는 전 세계 다른 곳의 청년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 받는 것과 똑같이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이 목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지난 세기 전도사역은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내세에 대해 믿고, 도덕적 기준이 있다고 믿고, 부끄러움과 죄가 뭔지 아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가진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못 산다’는 죄책감을 전제로 이뤄졌다.
지금은 그런 전제를 절대로 가정할 수 없다. 도덕적 진리는 없고, 도덕적 기준과 선과 악을 당신이 정하라는 시대다. 그런 상황이라 죄가 무엇인지 말하는 게 쉽지 않다.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 사역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한국 사회 안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 끼치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향 미칠 것은 확실하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권위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래라 저래라 타인이 압박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에 다가가지 않은 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걸 싫어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해야 할까. 여러분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설교할 때 기억해야 할 7가지를 이제부터 이야기하겠다.
1. 믿지 않는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써야 한다
그들에게 여러분이 설교자로서 사용하는 독특한 전문 용어를 배우라고 강요하지 마라. 예를 들어 ‘언약’, ‘칭의’와 같은 전문적이고 신학적인 용어를 쓸 때면 매번 무슨 뜻인지 설명해야 한다. 여러분이 어떤 기관에 갔는데 당신이 모르는 용어만 잔뜩 쓰고 있다면, 여러분 스스로 얼마나 아웃사이더나 이방인으로 느끼게 되겠나. 여러분이 ‘해석학’이란 단어를 쓸 때 이는 꽤 배운 사람임을 과시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짓 하지 마라.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기독교인이 쓰는 경건한 용어들이 있고, 무슨 뜻인지 몰라도, 그 말을 써야하는 상황이 있다는 걸 안다. 가령 미국에선 ‘Blessing(축복)'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것도 저것도 축복이라고 하는 대신 ‘Great time(좋은 시간)’가졌다고 말하면 안 되냐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람들은 진정성을 원하지 우리가 연기하거나 쇼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과거 로마 가톨릭이 라틴어를 쓰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배제시켰던 것처럼 하지 마라. 단순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가는 말, 사람들과 쉽게 통용되는 언어를 써라.
2. 성경과 더불어 안 믿는 이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인용해라
우리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 지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지만 동시에 안 믿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거나 사용해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납득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어떤 그룹이든 작가, 배우, 강연자 등 그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은 다신론을 믿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말한 모든 것을 수용하진 않지만, 그가 말한 것 중 진리가 있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용한다. 가령 성경이 이렇게 말했는데 킹 목사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인용함으로써, 설득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성경과 그들이 존중하는 권위자를 같이 인용할 때 다음 논의로 넘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성경만 계속 인용한다면 그들은 다 설득당하지 않을뿐더러 당신이 원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 없다.
3.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줘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의심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유다서에는 ‘의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분명 명령임에도 기독교의 많은 설교자들이 의심하는 사람에게 자비롭지 않다. 하지만 여러분이 설교할 때 그들이 의심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 회의론자가 되는 것,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도록 해야 한다.
4. 그들이 믿고 있는 것에 근거해 그들이 잘못 믿고 있다고 말해줘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두 번째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당신이 누구를 설득할 때 ‘나는 완전히 옳고 당신은 완전히 틀렸다’, ‘나의 믿음은 다 맞고 당신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설득적이지 않다. 가장 설득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저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걸 이용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걸 믿나. 나도 믿는다. 그것에 대해 당신도 나도, 그리고 성경도 동의한다. ‘만약 당신이 그걸 믿는다면 왜 이건 믿지 못합니까’라는 식으로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갖고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으면 성경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도행전에 나온 사도 바울의 설교와 강연이 모두 그렇다.
5. 믿지 않는 이들의 갈망에 맞춰 복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라
여러분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비록 그들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라도 이것이 진리였으면 좋겠다고 믿고 싶어지게끔 전해야한다. 10년 전에 세 명의 한국인 목회자가 나를 찾아왔다. 교회에서 자란 청년이라도 대학에 들어가면 교회를 떠나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리디머 교회에 출석한 것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교회에 온 청년들은 아시아안 교회에선 당신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니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작 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리디머교회는 복음이 제시할 수 있는 것, 사람들에게 약속할 수 있는 엄청난 것들에 대해 말했다. 얼마나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파워풀 한 것인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은 고난 있는 삶에 의미를 제시할 수 있고,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있다.
1세기 기독교인들이 왜 기독교를 믿었나 보면, 다른 종교가 제공하지 못하는 두 가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는 없었다. 이 두 가지는 당시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던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온갖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교회에 왔다. 그 깊은 갈망이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있다. 여러분이 그들의 갈망과 복음을 연결시킨다면, 그들은 복음에 반응할 것이다.
6. ‘이렇게 해야 한다’고 어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라
사람들의 의지에 어필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은 거부감을 갖는다. 고린도후서 8장에서 바울이 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라.
‘이렇게 해라, 하지 말아라’ 그들의 행동에 관심을 보이는 방식만으로는 지금 시대에 먹히지 않는다. 인생의 의미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에겐 통할지 모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설득하면 오히려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고린도후서 8장에서 바울이 한 것을 보라. 바울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대신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복음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라고 마음 속에 복음을 적용함으로써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7.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 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히 제시하라
지금까지 종교적인 사람과 진짜 기독교를 믿는 것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인을 통해 천국을 허락해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한다고 말한다.
이 둘 사이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둘 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다른 동기에 따라 하고 있고, 그 결과 또한 분명히 다르다. 내가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나를 용납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 천국에 가기 위해, 그 능력을 얻기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분이 순종하는 것은 이미 천국이 보장돼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은 바리새인, 한쪽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되라고 해야 한다.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일보> 2018.3.5.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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