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찌 우리 잊으랴 6.25
한국동란, 한국전쟁 곧 6.25 전쟁이 일어난지도 72년이 됐다. 1950년 6월25일 주일 새벽 4시에 북한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중공을 끌어들여 불법으로 기습 남침했다.
북한은 지금도 “한반도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적 통일을 이룩하자”고 외치며 남한에서의 미군철수를 계속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자신들이 그토록 싫어한다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해치는 반민족적 전쟁을 일으켰다.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한반도는 포학한 무신론적 공산세력이 붉게 물들인 전체 동북아시아 대륙의 맨 끝자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한반도의 북쪽은 이미 공산화 되었고 남쪽엔 자유 대한민국이 불과 2년 전에 수립되어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북한이 그것마저 삼키려고 일으킨 전쟁이 6.25(북한은 3년 전쟁이라고 함)였다.
일부에서는 미국과 대한민국이 북한을 먼저 침공했다는 소위 북침설 내지는 남침 유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의 좌파 언론인 스톤이 처음 주장했고 진보주의적 정치학자 부루스 커밍스도 같은 입장을 취하다가 나중에 수정하기도 했다. 문제는 한국 내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침설을 믿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좌파 교사들과 정치인, 언론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들이 왜곡된 역사관을 갖고 6.25 북침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6.25는 북한의 김일성이 기획하고 소련의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중공의 모택동이 지원한 한반도 공산화 전쟁이었다. 1948년 8월15일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미군은 그들의 목표가 완성되었다고 판단하고1949년 6월 대한민국에서 철수하였다. 북한은 이때야말로 한반도를 적화할 최선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소련의 스탈린의 승인 하에 미군철수 일 년 후 기습남침을 자행한 것이다.
6.25 당시 남북한의 병력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북한이 강했다. 242대의 소련제 최신식 T-34탱크를 가진 북한에 비해 남한은 탱크 한대도 없었고, 북한은 197대의 전투기를 가졌으나 남한은 전투기 한대도 없이 경비행기 22대가 전부였다. 이와 같이 일방적인 전투장비 우세 속에서 북한은 전쟁개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중앙청 꼭대기에 인공기를 매달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북침설 주장의 허구성을 증명한다.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은 국립극장 앞에서 인민재판을 열고 많은 종교인, 지식인, 시민들을 즉결처분으로 학살하였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보따리를 지고 어린 자녀들을 등에 없고서 정처 없이 남쪽으로 향하였다. 부지기수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끌려가 순교당하거나 실종됐다. 남북한에 존재했던 2천여 개의 교회당들이 파괴되었다.
전쟁개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남한 땅의 90퍼센트를 장악하였고 마지막으로 남은 낙동강 전선이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린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그야말로 이제 자유 대한민국은 공산화되고 한반도 전체가 붉은 색깔로 물들 절대 절명의 위기였다.
이 위기의 순간에 유엔군의 참전결의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세계지도상에서 사라지고 한반도는 공산화 되어 지금쯤 우리는 김정은 수하에서 억압과 빈곤 속에 고통당하고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 얄타(Yalta)회담의 결과로 비운의 38선이 그어지고 소련군이 북한에,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여 군정체제로 들어갔다. 유엔은 임시위원회를 조직하여 남북한 자유선거를 통해 단일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으나, 소련과 북한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유엔의 감독하에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내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그러한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불법적 침략으로 인해 적화될 위기에 처한 것은 자유세계에 대한 최대의 위협인 동시에 유엔의 권위와 존재를 짓밟는 도전이었다. 유엔은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행위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 병력을 철수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공산세력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계속 남하를 계속했다.
유엔은 1950년 7월7일 유엔 사령부를 설치하고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부대가 참전해 “자유”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구하고자 피흘리며 싸웠다. 그 외에도 40개국이 전쟁물자 지원국으로 참여했다. 이것은 유엔 역사상 최초의, 최대 규모의 집단적 군사행위였고 전 세계를 위협하는 공산세력의 침략에 맞서는 자유진영 국가들의 중대한 집단행동이었다. 자유세계는 이렇게 벼랑 끝에 선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희생적인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에 그 이름과 위치마저도 잘 알려지지 않은 미미한 약소국이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을 공산세력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5만여명의 외국인 젊은이들이 유엔군의 일원이 되어 귀한 생명을 바쳤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기적 중의 기적이요, 대한민국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간섭이 아니고서는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인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은 OECD 제 11위 경제대국이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세계 제2차대전 후 빈곤하고 낙후된 후진국에서 민주적 선진국으로 발전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한 나라이다.
6.25는 남북한 합쳐 250만 명의 사망자와 셀 수 없는 부상자, 전쟁고아, 미망인,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한 비극적 전쟁이었다. 필자는 미국 신학교 재학 중 성지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쉠(Yad Vashem)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독일 나치 권력에 의해 6백만명의 유대인들이 대학살된 것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박물관이다.
히브리어 “야드”는 기억을, “바쉠”은 이름을 의미한다. 그 박물관의 출입구에는 “기억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만, 망각은 우리를 다시 포로 되게 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유대인의 최대 비극의 하나인 대학살(Holocaust) 역사를 기억하고 후세에 영구히 전하자는 뜻이다. 이러한 유대인의 정신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흔히 알려진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는다”(We forgive, but not forget)와 같은 맥락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참혹한 6.25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반드시 올바르게 기억함이다. 그리고 전쟁의 비극을 일으킨 북한이 기적적으로 용서를 구하게 되는 통일의 그날이 속히 올 수 있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을 6.25수렁에서 구해주시고 회복시켜 굳게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항상 감사하는 일이다.
기독인은 나아가서 우리의 후세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합심해서 간구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황현조 박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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