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과 집단발작
확실한 증거, 근거 없이 남을 정죄하고 선무당 사람 잡는 식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상당한 식견을 가진 지식인도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한다. "다수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다수 판단의 오류, 그릇된 권위에 호소, 허수아비 공격을 하는 지식인들, 집단발작 증세를 보이는 대중을 보면 드레퓌스 사건이 머리에 떠오른다.
1. 알프레드 드레퓌스
프랑스 군부는 1894년 12월 비밀재판을 통해 프랑스군 참모본부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드레퓌스가 적국인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 무관에게 국가의 주요 기밀을 넘기려 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씌워 단죄했다.
단서는 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였다. 이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지목하면서 그의 이름의 첫 글자가 암호 'D'와 일치하고 그 필체가 같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했다.
드레퓌스는 ‘반역자’라는 야유를 받으며 자랑스러운 프랑스 군에서 불명예제대 당하고 이어서 프랑스령 기아나, 아프리카의 적도 부근에 있는 ‘지옥도’라는 섬의 돌감방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24시간 감시를 받았고, 특히 밤에는 두 발에 이중의 족쇄가 채워지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1894년 9월, 프랑스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대사관 무관이었으며, 발신인은 익명이었고,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명세서’였다. 중요한 군사 기밀이 독일 대사관을 거쳐 빠져 나가고 있음을 탐지했다.
스파이 활동의 거점인 독일대사관을 감시하는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을 찾기 위한 수사를 시작했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유태인계 장교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한 것을 보고 그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물론 이같은 판단의 배후에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유태인은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고 떠들어 댔다.
드레퓌스가 구속되자 반란자에 대한 비난 여론이 프랑스를 뒤흔들었다. 언론들은 드레퓌스에 대해 혹독한 매질을 계속했다. 평소 반유태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신문들이 이 사건을 확대하여 보도했다. 드레퓌스에 대한 온갖 혐의, 추측, 스파이 행위에 대한 과장된 소문들을 연일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드레퓌스는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진실을 밝히려고 발버둥 쳤지만 허사였다. 그의 가족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지탄했다. 한 때 자살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12월, 비밀재판에서 드레퓌스를 종신형에 처한 군부의 참모장은 “국가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 없지만 대역죄인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했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한 일부 양식 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당시의 프랑스는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뒤여서, 군부는 패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로 했다. 유태계 장교 드레퓌스는 그러한 희생양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드레퓌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유배지 감옥으로 이송된 2년 뒤, 프랑스군 고위 장교 피카르는 우연한 그 사건의 진짜 간첩을 적발했다. 드레퓌스의 무죄가 드러났다. 그러나 진실을 밝힌 피카르는 오히려 한직으로 좌천되고, 드레퓌스의 무죄 주장은 묵살되었다.
2. 에밀 졸라
드레퓌스의 고독한 싸움을 눈여겨보던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1898년에 <로로르>라는 작은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기고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이다.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한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다”고 외쳤다. 이름 없는 이 신문은 이날 30만부나 팔렸다. 전 세계에서 3만여 통의 격려 편지가 이 신문과 에밀 졸라의 집에 쏟아졌다.
프랑스 뿐 아니라 세계가 드레퓌스사건으로 열화같이 들끓자 프랑스 고등법원은 1898년 6월 3일 당초의 군사재판의 무효를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그러나 군사법원은 드레퓌스에게 금고 10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에밀 졸라는 다시 일어서서 “정의를 구하려는 외침은 머지않아 온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라고 예고했다. 프랑스와 세계의 양심세력들이 드레퓌스를 우렁차게 성원했다. 프랑스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를 특별사면으로 석방했다. 최고 재판소는 1906년 7월 12일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처음에는 드레퓌스의 처벌을 옹호하던 언론이 나중에 가서는 그를 살려낼 것을 주장함으로써 언론 특유의 카멜레온의 속성을 드러냈다.
드레퓌스는 1906년에 대법원에 의해 복권되기는 했지만 프랑스군은 당시 군법회의가 음모와 조작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리베라시옹’지(1995년 9월 12일자)에 따르면, 프랑스군이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 사실을 공식 인정한 것은 사건 이후 100년만이다. 프랑스군 역사학자 장 루이 무뤼 장군이 프랑스 유태인 중앙 종교법원에서 행한 연설에서 비로소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했다. 무뤼 장군은 유태인 종교 법원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반유태주의 정서에 편승하여 무고한 사람을 음해한 사건이며, 조작된 서류에 입각하여 추방한 군사적 음모임을 인정한 것이다.
3. 좌파 우파
드레퓌스 사건은 계파(좌파와 우파)에 직결되어 있다. 프랑스 시민혁명 때부터 형성된 좌파는 평등주의를 지향했다. 평등을 최우선의 가치로 보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라도 사회적인 평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요구했다. 우파가 법 규제를 완화해서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이나 개인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자고 말을 하면 좌파는 그러한 자유는 사회적인 불평등을 야기 시킨다고 하여 오히려 규제를 강화하고 사회적 부를 가져가는 소수의 인원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파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1914까지 왕당파와 보나파르트주의의 여러 조류와 뒤섞여 있었다. 반면 좌파는 모든 경향의 공화정 지지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크고 작은 위기에 처했던 제3공화국은 초기 수십 년 동안 취약점을 드러냈다. 우파와 극좌파의 반의회주의는 1899년까지는 기회주의 정부를, 이어서 1905년 이후에는 급진주의자들이 사회문제에 직면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이 발상하자 프랑스 국민들은 이를 계파에 따라 이해했다. 1898-99년의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수많은 사건들이 이 시기에 발생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드레퓌스가 간첩혐의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가 다시 풀려나는 것으로 이 사건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개인의 석방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확대되면서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파(사회당, 급진당)와 드레퓌스를 처벌하려는 파(보수당, 국수주의자, 군부 세력, 성직자들)가 대립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발전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계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했다. 결국에는 프랑스 전 국민이 서로 다른 두 사상에 의해 분열되고, 드레퓌스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결국 사회당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N. 할라즈,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역사적 전개 과정과 집단발작』, 황의방 옮김, 서울: 한길사, 1982).
4. 허수아비 공격, 다수 판단의 오류
프랑스 군부가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단정되어 종신형을 받은 근거를 간추리면 세 가지이다. 첫째는 그의 이름 첫 글자가 “D”라는 것이었다. 문제의 편지 봉투에 적힌 암호 글자 "D"와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글씨체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유태인이라는 것이었다. "유태인이 아니고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사실이 아닌 추측, 심증, 편견, 그릇된 선이해로 말미암은 판단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부여 주었다.
프랑스인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것은 근시안적 귀납추리이다. 심리적 인종적 편견과 자기 의에 도취된 나머지 “X는 틀렸다. 왜냐하면 틀렸기 때문이다”고 하는 오류에 빠졌던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독단적 판단의 오류, 허수아비 공격(attack on straw man)이라고 한다.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에 빠지면 독단이 지적 사생아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오류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단적 판단의 오류와 비슷한 것 가운데 '다수 판단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다수의 판단이면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오류추리이다. 그릇된 권위에 에 호소하는 잘못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 정부는 두 사람의 관리를 일본에 파견하여 왜(倭)가 과연 소문대로 조선을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탐지하도록 했다. 두 사람의 귀국보고는 각각 달랐다. 한 사람은 ‘곧 쳐들어 올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결코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회의를 열고 토론을 거듭했다. 하나의 결론을 얻고자 했다. 김성일은 절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기 전, 임금이 그를 불러 왜 잘못된 보고를 했는가 하고 문책하자 자신도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국민들이 그렇다는 것을 알면 싸움을 하기도 전에 겁부터 먹고 패전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여 동요를 막기 위해 그렇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변명인지, 진심인지, 당시의 정파 사이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판단이다.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고, 그것으로 백성을 안심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심상치 않은 소문 때문에 백성들의 동요가 일어나자 관리들은 백성들을 안심시키느라고 진땀을 뺐다. “우리 임금님(위정자 다수)이 안 쳐들어온다고 결정했으면 안 쳐들어오는 것이지 웬 걱정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청(淸)이 병자호란을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친명을 내세우던 조정은 청군이 평양성까지 침입한 지경에 이르렀어도 “청이 까닭 없이 쳐들어 올 리 없다. 우리 임금님이 안 쳐들어온다고 결정했으므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은 우리나라 임금의 결정에 달린 것이 아니다. 조선 조정(朝廷)의 결정은 (1) 그릇된 권위에 대한 호소, (2) 다수 판단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다수 판단의 오류는 다수의 신념을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X는 진리야. 다들 그렇게 생각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느냐고? 사실이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거든!” 이것은 “달나라에 토끼와 월계수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 “A도 옳다고 생각하고, B도 마찬가지이고, C도 같고, D도 다르지 않고, E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옳다”는 식의 논증이다. 다수의 의견에 따른 판단이 옳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할 사안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안이 있다. 다수가 한꺼번에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또는 "여러 명의 박사님들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것은 틀림이 없어!" 라는 판단은 그릇된 권위에 바탕을 둔 다수판단의 오류(fallacy of appeal to the majority)이다. 사실이 아닌 일반적 신념에 호소(appeal to common practice)한 결과이다(최덕성,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서울: 지식산업사, 2006).
5. 집단발작 증세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역사적 전개 과정과 집단발작』의 저자 할라즈는 드레퓌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판단과 태도를 ‘집단발작’ 이라고 불렀다. 드레퓌스를 매도하여 죄인으로 몰아 법정에 세우고 그를 종신징역형을 살게 한 것은 유태인을 증오하는 프랑스인들의 집단발작이었다는 것이다. 다수가 합세하여 물증도, 근거도 없는 데도 중상모략하고 '때려잡기' 식으로 동료를 음해하여 죄인으로 단정하는 것은 '집단발작'이다.
근자에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은 드레퓌스 사건을 연상케 한다. 분명한 증거나 근거도 없이 동료를 범인으로 단정하여 집단적으로 고발한 것은 다수 판단의 오류를 악용한 것이다,
배울 만큼 배운 지성인들이 허수아비 공격, 독단적 판단의 오류, 다수 판단의 오류에 빠져 형제를 중상모략, 음해하고 명예를 훼손하고 거짓증거를 하는 등, 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집단발작'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리포르만다> (2007.4.15.)에 게재된 글, 재 게재
집단 히스테리 현상의 공포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념 갈등의 우리 근대역사는
계속된 인민재판, 집단 히스테리 현상의 피바다였다.
나도 여러번 보았고 집접 당하기도 해서
그 무모함과 비정함, 악랄함과 당당함을 잘 안다.
참 지도자라면, 적어도 국회의원이라면
적어도 집단발작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냉정하게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
작금의 현상을 보면 열손가락을 셀만큼의 지도자들을 제외하곤 도대체가 여론몰이에 휩쓸리는 쫄짱부들이다.
이래가지고서 어찌 나라를 살리겠는가?
푸랑스 민족과 우리 민족은 민족성이 너무 닮았다.
냄비처럼 들끓는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려는 것은 좋지만 이 집단발작에도 너무 잘 걸린다.
이번엔 대통령이 그 희생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