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른 고 한부선(Bruce Hunter) 선교사의 아버지 역시 선교사였는데 그가 임종하기 직전 아들을 부르더니 꺼져 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귓속말을 하더란다. "아들아, 종종 낮잠을 자도록 해라" 평생을 선교사로 수고한 아버지가 대를 이어 선교사역을 감당할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뜻밖에도 "종종 낮잠을 자라"는 말이었다니!... 평생의 선교사역을 뒤돌아 볼 때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만해도 10년도 훨씬 더 전의 얘기지만 당시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던 동기 목사가 소천(召天)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친구는 신학대학 3학년 때부터 나와는 특별한 이유로 아주 가까웠던 친구다. 당시 나는 뭔가 고상한 기대를 갖고 입학했던 신학대학의 세속적 분위기에 실망하여 대학 2학년을 마치고 1년간 휴학이라는 방황을 끝내고 복학을 했던 때였고 그 친구는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여 복학을 했던 시기였다. 형편이 다르긴 했지만 복학생이라는 공통점에 서로가 끌린 것인지 우리는 금방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를 통하여 나는 억눌린 나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고 따라서 억눌렸던 자아가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격으로 변모하여 터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학교 졸업 후 그는 부산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강도사로, 서울 모 교회의 부 목사로, 독일 마인쯔에서 교포들을 상대로 꽤 오랫동안 디아스포라 목회를 하다가 귀국하여 부산 모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는 등 다양하고 활발하면서도 안정적인 목회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목회하던 부산의 교회를 사면하고 당시 신도시로 조성되고 있던 분당으로 올라와 개척을 한다고 했다. 왜 안정된 교회를 사면하고 굳이 힘들고 어려운 개척목회로 뛰어 들었을까?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여 종군하고 있던 나로서는 의외의 결단이라 생각되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의 이른 소천(召天)에 대한 전조는 진작부터 있었다고 한다. 한 해전 뇌출혈로 인한 실어(失語)증으로 한동안 설교를 하지 않고 요양을 하면서 치료를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실어증에서 회복이 되는가 싶어 좋아들 했었는데 최근에 와서 지근의 친구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 교회의 주일 5부 예배를 혼자 사회. 설교 다 맡아서 인도해왔고 다른 교회의 요청으로 주중에는 사경회 인도까지 해 왔다는 것이다.
장로교 고신교단 설립자의 한 사람인 고 주남선 목사님은 노년에 병석에 누운 그를 찾아온 후배들을 향하여???? "야, 이 사람들아 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데이~"하며 휴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태어남에는 순서가 있어도 떠남에는 순서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충격적인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일과 쉼이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 나의 평생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어 가는데 조금의 소홀함도 없도록 더욱 존절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게 된다. 먼저 출발한다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며 서두른다고 해서 빨리 도착하는 것도 아님이 인생이기에.!
김희택 목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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