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투데이 기사 (2014.03.24)
중세 이단정죄는 자가당착과 적반하장... 한국교회는?
최덕성 박사, 교회사학회·복음주의역사신학회 공동학술대회서 발표
“중세교회의 이단정죄는 교회개혁가들을 이단으로 몰아 정죄하고 처형하는 자가당착과 적반하장의 역사를 되풀이했다.”
2014년 3월 22일 서울 양재동 횃불트리니티대학교(총장 김상복 목사)에서 열린 한국교회사학회(회장 이정숙 교수)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 윤종훈 교수) 공동학술대회에서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는 이 같이 주장했다.
최 박사에 따르면 중세교회의 이단들은 성격에 따라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문화적·감정적·정치적 동기로 정죄된 이단이며, 특히 동·서방 교회는 서로를 이단으로 단죄하는 등 기독교회 전체를 이단논쟁에 함몰시켰다. 둘째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바울당원주의자들, 보고밀주의자들, 카타리파 이단 등으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나 ‘피오릉의 요아킴’의 종말론 등과 함께 이들의 이단사상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신앙과 행위의 ‘권위’와 관련된 이단으로, 이들은 성경이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고 믿었던 ‘이단 아닌 이단’들이었다.
중세교회는 교회의 결정을 절대시하는 ‘교회교(Churchanity)’ 관점이 크게 작용했다. 교회는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새로운 세력에 대항하는 이단들에 대해 강력한 박멸운동을 펼쳤다. 여기에 무지, 오해, 적대감, 기존체제 보호, 괘씸죄 등이 가세하여 ‘진짜 이단’ 뿐 아니라 무죄한 이들과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이들까지 이단이라 정죄하고 죽이는 오류를 범했다. 최 박사는 “당대 최대의 살인집단은 바로 교회”라고 일갈했다.
최덕성 박사는 “중세교회의 잔혹성과 마성(魔性)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기독교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으로 이단을 교화하려던 순전한 기독교인들까지 박해했다”며 “교회는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면서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부패와 부조리를 개혁하거나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지 못한 채 오로지 힘으로 이단을 징치하려 했기 때문에 결국 중세교회의 이단박멸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최 박사는 “중세기 이단의 번성은 교황좌를 두고 연출되는 유혈극을 비롯해 성직 매매, 진리 부재, 영적 허기, 성직자들의 사리사욕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의 표현이었다”며 “이단자들은 자신들이 기존세력과 충돌을 일으키면 목숨을 잃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진리와 경건한 삶에 극도로 목말라 있었기 때문에 기존 교회의 제도와 교리에 저항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결국 이단 문제 해결 방법의 최선은 무력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경건한 삶과 영혼의 갈망을 채우는 말씀과 교리 교육”이라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중세후기 이단자와 이단운동을 발판 삼아 지은 ‘장려한 건축물’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을 이단자로 단정한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후기의 교회를 이단시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그 교회를 우상숭배 집단, 거짓 교회, 사탄이 더럽히고 부패시킨 교회제도라고 비판했다. 최 박사는 “중세교회의 이단정죄 역사는 ‘교회가 이단이라 단죄했다’ 하여 반드시 이단은 아님을 말해 준다”며 “이는 이단정죄의 규범 또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비평적 검토를 촉구한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최 박사는 “한국교회를 포함한 개신교회는 진리에 목숨을 건 ‘용감한 이단자’들-이단자 왈도, 위클리프, 얀 후스, 루터, 칼빈 등-의 수모와 희생 위에 세워졌다”며 “중세교회 이단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교회’라는 조직체로부터 이단으로 단죄됐다 하여 모두 진정한 의미의 이단 또는 이단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며 “힘의 논리, 기득권, 다수 판단, 정치 폭력, 무지, 사소한 허물 침소봉대, 괘씸죄, 기득권 보호 목적 등 성경을 표준 삼지 않고 성경적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 이단정죄는 유효하지 않다”고 정리했다.
이 원리가 역으로 적용된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논란을 들었다. 그는 “지난해 초, 한국 신학자들 일부가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성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 복음 없는 선교 중심의 개종전도 금지주의,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들려주는 도구일 뿐이라는 성경불신주의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부산에서 열린 WCC 총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생명(zoe)의 복음을 배제한 채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은총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이단적 선교-전도 선언서를 선포했다”며 “그러나 한국의 교회, 이단 전문가, 신학자들은 이를 모두 방관했는데, 이러고도 한국교회의 이단정죄가 힘의 논리, 다수의 시각, 괘씸죄, 교회교 관점이 아니라 오로지 성경과 성경적 진리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자가당착: 동·서방교회, 양측 서로 이단정죄하다가 분열
적반하장: 교황보다 성경의 권위 우선했다며 이단정죄
▲최덕성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 이대웅 |
이후에는 중세교회의 이단정죄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폈다. 먼저 동·서방교회 분열의 주 원인은 누가 전체 교회를 이끌어 갈 주도권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를 교황의 지배권에 예속시키려 했지만, 동방교회는 신앙 문제의 최종 권위가 로마 주교에게 있지 않고 주교들의 회의(공의회·Council)에 있다고 보면서 독자성을 고수했고, 서방교회 교황좌의 지배권 또는 수위권(Supremacy)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둘은 서기 1054년 분열됐고, 1천년 가까이 유지됐던 기독교회의 단일성은 깨졌다. 1204년 서방교회가 동방교회를 상대로 일으킨 제4차 십자군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동방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비잔틴 기독교’는 성상숭배 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으로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성직자들은 성상숭배를 선호했지만 ‘평신도’였던 동로마제국 황제는 이를 우상숭배 행위로 여겼고, 성상 옹호와 철폐를 둘러싼 교회와 황제의 갈등은 국가와 교회의 우열 관계까지 뒤섞여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결국 동방교회는 제7차 니케아공의회(787)를 통해 성상 옹호론자들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 무렵 소아시아 동부지방에서는 ‘바울당원주의자들(Paulicians)’이라는 이단이 급격히 확산됐다. 자신들의 신앙 계보가 바울에서 시작됐고, 박해를 받은 신자들을 거쳐 이어져 왔다면서 성상철폐론을 지지한 것. 이는 플라톤의 이원론 양식 안에서 영지주의와 마니교, 고대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 지방의 미신을 기독교 신념과 혼합한 사상이었다. 또 그리스도의 양자론(養子論)을 받아들이고 시편과 신약성경만을 정경으로 여겼던 동방교회의 보고밀주의자들(Bogomiles)은 기존 교회조직과 체계를 부정했다.
그런가 하면 11세기 서방교회에서는 ‘카타리파(Cathari)’가 번성했다. 프랑스 남부 알비젠스 지방에서 일어난 이들은 마니교와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기초하는 등 바울당원주의·보고밀주의와 비슷했다. 카타리파는 12세기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 급속히 확산됐고, 교황청은 박멸작전을 펼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중세 기독교의 영성과 신비사상의 극단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J. Eckhart)의 신비주의는 범신론적 모습을 보이면서 이단으로 정죄됐고, ‘성령파’로 일컬어지면서 기존 교회의 성직계급을 거부했던 ‘엄격파’, 피오르의 요아킴(Joachim de Fiore)도 있었다.
이후에는 ‘종교개혁자’들이 잇따라 이단으로 정죄당해 극심한 박해를 받는다. 왈도파(Waldesians)는 성경을 사랑하고 열심히 읽으며 그 가르침을 단순히 실천했다. 최 박사는 “그들은 ‘거룩한 공-보편 교회를 믿는가’를 물으면 ‘예’ 하고 답했지만,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가’라고 물으면 주저했다”며 “교계를 본질로 여기는 로마교회 시각에서 왈도파는 분리주의 집단이었으나, 개혁교회관으로 보면 성경이 제시하는 본질에 가까운 신앙고백 공동체 성격의 교회였다”고 했다. 왈도파 신앙운동은 부패한 성직자들과 말씀이 빈곤한 로마교회에 대한 ‘평신도들’의 불만 표시였고, 교황이 통치하는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왈도파는 남부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의 새벽별’ 존 위클리프(John Wyclif)도 교회 본질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가졌고,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전통이나 통치자들의 권위보다 수위(首位)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을 교황의 소유물로 보는 로마교회의 견해를 거부하고 성경의 권위와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는 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이는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등 성경번역 추종자들에 의해 실현된다. 그는 또 화체설을 부정하는 성만찬 교리를 주장하면서 이단사상으로 정죄됐고, 소천 후 ‘시신 화형식’을 당한다.
이 외에 위클리프의 사상을 책으로 접한 얀 후스(Jan Hus)는 보헤미아 지방에서 불길처럼 타오른 교회개혁운동의 기수였지만, 이단으로 정죄당해 화형당했다. 그는 후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다. 이탈리아 당대의 ‘세례요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la)는 수도원 생활방식을 개혁하고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켜 고문을 당했다.
최 박사는 “중세교회 초기의 동서방교회 갈등과 성상숭배 논쟁의 이단정죄는 자가당착이었고, 후기의 이단정죄는 적반하장이었다”고 정리했다.
기사의 본문을 읽고 생각합니다. 중세교회의 이단史 3부류에 비해 오늘날의 이단은 다소 복잡한 모양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 일색이고, 이원론적 신비주의이고, 그리고 자기 영광주의를 추구하고, 인간의 교만으로 빚어진 정치신학보다 더 악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종교혼합주의까지 등장하여 혼란습럽게 합니다. 영 분별력이 없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붙들기조차 애매한 한국교회 현장이 안타깝습니다.선조들의 믿음을 따라 마지막까지 진리의 권위를 존중하고 헌신할 충성된 증인들이 모여 기도하며 종말론적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그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